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번 장마는 상당히 늦게 시작하는 듯했다. 해가 쨍쨍한 하늘을 창문 틈으로 조심히 바라보니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일기예보를 바랄 수 없으니 그저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그저 기다리는 것도 슬슬 한계다. 집에 남은 마지막 물을 한 모금 마신 것이 벌써 이틀 전이었다.
뭐라더라, 333법칙인가 뭔가에 의하면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음식 없이 삼 주, 물 없이 삼 일, 공기 없이 삼 분이라고 한다. 아마도 평균 수치가 그렇다는 거겠지만 어쨌든 그 평균 수치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법칙이 아니고라도 몸이 먼저 느끼고 있다.
오늘도 평소와 같이 일어나서 눈을 떴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고개만 들어서 시간과 비가 오는지를 확인했다. 시간은 열 시였고 비는 오지 않았다. 오늘도 물은 글렀구나 하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머리가 찡해지고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먹지를 못해서 몸이 상했거나 지병이 빈혈이거나 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였다. 아, 내가 목이 말라서 그렇구나.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이다.
사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목말라 죽으려면 아직은 시간이 남았잖아?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혼자고 만약에라도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해질 경우 꼼짝없이 목말라 죽거나 어렵사리 나가서 힘도 못 써보고 물려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사태는 되도록 피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차도 없고 사람도 거의 없어진 지금 밖이 소란스러워지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누군가가 쫓기고 있으며 누군가들이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그 쫓기는 누군가가 집에 가까이 온 모양인지 소란스러움이 점점 커져갔다. 나는 거의 2주 만에 느끼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창문으로 다가가 반투명한 유리창을 조금만 더 열었다. 우리 집은 주택가 한복판의 T자형 길 중 T의 왼쪽 겨드랑이에 위치한 다세대주택의 꼭대기 집이었다.
따라서 창문을 통해서 길 전체를 다 볼 수 있는데 그런 창문 사이로 보인 것은 웃통을 벗은 남자였다.
남자는 볼품없이 마른 몸으로 거의 수십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뒤에 달고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달리는 방향이 하필이면 바로 우리 집 쪽이었다. 도대체 저 남자가 무슨 바보 같은 이유로 저렇게 목숨을 걸고 달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나에게도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혹시나 남자 뒤쪽의 사람들에게 내가 보일까 고개를 더 숙이고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의 손에는 1.5리터짜리 물통이 두 개 들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근처의 슈퍼에서 가져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 집을 지나치나 싶어 보는데 잘 달리던 남자는 우리 집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오더니 발을 헛디디고 넘어졌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물통이 굴러가고 하나는 터져버렸다. 남자는 힘겹게 일어나 터지지 않은 물통을 하나 집어 들더니 소리치며 자신의 머리 위에 부었다.
“망할 비야 내려라! 아니 내리지 마라! 시발 돌아버리겠네!”
그리고 바로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몸을 물어뜯었다. 나는 그쯤에서 창문을 닫았다. 으아아아아아 하고 길게 들려오던 비명소리가 창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니 어어어어어어 하는 정도로 먹먹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 남자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라고 그런 미친 짓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창문을 닫아도 남자의 모습은 계속 머릿속에 머물렀다. 망할 비야 내려라 으아아아아 아니 내리지 마라 으아아아아 시발 돌아버리겠네 어어어어어. 마치 기우제를 지내는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물 없는 밥이 목을 넘어갈 리 없으니 곰팡이가 조금 핀 빵으로 대충 허기만 때우고 말았다. 그 후에는 읽히지도 않는 책을 잡았다가 들리지도 않는 라디오를 잡았다가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초저녁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에 잠에서 잠깐 깨어났을 때 드드드드드드 하는 소리가 들려서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대비였다. 고개를 돌려 빨간 동그라미가 거의 칸을 다 채운 달력을 보니 6월 26일이었다.
나는 남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남자가 쓰러져 있을 길 한복판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죽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는 천천히 비와 피가 섞인 웅덩이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남자는 몸을 완전히 일으켰지만 비를 피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리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내려라, 내리지 마라, 씨발 돌아버리겠네.”
남자의 말을 상상하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창문을 닫았다. 내일은 물을 찾아 남자가 몸을 던졌을 슈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비가 드드드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가운데 나는 다시 자리에 누웠고 그 불규칙한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잠들기 직전에 비가 오는 것을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고 한 가지 생각만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이제 장마가 시작되었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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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따라서 기말고사가 끝나고 찾아온 여름방학이 일찌감치 찾아온 더위에 비하면 훨씬 반가웠지만 사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늘어지는 중이었다. 방학이 시작할 때 즈음에는 이거 한다 저거 한다 말은 많았지만, 2박 3일 여행을 한번 갔다 오고 고등학교 때 친구를 몇 번 만나니 오히려 나가기가 더 귀찮아졌다.
