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려는 듯한 10월의 선선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 스쳐 지나갔다. 꽤 오래도록 정리하지 않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맞춰 사뿐히 흩날렸다. H대학교 곳곳이 심어진 단풍나무에선 물기를 남기지 않고 말라버린 잎사귀들이 바람 소리에 대답하듯 춤을 추며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들을 밟으며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걸었다. 학창시절 때와 비교하여 좀 더 닳아버린 건물들은 회갈색으로 변해버렸지만, 여전히 처음의 느낌 그대로 당당한 위용을 뿜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곳에 있을 거라고 말하는 듯이.
누렇게 말라버린 잔디밭을 지나 이윽고 뒤편의 외벽에 도달하자 발을 멈추고 내 위로 솟은 담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깔을 뿜어내는 크고 작은 담쟁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오래된 두 담벼락 사이에 좁은 공간이 있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저 사이로 드나들어 입구로서의 역할을 했을 테지만, 그 의미를 잃어버린 지는 오래됐는지 여기저기 거미가 집을 짓고 바람에 날아 들어올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거미집에 머리가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허리를 숙이고 좁은 공간을 빠져나왔다.
광활히 펼쳐진 갈대밭이 눈앞에 있었다. 갈대는 가을의 떠올렸을 때 코스모스나 단풍과 더불어 대표적으로 손에 꼽히는 대상이지만, 정작 누군가 갈대의 용도와 그 필요성에 대한 물음에 선뜻 나서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가치가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자연은 그 존재 자체로도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다 자란 벼가 공기의 흐름에 따라 물살처럼 흐르는 것 같다. 하지만 벼가 고즈넉한 정서를 일으키는 반면, 갈대밭은 항상 어렴풋이 어둡거나 고요한 분위기와 어울린다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여기저기서 서로의 씨앗이 부딪히는 소리가 포개져 마치 우우우, 하며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환한 대낮임에도 거친 황금빛의 들녘은 그 분위기를 묘하게 어둡고 음산하게 만들었다.
황금빛이라 주변의 것이 어두워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주변을 밝혀주기엔 황금빛이 부족한 것일까. 손끝으로 촘촘한 씨앗들을 쓰다듬으며 다소 경사진 길을 따라갔다. 저 멀리 길의 끝에 보이는 작은 점은 점점 다가감으로써 건물로서의 형상을 갖췄다.
어림짐작하기에 십여 평 남짓 되어 보이는, 낡아빠진 공중화장실이라고 생각되는 직육면체의 하얀 색 콘크리트 건물. 군데군데 색이 벗겨져서 드러난 잿빛의 단면이 이 건축물이 그간 겪은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구소B. 나는 잠시 멈춰 피식 웃고는 그에 대한 감상을 내뱉었다.
“정말 갈대밭과 잘 어울리네.”
한 때 H대학교 소유였던 연구소B는 이미 공식적으로는 폐쇄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이 주변이 관리가 되지 않고 온갖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버렸다. 저곳에서 나는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그자는 저 건물의 문 너머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건 대충 15년 정도 되었으리라. 그는 마치 긴 겨울잠을 자듯 그 시간 동안 저곳에 자신을 가두어 놓았다. 정상이라면 이런 허허벌판에서 15년 동안이나 생활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그는 역시 내가 생각했던 대로 정상은 아니었나 보다. 세월이 많이 흐른 만큼 얼굴도 많이 변해버렸겠지.
나는 연구소B를 향해 선뜻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그다지 내키는 방문은 아니다. 문득 지금 저곳을 향해 가는 이유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부스럭거리며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편지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의 고깃고깃 구겨진 편지지 한 장을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편지의 내용과 어제의 일이 오버랩 되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편지라곤 카드 청구서밖에 안 오던 나에게 수신인 불명의 편지가 도착했다. 연구소 우편함에서 K가 꺼내다 가져다주었다.
“김 선생님, 편지 왔어요. 수신인이 안 적혀 있네. 어디에 협박당하고 있어요? 요즘 수신인이 확실하지 않은 편지는 우체국에서 안 보내준다는데.”
2년 전 초임으로 들어온 연구원 K 양이 보조개를 입 주변에 띄우며 웃었다.
“내 능력이 어디 좀 뛰어나야지. 여기저기서 위험한 실험을 막으려고 얼마나 협박을 해대는데. 실력 있는 과학자는 괴롭다니까.”
