1.
인간 육신의 단면은 익어 벌어진 석류 속처럼 영롱하였다. 하리제는 한 손에 큰 칼을 늘어뜨린 채 오늘의 성과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제 막 첫 번째 공정을 마쳤다. 적당한 크기로 대강 잘라 쌓아놓은 육신의 무더기로부터 아직 굳어지지 않은 즙액이 흘러나와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붉고 진득한 액체가 매끈한 유리질의 궁전 바닥으로 스멀거리며 퍼져나간다. 하리제는 무르익은 과실즙 같은 그 선연한 빛깔이며 생생한 향기와 흐르는 모양으로 이번 수확물의 질이 어느 때보다 좋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즙액이 저리 흐르도록 두기는 아까운 노릇이다. 하리제는 그만 시선을 거두고 아이들을 불렀다. 지시대로 물러서서 견학하던 아이들이 우르르 작업대로 몰려들었다. 피 웅덩이에 거침없이 찰박거리는 여럿의 맨발이 경쾌하다. 이 아이들은 이제 막 유리관 바깥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딘 어린 약차들이다.
어린 약차들은 제각각의 흥미에 따라 작업대에 널린 육신의 조각을 하나씩 골라잡았다. 각자 날카로운 손톱으로 찔러보거나 썰어보거나 하였다. 개중 특별히 이가 많이 자라난 한 아이는 그 발달한 송곳니를 사용하여 육신 한 조각에서 튀어나온 뼈를 오드득 씹어 으스러뜨려본다. 태생 약차다운 행동이었다. 곧 아이들의 양손은 물론 드러난 얼굴이며 팔뚝까지 금세 붉은 혈액으로 물들었다.
하리제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이 아이들은 모두 하리제의 자녀이며 순정한 약차이니 이제부터 빠르게 배우고 익힐 것이다. 하리제는 늘 그렇듯 애정도 기대도 담지 않은 눈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바라본다. 그는 조금 전 혼자서 저 한 무더기의 육신을 해체하는 시범을 보였으나 그 푸른 옷자락에 한 방울의 피 얼룩도 묻어있지 않았다.
잠시 후 다른 한 무리의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온다. 이 말끔한 약차들은 걸음걸이가 반듯하고 태도가 차분하다. 그러나 작업대 주위에서 피 칠을 하며 노는 천진한 아이들과 비교하여 몸집의 차이는 거의 없다. 하리제가 빚는 약차의 아이들은 모두 육신이 완전한 상태로 출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지 한 주기만을 앞서 유리관 밖 세상으로 나왔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한 주기의 차이가 컸다. 새로 들어온 아이들은 피와 살을 맛보기에 여념 없는 아우들을 멈추게 했다. 살을 찢고 피를 마시는 행위는 약차의 본능이다. 세상에 처음 났을 때 본능을 쫓음은 당연하나 그런 다음에는 세계를 구성하는 지성체로서 목적을 가져야 한다. 약차의 왕국, 이곳 탄생의 궁전에서 한 주기 먼저 태어난 약차들이 한 주기 늦게 태어난 아우들에게 이치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희생물의 살을 가르고 뼈를 바를 때 효율적인 칼날의 각도, 손실 없이 골수를 분리하는 요령, 내부 장기의 오물을 말끔히 제거하여 순정한 원료를 얻는 과정을.
약차의 아이들은 곧 서로를 도와 잘 손질한 뼈와 힘줄과 근육과 지방의 덩어리를 분류하여 작업대 옆 수조로 옮기기 시작했다. 각각의 수조 안에서 원료는 점차 융해된다. 투입한 조직 덩어리는 모조리 융해되어 친수성 교질용액으로 환원된 다음 몇 번의 여과와 배합 과정을 거쳐 마침내 생명 발생과 유지에 적합한 양액으로 제조되는 것이다.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으므로 계속 지켜볼 필요는 없었다. 하리제는 푸른 옷자락을 떨치며 일어섰다.
*
하리제는 탄생의 궁전에서 안쪽으로, 더욱 깊숙한 장소를 향해 갔다. 하리제는 이 길을 오로지 혼자서 걸어갔다. 지금 하리제는 약차족의 유일한 왕이므로. 세상 모든 약차를 빚어내는 어머니 왕으로서 태어난 그 순간부터 하리제는 원하는 때에 이 궁전의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하리제는 궁전 심부의 어두운 회랑으로 들어섰다.