물론 그런 나태해진 남자 대학생들에게는 게임이 찾아오기 마련이었고 그에게도 그러했다.
어느 날 오후에 그는 비가 올락 말락 흐린 하늘이 기분 나빴지만, 장마 전의 찌는 듯한 더위를 조금 식혀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그나마 괜찮았다. 게다가 월요일이 시작되고 군인인 아버지가 부대로 돌아가는 것을 배웅하러 어머니가 집을 비우신 탓에 그는 집을 독점하고 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집에 혼자만 있으니 오히려 더 심심하고 지루해졌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지 않을까 싶어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무의미한 카카오톡만 300여 개가 쌓여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친구들을 소집하기로 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흐르자 장소와 시간이 맞춰졌다. 학교 앞 여섯 시. 그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학교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은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는 아쉽게도 통학시간이 너무 길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우산을 가져가야 하나 망설였지만 그는 가져가지 않았다.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오지 않고 흐리기만 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의 맞춘 적이 없는 일기예보지만 한 번 믿어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5분 거리인 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종착역 주위에 사는 유일한 장점으로 편하게 좌석에 앉았다. 평소처럼 이어폰을 귀에 쑤셔 넣고 출발하는 지하철에 몸을 맡긴 채 흔들흔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본 지 얼마쯤 지나고 문득 여기가 무슨 역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그는 고개를 들었다.
지하철 천장에 달린 모니터에는 뉴스속보가 진행 중이었다. 2차 베트남 전쟁을 위해 미국이 개발 중이던 신무기가 동남아의 섬에서 실험 중 무언가 오작동을 일으켰다는 것, 이번 올림픽에서는 베트남이 참가국가에서 제외되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날 저녁에 비가 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하단의 글자가 안국역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비가 온다는 사실에 기상청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결국 집에 쌓여 있는 아까운 우산은 남겨두고 편의점 우산을 사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편의점 우산이 4∼5000원에 달한다는 끔찍한 사실에 치를 떨던 그는 항상 무시하던 지하철 상인이 팔고 있던 물건에 흥미가 동했다. 우비였다.
그리고 우비를 사면 양말과 바지 밑단이 젖지 않도록 발목 위쪽까지 오는 비닐양말과 손에 끼는 비닐장갑을 함께 준다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가격이 2000원이었다.
결국 학교 앞 역의 개찰구를 지나는 그의 손에는 우비 세트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출구로 나간 그가 그 우비를 당장 쓸 필요는 없었다. 조금 애매하지만 일기예보가 말한 저녁이 그가 지하철 출구를 나가는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학교 앞까지 걸어가서 친구들을 만났고 바로 술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거나하게 취해서 2차를 외칠 때에도 비는 내리지 않았고 2차를 나올 때에야 비가 왔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산 우비 세트를 자랑하며 착용했고 먼저 가보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간신히 막차를 탄 그는 살짝살짝 졸았는데 조는 중간에 지하철에 탄 한 남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고 다음에 깼을 때는 응급대원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에 깨어보니 종착역이었고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그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아저씨 일어나세요, 하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나 아저씨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지만 부슬비였다. 이제 곧 비가 그칠 듯 싶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우비와 장갑, 양말을 벗고 깔려져 있던 이불 위에 그대로 누워 잠이 들었다. 그날 새벽은 상당히 시끄러웠지만 취기에 잠든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아침 늦게 일어난 그는 습관처럼 창문을 열었고 길거리에 쓰러진 한 남자가 피와 비가 섞인 웅덩이에서 일어나 뭐라고 말하는 광경을 보았다. 해가 쨍쨍한 덕분에 입이 달싹거리는 것이 잘 보였다. 남자는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일어나.”
2
평소처럼 눈을 떴다. 조금 기분이 찜찜하기는 했지만 ‘평소처럼’이란 그런 것이다. 분명히 뭔가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찜찜함 말이다. 그리고 역시 평소처럼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열 시였다. 그리고 다시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소리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기는 했지만 이건 일종의 습관이자 의식 비슷한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창문을 조금 열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다행이었다. 새벽에 잠깐 일어나서 비가 오는 것을 목격한 것이 꿈이 아니었나 싶어서 불안했는데.
사실 이렇게 안도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비가 멈추기 전에 반드시 물을 구해와야 한다. 그리고 되도록 식량도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집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쉬거나 상하거나 해먹기 힘든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음식을 위해서라도 일단은 물이다. 밥을 하려고 해도 물이 필요하고 라면을 먹으려고 해도 물이 필요하고 애초에 뭔가를 먹으면 소화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물이 필요하다. 게다가 당분, 염분 모두 섭취했을 경우 갈증을 유발한다. 참 밥 한번 먹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비상시에 물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없는 걸 뭐 어쩌겠는가? 그러니 잘 상하지 않고 요리에 물을 소비할 필요가 없는 가공식품이 필요하다. 게다가 해먹는 것도 귀찮으니 가공식품이 오히려 편하다. 어차피 살기 위해 먹는 거면 해먹기 편한 게 좋다.
나는 이불을 던져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이쯤에서 생각을 관두고 일단 움직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봤자 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음식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비는 언젠가 멈춘다. 그러니 우선 행동이 먼저인 것이다.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서 우비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디 찢어진 곳은 없는지 구멍 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다른 비닐제품들과 비닐봉투들도 마찬가지로 꼼꼼히 확인했다. 만약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있으면 나도 어제의 남자처럼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옷은 움직이기 불편하지 않을 정도까지만 최대한 껴입고 양말은 두 겹, 그 위에 내가 조금 개조한 우비를 걸치고 손에는 비닐장갑 여러 겹을 낀 후 발에는 비닐양말을 신고 비닐봉투를 여러 겹 씌운다. 비가 들어오지 않게 발목, 손목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신발은 아버지의 군화를 신는다.
머리에는 비닐을 여러 겹 겹치고 눈 쪽에는 구멍을 뚫어 물안경을 붙인 머리 가리개를 쓴다. 역시 머리 가리개도 몸과 벌어진 틈이 없도록 테이프를 칭칭 감는다. 이렇게 하면 스스로 생각해도 참 괴상한 모습이 된다.
안이 비치지 않는 노란 우비에 비닐장갑, 우비 모자 밑에는 까만 봉투가 씌워져 있고 눈 부분은 큰 수경이 있어서 눈만 깜빡거린다. 거기에 바지 모양으로 자르고 붙인 우비 덕분에 바지도 노란 바지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신발은 군화이다. 여기에 방수가 되는 어머니의 등산가방에 목제 야구방망이를 들고 물총을 등에 메면 멍청한 생존자가 완성된다.
하지만 이 복장과 장비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죽기 직전의 경험에서 말이다.
나는 창문으로 밖의 상황을 쳐다보았으나 역시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비가 올 때까지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망설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만약 밖으로 나가 있는 동안에 비가 멈추면 그건 집을 나가기 전에 비가 멈추는 것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제발 그렇게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의 장마를 믿는다. 우리나라의 장마는 고작 조금 내리다가 마는 정도가 아니다. 엄청난 수의 수재민을 만든 재해 수준의 장마인 것이다. 그러니 부디 계속 내리길.
나는 뚜벅뚜벅 군화 소리를 내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잠가놓았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건물 입구의 처마 밑에서 비를 보자니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긴장을 풀 겸 숨을 한 번 쉬고 조심스럽게 처마를 나와 길을 따라 걸었다. 드드드드 하고 우비로 떨어지는 소리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계속해서 옷이 젖는 느낌이 들어서 불안하다. 이 초조함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되서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나는 어제의 그 남자가 달려온 길을 따라 걸었는데, 지나치는 건물들의 창문 안을 보니 사람들의 형상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쉽다는 표정으로 먹잇감을 바라보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저 사람도 죽겠구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양쪽 모두 비가 오는 동안에는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얼마간 걸으니 내 앞에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잠깐 본 것이지만 완전히 빨간색이었다. 비정상인 쪽 사람일까 싶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들은 비가 오면 움직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혹시나? 사실 모를 일이었다. 내가 무슨 생물학자나 의사도 아니고 그들이 비 속에서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만약 오늘부터는 그렇지 않은 족속이 생겼다면? 나는 방망이를 든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하며 그 빨간 무언가가 숨은 차 뒤쪽으로 걸어갔다.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내가 거리를 좁히는 것일 뿐 그쪽에서는 거리를 좁혀오지 않았다. 거의 5미터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빨간 물체가 차 뒤쪽에서 서서히 일어났다. 손에 들려 있는 건 아무래도 칼이 아닌가 싶었다. 그 칼을 보니 안도감과 긴장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냥 사람인 것에 안도하면서도 그 칼이 내 배를 들어갔다 나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손에 힘이 빡 들어갔다. 말을 걸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나를 마주보고 반대쪽으로 슬슬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서부영화의 대결장면을 보는 것처럼 나와 그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이동했다. 그쪽도 나도 원하는 방향으로 완전히 이동 한 후에야 서로 눈치를 보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몸을 돌리고 나서도 나는 뒤를 계속 돌아보았다. 비가 우비에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발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나를 찌르려는 걸 눈치 못 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던지 그 사람도 자신의 갈 길을 갔다.
뒤늦게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비가 오는 날 나처럼 우비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시간이 꽤나 지났으니 마주친다면 마주칠 수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빨간 우비와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긴장할 필요도 없었지 싶다.