너른 복도를 따라 양쪽으로 수없이 많은 유리관들이 끝없는 열주처럼 늘어서있다. 사방은 어둑하고 시야를 밝히는 광원은 각각의 유리관 내부로부터 비치는 푸르스름한 생명의 빛 뿐이다. 이 빛은 투명한 유리관을 가득 채운 양액으로부터 저절로 흘러나왔다. 양액의 원료로 사용된 생명과 혼의 에너지는 이곳의 특수한 유리관 내부의 작용으로 마침내 서늘한 빛의 형태로 변화한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약차를 길러내는 근원이었다.
하리제는 어두운 복도를 천천히 거닐며 유리관 하나하나를 들여다본다. 유리벽 가까이로 들이민 무표정한 얼굴은 온통 서늘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푸른 약차녀 하리제, 저 바깥의 십육대국에서 널리 부르는 청색귀(靑色鬼)라는 이명에 걸맞은 모습이다.
하리제는 무감하게, 그러나 면밀한 태도로 접근하여 각각의 유리관 내부를 살펴본다. 수없이 늘어선 유리관 하나마다 발생중인 약차 하나가 들어있다. 이제 막 티끌만한 형체를 갖추는 것들부터 곧 세상에 나올 준비가 다 된 개체까지 발달 정도는 다양하다.
발생이란 신비한 과정이었다. 하리제는 온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생명의 장인임에 틀림없으나 스스로 생각하기로 아직 생명 발생에 온전히 통달하지는 못하였다. 하리제는 이제까지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동안 생명을 빚는 일을 반복해왔다. 그럼에도 매번 자신이 작성하는 생명의 최종 형태를 완벽하게 예측하거나 지정할 수는 없었다. 발생의 결과물은 어떤 공정으로도 완전히 통제되지 않았다. 완성에 가까운 유리관 속의 얼굴들은 전부 각각이 다른 개체성을 쌓아올렸다. 어쩌면 그것이 생명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하리제가 부여했던 발생의 최초 조건은 같았는데도 각 개체는 전부 서로 구분되는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무수한 반복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렇다. 다만 이 새로운 생명 모두가 동일하게 약차족이며, 하리제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리제는 본디 세상 모든 약차의 근원으로 태어났으므로 바로 이 하리제의 육신으로부터 비롯한 생명의 씨앗으로써 이 모든 아이들의 발생 토대를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약차가 하리제와 닮았다.
하리제는 오늘도 자신을 닮은 수많은 얼굴들 사이를 거닐었다. 세심하게 살피고 분류하여 바로 다음 주기에 세상으로 내보낼 개체와 그 다음 주기에 내보낼 개체를 선별해냈다. 그런 다음에는 각 유리관의 장치를 조작하여 양액의 공급 정도를 조절하고 완료 개체의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돌보았다. 이것이 탄생의 궁전에서 주인이 하는 일이었다. 이제는 오로지 하리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지금 하리제는 혼자서 이 궁전의 왕이었다.
오직 홀로 약차의 어머니 왕이라는 사실에 하리제는 이전과 달리 때때로 피로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의무에 따라, 산 것이 살아있는 한 숨을 쉬듯이 하리제는 매일 모든 유리관을 돌아보았다.
끝없이 늘어선 유리관 내부에 가만히 떠 있는 무수한 얼굴, 얼굴들.
이곳 탄생의 궁전에서 유구히 변함없는 풍경이다. 그러나 문득 멈추어 살펴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었다. 이 모든 개체가 빠짐없이 하리제를 닮았으나 어느 개체는 아주 많이 닮은 반면에 또 다른 개체는 조금 닮았다. 하리제는 자신을 조금만 닮은 개체에게서 늘 그 형상의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다른 이의 모습을 본다.
반지가 약차왕.
모든 새로운 약차에게 하리제의 모습이 있는 것처럼 반지가의 모습도 들어있다.
하리제는 문득 한 유리관 앞에 멈추어 섰다. 그 안의 개체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푸르스름한 양액 너머로도 선명하게 보이는 뚜렷한 턱선과 우뚝한 콧날, 두툼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입술. 그 얼굴은 이제까지의 어느 결과물보다도 특히 반지가를 빼닮았다. 하리제는 어떤 충동에 휩싸였다.
‘이것’은 거의 완성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다음 주기에 유리관 밖으로 나올 것이다. 하리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개체를 중단할까?’
하리제는 중단하고 싶다. 지금 선 자리에서 손을 뻗으면, 그리고 단지 몇 개의 조작단추를 작동하기만 하면 중단할 수 있었다. 즉시 양액의 공급을 멈춘다. 내압을 조정하여 유리관 내부에 떠 있는 저 육체를 부순다. 으스러뜨린다. 폐기한다. 간단한 일이다. 하리제는 할 수 있다. 그때 하리제는 유리관 속 반지가와 닮은 얼굴을 보는 자신에게서 어찌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가 흘러넘침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다시 내면을 향해 물었다.