그냥 말이라도 걸어볼 걸 그랬다. 살 만하신가요? 뭐 힘드신 일은 없으시고요? 뭐, 흔한 개소리되시겠다. 하지만 그 사람도 나처럼 말을 걸어봤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좋겠다.
나는 거기까지 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말을 하거나 다시 만나거나 하려면 우선은 물이나 음식이나 그런 것들이 필요했다. 그 사람을 만나고 긴장했던 탓인지 목이 더 마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옷 자체가 꽁꽁 싸매고 있어서 정말 더럽게 더웠다. 습하고, 덥고, 목마르다. 여름 최악의 삼박자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해서 서둘러 이동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비가 언제 멈출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 코너를 도니 편의점 맞은편에 대형슈퍼가 보였다. 편의점은 이미 나도 그렇고 다른 생존자들이 털어서 나올 것도 없었고 심지어 척 보니 변한 사람이 비를 피해 들어가 있었다. 그나마 대형 슈퍼에 남은 물품이 많았다. 나는 슈퍼 앞에 섰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편의점에도 있으니 여기에도 그놈들이 있을 게 뻔했다. 처음 내가 이곳에 왔을 때도 있었고 일주일 전에 왔을 때도 있었다. 덕분에 변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데는 이제 꽤나 적응할 수 있었다.
나는 금이 간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날은 흐리고 유리는 깨지고 전기는 안 들어오니 슈퍼 안까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 모습을 보이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는 등에 메고 있던 물총을 한 손에 쥐고 펌프질을 해서 공기를 압축시켰다.
그런 후 그 물총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에는 방망이를 들었다. 흡사 총과 칼을 든 게임 속의 캐릭터 같았다. 물론 이 상황도 게임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지만 말이다.
나는 느리게 슈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숨을 쉴 때마다 비닐이 입에 붙었다 떼졌다 하며 비닐 오그라드는 소리를 냈다. 우비 특유의 비닐 옷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부스럭 지그적 부스럭 지그적 비닐과 우비가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게 다 들릴 정도로 슈퍼 안은 조용했다.
그때 툭 하고 종이 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왼쪽에서 들린 것으로 보아 과자 코너에서 무언가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곧잘 있는 일이다. 거의 가장자리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약한 바람에 떨어지는 현상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과연 그런 것일까 싶었다.
나는 몸을 돌려서 과자 진열장으로 물총의 총구를 돌렸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서서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진열장을 무언가로 치는 소리와 바닥에 옷이 스치는 소리였다. 머리에 뒤집어 쓴 비닐 때문에 크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확실했다.
나는 물총을 앞으로 향하고 살금살금 걸었다. 그리고 어지럽게 서 있는 과자 진열장 너머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누군가가 누워서 사지를 퍼덕이고 있었다. 가게 안은 어두웠지만 바닥에 흐르는 것이 피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니 벗겨진 웃통 사이로 1자가 3개 새겨진 배가 보였다. 칼에 찔린 모양이었다. 순간 내가 아까 마주친 사람이 생각났다. 그 사람이 찌른 것이 분명했다. 범인은 찾았다지만 피해자가 정상인인지 아니면 변한 사람인지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해야 했다. 혼잣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상대로 말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정상인이면 말하세요.”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너무 아파서 말이 없거나 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걸 확인 할 상당히 쉬운 방법이 있었다. 나는 물총으로 쓰러진 사람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그러자 그 사람은 질겁을 하고 얼굴에 묻은 물을 손으로 훔치며 몸을 파닥거렸다. 변한 사람이었다.
저렇게 극도로 겁먹은 반응을 보이는 건 변한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만난 사람이 살인마는 아니었다니 말이다. 살인마에게 말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내가 상대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사실 여러 가지로 몸이 약해서 힘이 들던 차였다.
나는 변한 사람을 무시하고 가방을 열었다. 대형냉장고에서 미지근한 1.5리터짜리 물통을 4개 꺼내고 통조림 진열대로 가서 햄, 장조림, 참치, 꽁치, 황도 등 여러 통조림을 챙겨 넣었다. 물을 끓이면 조리할 수 있는 밥과 녹아버린 냉동만두도 하나 챙겼다.
냉동만두는 생존에 적합한 음식이라기보다는 상하기 전에 그냥 내가 먹고 싶었다. 남는 자리에는 대충 과자를 쑤셔 넣고 출구로 향했다.
나오는 길에 보니 칼에 찔린 사람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힐끔 쳐다보고 슈퍼를 나서서 집으로 향했다. 어쩐지 빗발이 약해진 게 금방 그칠 것 같았다. 험한 꼴을 보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내심 빨간 우비의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또 만날 수 있겠지 싶다. 비가 오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꽤나 희망찬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집 앞에서 그다지 기분 좋지 않은 것을 봐버렸다.
예의 기우제 남자가 여기저기 피를 흘리고 삼거리의 한 집 현관 앞에 누워 있었다. 확인할 용기는 없지만 사실 확인할 필요도 없다. 그 정도의 상처라면 죽는 게 당연하다. 비정상인 사람들은 괴물같이 행동하지만 몸은 괴물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렇게 돼서 남자는 정말로 기우제의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비록 제단에서 죽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론 그렇게 보였다. 나는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하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어쩐지 남자가 불쌍하다기보다는 그 빨간 우비도 저렇게 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마가 왔으므로 이제 기우제는 필요 없으니까.
나는 다세대주택으로 들어가서 유리문을 잠그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계단은 몇 주 전과는 달리 워커화의 뚜벅 소리 말고는 조용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가방을 내려놓고 안에서 물건들을 전부 꺼내서 있을지 모르는 빗물을 수건으로 닦았다. 물론 비를 뒤집어 쓴 가방은 널어 말렸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전부 끝낸 후에야 우비를 벗을 수 있다. 아주 조심스럽게 되도록 몸의 어디에도 빗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벗어야 한다. 벗은 우비는 그대로 복도에 설치한 건조대에 걸고 머리에 씌운 비닐봉투는 우선 수건으로 물기를 최대한 닦은 후에 역시 조심스럽게 벗는다.
다른 옷들도 그것의 반복이다. 다음에는 발에 감싼 비닐봉투를 벗겨서 널고 손에 낀 겉 부분의 비닐장갑을 벗는다. 그러면 물기가 없는 속 부분의 비닐장갑과 비닐양말이 나오고 사이사이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면서 속 부분의 옷을 벗으면 된다. 척 보기에도 간단해 보이지는 않겠지만 해보면 더 짜증나고 힘든 일이다.
마지막으로 수건을 널면 일은 끝이 나고 집으로 들어가면 된다. 물론 아직 덕지덕지 입고 있는 옷들이 남기는 했지만 말이다.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고 부채로 온 몸의 땀을 말리고 나야지만 나는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다. 사실 집에 들어오고도 어느 정도는 지나야 감염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지만 마르던 목을 축이니 그런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게다가 몇 시간 동안 변하나 안 변하나 노심초사 할 만큼 힘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었다.
무지하게 피곤했다. 그래서 막 아침이 지난 12시 정도였지만 잠을 청하기로 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그건 일어나서 해결하면 될 일이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니 그게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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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기운이 아침을 삼키고 그가 일어난 시간은 결국 점심 때였다. 결코 평소처럼 일어났다고 말할 수 없는 기상이었다. 머리는 아프고 목은 탔으며 시야가 어지러웠다. 거의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물물 하고 중얼거린 그는 냉장고로 향해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 맛 덕분인지 그는 머리가 조금 맑아지나 싶었다.
거실의 소파에 앉아 머리를 긁적이며 그는 상황을 파악했다. 어머니는 안 계시고 밖은 어쩐지 시끄러웠다. 어머니는 슈퍼에 가셨거나 잠깐 어디 나가셨겠지 싶어서 그는 두 번째 의문을 풀러 베란다로 향했다.
길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말은 적어도 소리가 주차 실랑이나 그 비슷한 소란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밖이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소리에 더 집중하니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시끄러운 것은 아래층이었다. 그런데 듣고 있자니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피아노의 고음 같은 가는 소리였지만 그는 아래층이 피아노를 치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혹시 TV소리인가 생각했지만 무슨 동물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에야 그런 소리가 들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쩐지 자신이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 같았다.
그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를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팔뼈가 돌아갔을 때 들은 소리였다. 정확히는 그 뼈를 맞추러 병원에 갔을 때 자신의 입에서 난 소리였다. 팔을 맞추기 위해 의사선생님이 팔뚝을 잡고 비틀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남자의 굵은 비명소리도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소리도 아니었다.
아파 죽을 것 같아 거의 끊어지는 듯한 그런 비명소리였다. 그런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는 순간 뭔가 범죄라도 일어난 것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다시 설마 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 가설을 완전히 뒤엎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설마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쨌든 이렇게 시끄러운 건 자제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떡진 머리를 가릴 모자를 쓰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는 벨을 누르기 전에 내심 혹시 범죄라면 이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고 112를 누를 준비를 했다.
띵동 소리가 들리고 그가 말했다.
“저기, 너무 시끄러운데 조금 조용히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그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그 비명 비슷한 목소리가 끊어지고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제 문을 열고 누군가 나와서는 조용히 하겠다고 죄송하다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발소리는 점점 빨라지더니 문이 덜컹 하고 쿵 소리가 들렸다.