‘이 개체를 중단하는 일이 옳은가?’
바라보자 여전히 눈앞에 그 반지가 약차왕의 얼굴이 있다. 정말이지 이 아이는 그와 너무 닮았다. 완성에 거의 가까워 자아가 깃들기 시작하는 약차의 형상이 문득 유리관 안에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뜬다. 이어서 바깥을 바라본다. 어머니 하리제를 향하여 입술 끝을 부드럽게 휘어 올린다. 미소 짓는다. 하리제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오래도록 사랑했던 형태와 똑같은 입술이다. 그로부터 기포 몇 점이 방울방울 일어나며 떠오르고 있었다.
‘자, 그만 이 아이를 부술까?’
하리제는 정말로 부수고 싶다. 그러나 가까스로 참아낸다.
감정의 격동으로 일을 그르치는 것은 세상의 법칙 매만지기를 일로 삼는 기술자에게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생명의 장인 하리제는 자기 자신을 이성의 틀 안에서 통제하는 방법을 안다. 또한 경험이 많고 신중한 하리제는 육체가 닮은 정도와 그 정신이 닮은 정도는 상이한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리제는 거듭 그 사실을 되새겼다.
이 개체는 완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유리관에서 나오는 즉시 약차족의 일원으로서 좋은 병사가 되고 전력으로 기능할 준비를 다 갖추었다. 실로 이 단계에서 폐기하기는 아까운 노릇이다.
물론 부순 다음에 교질용액으로 환원하여 재사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에너지의 손실이 발생하며 시간 또한 거듭 필요하다. 에너지나 양액의 손실 정도는 벌충할 수도 있겠으나 이 우주에서 시간만은 벌충할 길이 없다. 반지가 약차왕이 배신하여 떠나간 이 궁전에 홀로 남은 하리제에게는 이제 그만한 시간이 없었다. 저 바깥세상 십육대국의 판도는 날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2.
바라문은 오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주장해왔다.
자아나 세계는 최초의 유일한 범천으로부터 나와 전변하였다. 그러므로 바라문만이 최상의 종족이다. 다른 모든 종족은 저열하다. 바라문만이 밝은 종족이며 다른 종족은 모두 어둡다. 바라문만이 태양아래 당당히 섰고 다른 모든 종족은 더럽고 탁한 진창에 스스로를 처박았다. 바라문만이 범천의 아들들이요 직계 자손들이요 입으로 태어났고 범천에서 태어났고 범천이 만들었고 범천의 상속자이니,
이외는 모두 사문(沙門)이다. 바라문이 육사외도를 멸하리라.
그러나 석가의 본신은 사문에서 나왔다. 바라문의 세상에 맞서 석가세존이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에 단 하나의 유일은 없다. 범천은 세계최상의 유일이 아니다. 세상만물은 각자가 유일하며 불멸의 실재로서 이미 완전함을 지니고 있다. 이 모두가 모여 인간이며 세계가 된다.
석가의 법륜이 새로운 진리로서 세계를 가로지르기 시작하였다.
석가족의 세력이 밀물처럼 바라문의 나라로 짓쳐들었다. 석가의 진리는 십육대국 온 땅으로 들불처럼 침범해갔다. 더 이상 유일한 범천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텅 빈 하늘을 도리타천이 종횡무진으로 누볐다. 도리타천이 밤새 날아서 십육대국 상공의 어느 한 지점에 자리 잡으면 그날은 바로 아래 지상이 전장이었다.
도리타천은 삼십삼천의 세상이 합종하여 이룩해낸 가장 거대한 공중요새다. 동서남북의 사방으로 각기 여덟 천이 결합하였고 그 정중앙에 황금과 백은, 유리와 수정으로 이루어진 수미산이 우뚝 솟았다. 이 수미산 꼭대기에 사방 사천왕과 삼십이 천을 모두 통솔하는 제일천 선견성이 올라앉았다. 세상 가장 높은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선견성의 임금이 누구인지를 지금의 세상 전부가 안다.
천주 제석천. 석가세존의 가장 강력한 수호신으로 좌정한 그 존재의 이전 이름은 ‘인드라’였다.
가장 강인한 자, 샤크라 인드라. 물길을 인도하는 발라이며 천둥과 벼락을 부리는 뇌신이며 그로써 멸절의 아수라 브리트라를 물리쳐 십육대국 온 땅에서 영원히 몰아낸 자. 불멸의 소마를 마시는 존재. 가장 높은 범천의 아들이며 바라문 모든 신들의 왕.
그와 같은 존재가 돌연 불문에 귀의하여 스스로 천부중 제석천이라 일컬었을 때 세계가 요동쳤다. 온 천지를 뒤흔드는 파문은 끝내 십육대국 변방의 북쪽 산맥에까지 도달하였다. 반지가는 그 거대한 물결에 분별없이 휩쓸리고 말았던 것이다.
‘영원한 나의 정북(正北), 나의 아내, 내 사랑하는 하리제여. 우리는 이 세상의 전쟁을 끝낼 수 있어요.’
‘허튼 소리.’
그때 반지가에게 더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유구한 세월동안 약차왕의 아내이며 모든 약차의 어머니 왕이었던 하리제가.
반지가와 하리제는 최초의 약차로서 한날한시에 태어났다. 세상의 시초부터 반지가 약차왕과 하리제는 생의 목적을 함께하는 동반자였다. 오래도록 둘이서 모든 약차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였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붙잡고 우주의 시간을 함께 걸어가도록 태어났다. 섭리에 따라 종말의 날까지 물이 물고기의 세상이고 하늘이 새의 세상이듯이 하리제는 반지가의 세상이었는데, 분명 그러했을 터인데, 어찌하여 그 혼자서 달아나고 말았는지 하리제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가 부재하는 동안 오래된 애정은 쉽게 말라붙었고 진한 증오와 분노가 대신 고였다.
반지가가 마지막까지 모두 함께 가기를 바랐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리제는 결코 수락할 수 없었다. 하리제가 그를 때리고 달래고 다시 때렸으나 반지가가 마음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결국 모든 약차의 어머니 왕으로서 하리제는 그를 약차의 지반에서 내쫒았다. 반지가는 궁전에서 쫓겨난 다음 오직 혼자서 북쪽산맥 바깥으로 사라졌다. 하리제는 아이들과 함께 남았다.
쫓겨난 반지가는 약차왕이 아니었다. 하리제는 더 이상 반지가의 정북이 아니었다. 영구히 하리제의 자리여야 했을 반지가의 정북에 저 증오스러운 석가와 제석천이 있었다. 반지가 약차왕은 약차의 왕국에서 사라졌다. 저 바깥세상에서 그의 새로운 이름은 석가족 사대천왕 가운데 하나,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이라 한다. 바라문들의 세상에서 인드라가 사라지고 대신 석가의 천주제석이 존재하게 된 것과 똑같은 이야기다.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전변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리제가 살아가는 우주는 끝나지 않았으며, 반지가가 남긴 말들은 하리제의 뇌리 한구석에 남아 이따금 다시 새어나오곤 하였다. 그것이 언제나 하리제의 분노에 새로운 기름을 부었다.
‘하리제. 사랑하는 나의 아내, 우리 아이들의 어머니여. 제발 내 이야기를 들어봐요. 우리 종족은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어요.’
그때 반지가는 석가의 설법에 취해 있었으리라. 바라문 최상계급의 왕부터 들풀에 앉은 벌레 한 마리까지 모두가 평등하고 완전하며 존귀하다는 향기로운 말이 그의 사고를 멈춰놓았다. 그토록 모두가 존귀한 우주에는 태생 식인귀인 약차족의 자리 또한 있으리라 그는 믿었다. 순하고 어리석은 남자였다. 반지가 약차왕이 자기 자신을 지워 불법에 귀의하고도 세상의 전쟁은 지금까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리타천으로부터 매일같이 구름을 타고 한 무리의 흰 코끼리 수레가 내려왔다. 흰 코끼리가 철로 된 불법의 수레바퀴를 끌며 전장을 가로지르면 으깨진 바라문의 육신이 더러운 진흙처럼 흘러 땅을 적셨다.
그토록 잔혹한 군대의 선두에는 언제나 천주제석이 있었다. 제석천은 스스로 도리타천의 궁전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금강저를 높이 쳐들었다. 천주 제석천은 인드라였을 때와 똑같이 강력하며 여전히 자비가 없었다. 천지사방으로 벼락이 내리치고 바라문의 군세는 속절없이 재와 먼지로 흩어졌다. 그러한 때에 언제나 제석천을 추종하는 사방의 천부중 신장들이 있었다.
그들 넷 중의 우두머리는, 스스로 금강석으로 깎아낸 당간지주라도 되는 듯이 석가세존의 보당(寶幢)을 높이 들었는데……,
그 보당은 사람의 머리로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아, 다문천왕이여. 약차족의 아버지 왕이었던 석가의 무신이여. 그는 이제 약차가 아닌데도 여전히 세상의 잔혹을 담당하고 있었다. 석가가 불러일으킨 지상의 전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소문을 하리제는 바라문의 나라 한 귀퉁이에서 사실이라 전해 들었다. 마가다국 빔비사라 왕이 전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