그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쳤고 그 비명소리 비슷한 것이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소리였다. 으아아아 와 끼아아아 의 중간에서 끼아아아 쪽으로 치우친 정도의 소리였다.
그는 112에 전화를 하며 집으로 돌아가 문을 잠갔다. 신호가 가는 동안 그는 도대체 경찰에게 뭐라고 말하고 신고를 해야 하는 건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고민은 너무나 많은 통화량 때문에 전화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끝났다. 그는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역시 같은 말 뿐이었다.
그 후에 몇 번을 더 시도해 보았지만 간신히 신호가 가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전화를 하다가 그는 포기하고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받지를 않았다. 그는 다시 몇 번인가 더 시도해 봤지만 삐 소리 이후 돈이 더 들어간다는 말만 계속 들려올 뿐이었다.
아무리 감이 없어도 이 정도 되면 누구라도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도 그러했다. 그는 평소처럼 핸드폰에 쌓여 있는 메시지를 읽어나갔다. 모든 메시지를 읽을 필요도 없었다. 메시지의 대부분이 지금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물어뜯고 공격한다는 말뿐이었다.
아직도 오고 있는 메시지가 있는가 하면 새벽이나 아침에 날아오다가 끝난 메시지도 있었다. 그는 대화에 참가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내려 했으나 하는 말은 그저 사람들이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말의 반복이었다.
급한 마음에 TV를 켰으나 드라마, 예능프로, 어린이 채널 등 이미 녹화되어 틀어지는 것들뿐이었다. 어느 방송국에서도 뉴스특보나 긴급속보 같은 것들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는 결국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창 명연기를 펼치고 있는 배우를 무시하고 리모컨의 버튼을 눌러서 TV를 껐다. 하지만 TV는 꺼지지 않았고 그는 이상하다 싶어 계속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TV속의 배우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비가 멈췄다.”
3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거의 네 시였고 비는 멈춰서 해가 나려 하고 있었다. 내가 원래 낮에 잠을 자는 편은 아닌지라 잠에서 깬 후에 어쩐지 정신이 조금 멍 했다. 심지어 순간적으로 왜 이렇게 잠을 오래 잤나 생각하다가 겨우 낮잠을 잤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였다.
덕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도 오래 걸렸다. 그것도 몸이 스스로 알려주기 전에는 거의 무감각해져 있었다. 오늘 마지막으로 할 일은 사흘 만에 드디어 제대로 된 밥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기꺼이 해 줄 생각이다.
쌀을 계량컵으로 한 컵 퍼서 아버지가 가져온 속이 깊고 움푹한 군용 쇠그릇에 물과 함께 넣었다. 쌀을 씻는다는 건 사치이므로 그대로 뚜껑을 닫고 화장실로 가져갔다. 그리고 방에서 책 같은 것들을 가져와 라이터로 불을 붙인 후 그 위에 쇠그릇을 놓고 화장실을 나갔다.
책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태울 책도 별로 남지 않아서 얼마나 더 버틸까 싶었다. 가끔 날이 흐리면 우비나 비닐봉투에 남은 물기를 말리기 위해 불을 피우고 했더니 꽤나 많이 태워버린 것이다. 이젠 가구를 태우는 것도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책을 화장실 바닥에 내려놓고 나머지 상을 차렸다. 상이라고 해봐야 참치 캔 하나에 고추장 통 하나가 끝이었지만 그것도 물이 있으니까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 이 마을에 변하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 중 대부분이 나와 같은 사치를 부리지는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이 마을에서 가장 부자나 다름이 없다. 물론 못 먹고 못 마시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들을 돕다가 나도 못 먹고 못 마시는 상황에 처하기는 싫다.
그 남자가 기우제를 벌인 날에도 그랬다. 1층으로 내려가 문을 열고 그를 불러들였다면 남자를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를 돕다가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혹시나 실패해서 그 남자가 아니라 다른 변한 사람들까지 끌어들인다면?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내가 매정한 게 아니라 친절을 베풀기엔 세상이 너무 매정해졌다. 여유가 있어야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고, 아무리 좋게 말해도 화장실에서 밥해 먹는 상황이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니까 말이다.
밥은 애초에 적은 양이어서 금방 익었다. 사실 그동안 전기 밥솥으로만 밥을 해본 터라 처음에는 냄비로 밥하는 법을 몰라서 죽이 되거나 타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하다 보니 대충 감을 잡아서 요즘에는 덜 죽이 되고 덜 탄다.
죽이 되면 소금을 쳐서 그냥 죽으로 먹고, 타면 물을 타서 먹으면 된다. 가릴 여유는 없다. 이번에는 조금 죽에 가까운 형태로 밥이 익었다. 다행히 소금을 쳐서 먹을 필요는 없을 정도였다.
고추장을 밥에 푸고 기름을 뺀 참치를 반 캔 정도 넣으면 그럭저럭 먹을 만한 비빔밥이 된다. 참기름이 있으면 좋겠지만 참기름은 다 떨어졌고 이번에 가져오는 걸 깜빡했다.
밥은 매우 맛있었다. 덕분에 쌀을 한 컵 더 지어서 먹고 말았다. 사실 사흘 동안 굶었는데 한 컵은 너무 적기도 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물을 한 컵 먹었다. 소금기가 많은 식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물 한 컵이면 충분했다.
모든 식사를 마친 나는 소파에 앉았다. 배가 부르니 이제는 힘이 나고 뭔가 다른 것이 하고 싶어졌다. 원래 사람이 의식주가 급하면 심심할 겨를도 없겠지만 나는 이제 급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뭐를 하려고 해도 전기가 나간 이 시점에서 할 건 별로 없다.
해가 지기 전까지 책을 읽거나 멍하니 있는 게 전부인데 정말 시간이 오지게도 안 간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있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적어도 누군가와 얘기하고 떠든다면 이렇게 지루하지는 않겠지. 오늘은 그냥 책이나 읽어야겠다. 아직 태우지 않은 책이 조금 남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책을 읽으러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변한 사람들의 목소리와는 다른 평범한 여자의 비명소리였다.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짐작하며 창문을 열었다. 아마도 저번의 남자가 왔던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소리만 들리다가 곧 모습도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머리가 짧은 여자였다. 물리는 걸 막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파란 긴팔 옷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의 대응은 평소와 같았다. 그저 창문을 조금 열고 쳐다보는 게 다였다. 그렇게 보고 있자니 여자는 점점 내가 있는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등에는 학생들이 뒤로 메는 파란 가방을 한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었는데 아마도 집에서 도망쳤거나 남자처럼 슈퍼에 들렀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집 앞을 지나갈 때는 소리를 못 들었으니 도망치는 거겠지. 왜 도망쳐 나왔을까? 물 때문인가?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스스로 조금 놀랐다.
평소에는 그냥 무시하는 수준이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쫓기는 사람에게 관심을 더 보이고 있었다. 스스로 왜 이러나 싶어 진정하려고 했지만 여자의 모습이 창문에 가려지자 거의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더 열고 말았다. 아차 싶었지만 설마 이걸 보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는 내가 있는 쪽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단순히 열린 창문을 보는 것뿐이야, 아니면 그냥 어디 들어갈 곳이 없나 찾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내 예상은 터무니없이 틀려버렸다.
“도와주세요!”
여자가 소리쳤다. 오래 달린 탓에 숨쉬기도 힘들 텐데 소리가 꽤 컸다. 저러면 주위의 모든 변한 사람들을 다 모으는 꼴이건만. 어쨌든 부정하고 싶기는 하지만 저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리고 두 번째 외침이 들리고 나와 그 여자는 눈이 마주쳤다. 이제 그녀가 나에게 도움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도와줄 상황이 아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 말을 외면하자니 나는 뭔가 굉장히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았다.
‘하지만’과 ‘그렇다고’는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여자가 집에 거의 가까워졌을 때 ‘하지만’과 ‘그렇다고’는 결국 극적인 타협을 이루었다. 타협의 내용은 결국 창문을 닫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조금 위험을 감수해 보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저 여자가 빨간 우비를 입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물론 이건 그저 핑계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자면 사람을 보고 싶었다. 얘기도 나누고 얼굴도 마주 볼, 나를 물어뜯으려고 하지 않는 정상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옷은 길고 두꺼운 것을 입고 마스크를 찼다. 손에는 밖에 널어두었던 비닐장갑을 끼고 위에 다른 천 장갑을 꼈다. 역시 널어둔 비닐 양말을 신고 그 위에 일반양말과 신발을 신었다. 손에는 야구방망이를 들고 어깨에는 물총을 멨다. 필요한 장비는 그게 끝이었다.
물총을 펌프질하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니 유리 문 너머로 거의 코앞까지 다가온 여자가 보였다. 나는 서둘러 유리문의 잠금을 풀고 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빨리요!”
나는 여자가 문을 통과하고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으면 변한 사람들을 피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여자와 사람들의 사이가 가까웠다.
문을 닫는 건 어렵지 않아도 아마 문을 잠그지는 못하고 밀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문틈에 발을 넣고 사람들의 얼굴을 노려 물총을 쐈다. 펌프질을 한 압축공기가 다 떨어져서 물이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놈들의 대부분은 이미 발작을 일으키고 얼굴을 긁어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피가 나고 결국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는 이제 됐다고 생각하고 문을 잠그려 고개를 들어 잠금장치에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문이 밀리고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생각지도 못했던 충격에 뒤로 벌렁 넘어졌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변한 사람이 열린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왜 저 놈은 멀쩡한가 싶어서 얼굴을 보니 물이 묻어 있지 않았다. 나는 숨을 죽였고 놈은 나를 보더니 바로 달려들었다.
“네놈은 배고파 죽겠지만, 나는 밥을 먹었다고.”
그 놈이 나를 물려는 순간 나는 방망이의 굵은 부분으로 놈의 배를 밀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방망이에 힘을 주어 밀어내고 뒤쪽으로 천천히 일어났다. 오래 달린 후라서인지 아니면 밥을 못 먹어 그러는지 놈은 어렵지 않게 밀려났다.
“펌프질 좀 해요! 많이도 필요 없으니 물만 나가면 돼요. 손에 물 안 묻도록 하고요!”
나는 뒤쪽에 있을 여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어깨에 메어진 끈을 풀고 공기를 압축시켰다. 소리로 들어서는 한 세 번에서 네 번 정도 펌프질을 하더니 뒤로 내민 손에 들려주었다. 나는 총구를 변한 사람의 얼굴 바로 앞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놈은 다른 변한 사람들처럼 쓰러져 난리를 피웠다. 나는 그 사이에 온 힘을 다해 그놈을 밖으로 내보내고 서둘러 문을 잠갔다. 여자가 소리를 지른 탓에 바닥에 쓰러진 놈들 말고도 더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 전에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안전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서야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봤는데 나와 비슷한 정도로 젊었다. 물어볼 말이 많았지만 일단 신상파악은 나중으로 미루고 계단에 주저앉은 여자를 거의 끌다시피 집으로 데려갔다. 우선은 그녀를 먼저 집안으로 들여보낸 후 나는 물총을 비롯한 장갑과 양말을 밖에 널고 집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사람과의 대화가 너무 오랜만이라서 어쩐지 어색하기도 했고 결국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여자가 울음을 그치고 말했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녀의 말에는 울음기가 남아 발음이 흐려져 있었다. 나는 다시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닙니다, 별것도 아닌 걸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등등 여러 가지가 생각났지만 무슨 대단한 영웅이 할 만한 대사였다. 나는 결국 완전히 다른 말을 해버렸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여자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결국 반 정도 읽다 만 책까지 마저 태우고 말았다. 정말로 내일부터는 가구를 태울 생각이다.
작은방에 있는 나무책상을 머릿속에 점찍어 두고 밥을 지었다. 반찬은 내가 먹은 것과 동일했다. 나는 여자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녀가 잘 먹었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자 먹은 그릇을 휴지로 닦아냈다. 그녀는 아까처럼 다시 소파에 앉았고 나는 맞은편 바닥에 주저 앉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피곤한 하루다.
“구해주신 것도 모자라 밥까지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여자가 그렇게 말하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내가 이번에는 제대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이상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다. 아닙니다, 말고 다른 질문이라도 해 볼 걸 하고 후회하고 있는데 여자가 먼저 얘기를 시작했다.
“저는 김선화라고 해요. 원래는 슈퍼 근처의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죠.”
그리고 나도 지금은 서로를 소개할 타이밍이구나 싶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질문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는 이정필이라고 합니다. 좀 늙어 보이지만 수염 때문이에요. 일단 대학생입니다. 그나저나 왜 집을 나와서 여기까지 오셨죠? 차라리 집 안이 안전했을 텐데요.”
“집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거든요.”
“변한 사람들이 들어갔나요?”
선화 씨, 이렇게 부르면 좀 이상할까? 어쨌든 선화 씨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나를 쳐다보았다.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왜요?”
내가 질문하자 선화 씨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변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처음 봐서요. 보통 다른 사람들은 괴물이나, 욕을 섞어서 부르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이라면, 혹시 저 말고 사람들을 더 만났나요?”
그러자 이번에는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인터넷에서 글을 쓴 사람들 말이에요. 처음 일이 벌어지고 인터넷에 올려진 글들을 읽었죠.”
인터넷이라, 전기가 나가고 상당시간 해 본 기억이 없다. 일이 나기 전에는 많이 했지만. 혹시나 아직까지도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개인 발전기를 두고 있다거나 태양전지 판이 달린 집이거나 하면 컴퓨터를 켤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저기, 그런데 질문이 뭐였죠?”
“아, 변한 사람들이 집으로 침입했냐는 거였습니다.”
선화 씨는 어떻게 대답할지 조금 고민하는 것 같았다. 고민할 거리가 있나 싶었지만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지도 모르니까 조금 기다렸다.
“변한 사람이 들어온 건 아니었어요. 나갈 때는 정상이었는데 당하고 들어와서 그대로 변한 거죠.”
“그게 누군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선화 씨는 다시 조용해졌다. 역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나 보다. 대답하기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는 순간 선화 씨가 말을 이었다. 말에 코맹맹이 소리가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