나는 농담조로 말하며 그녀가 들고 있던 편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건네받으려는 순간 배고픈 모기 한 마리가 윙 소리를 내며 얼굴을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피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K는 책상에 편지를 내려놓고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조심하세요. 10월 모기는 지금 당장 피를 못 구하면 죽어버리니까 정말 필사적이거든요. 요즘 모기들은 다 뇌염모기래요. 피만 빨고 가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던 병균을 모조리 토해내서 옮긴다나. 보건당국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대요. 그곳에서 일하는 친구가 알려 준 건데, 아직 일반인들에겐 비밀이래요. 되도록 안 물리는 게 최선이에요.”
말을 마친 그녀는 갑자기 짝 소리와 함께 손뼉을 쳤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 위에 찌그러진 모기 한 마리를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손을 씻어야겠다며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책상 위의 편지 봉투를 다시 관심을 돌렸다.
특정 수취인 없이 마구잡이로 넣어지는 광고 우편물이라고 여겼던 나에겐 생각보다 의심스러운 편지였다. 하얀색의 규격봉투 위에 우표는 제자리에 붙어 있었다. 다만, 몇 년 전 단종 된 150원짜리 우표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런 건 요즘 우표 마니아들 아니면 구하려 해도 쉽게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우표에 우체국 날인이 찍혀 있지 않았다. 내가 옳게 알고 있는 거라면, 이 위에 접수된 날짜가 적힌 보라색 도장을 찍는 게 우체국의 관행 아닌가? 봉투를 뒤집어 보았지만 도장 자국은 발견되지 않았다. 수신인에 대한 단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우체국에서 수신인이 명확하지 않으면 편지를 승인시키지 않는다는 K의 말은 맞는 말이다. 요즘 들어 부쩍 우편물을 통한 테러나 범죄가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죽은 벌레를 넣어서 보내거나 독을 바른 바늘을 넣어 편지지를 꺼낼 시 그것에 찔리도록 하는 등 그 종류와 기법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또한, 협박과 스토킹 등 편지 내용도 정상이 아닌 것들이 너무 많아 우편물의 보안 검사가 강화됐다는 신문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직접 연구실로 와서 우편함에 넣은 것인가?
편지봉투 귀퉁이를 조심스레 찢어냈다. 본연의 색은 흰색이었을 테지만 공기에 오래 접촉한 듯 심히 누리끼리한 A5 용지 크기의 편지지가 그다지 단정치 못하게 두 번 접힌 채로 나를 반겼다. 우표와 마찬가지로 편지지도 세월을 거슬러 온 듯했다. 누가 이런 장난을 치는 거지? 유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내용물을 펴자마자, 급하게 휘갈긴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잉크로 쓰여 있는 특유의 동글동글한 글씨가 오래된 기억 속에서 생각날 듯 말 듯했다. 자세를 고쳐 앉고 편지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김 군에게.
자네도 오랜만이고, 내가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도 오랜만일세.
어언 15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지만, 자네가 나를 기억 못 할 거라는 불안감은 없네. 나와 함께했던 자네는 영리한 학생이지 않았나. 이 편지 어디에도 내 이름을 적지 않을 생각이지만, 자네는 당연히 나와 내 문체에 대한 기억을 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도 되겠나? 미안하군. 자네 대답과는 상관없이 본론으로 들어갈 거라네.
H대학교를 떠나고 나는 연구소B에서 지내면서 나에게 인생의 절망과 좌절이란 큰 경험을 겪게 한 그 병의 치료법 연구에 몰두했네. 그러다 문득 돌아보니, 어느새 나는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분야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지.
연구의 길을 다시 돌릴 생각은 없었다네. 이유를 말하자면 그 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기록이 너무도 조금이라 발병원인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던 뿐더러, 몇 년간의 성과 없는 시간으로 말미암아 이미 내가 너무 지쳐버렸다는 거야.
반드시 치료법을 찾아내서 그 병을 이겨버리겠다고 결심했는데, 좀처럼 연구가 진행될 기미가 없더군.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건 길이 바뀐 연구 분야에 대한 흥미를 좀처럼 떨어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네.
자네가 혹시라도 나의 이런 나약한 모습에 실망할까 노심에 급히 변명하는 건데, 그건 완전히 다른 길은 아니라네. 내가 연구하는 건 그 병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분명 그녀를 살릴 방법인 건 확실하네.
그렇게 바뀌어 버린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 순간 연구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네. 바로 며칠 전 얘기지. 하지만 한 가지가 딱 부족했는데, 이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세.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자네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 잠깐만 나를 도와줄 것을 청하는 바이네.
자네는 15년 만에 나타나서 무슨 헛소리냐고 인상을 찌푸릴 것 같군. 인상 피게나.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로 긴 은둔생활로 나는 더는 이렇다 싶을 지인이 없다는 것이네. 김 군이 내 마지막 사회생활집단이었던 H대학교에서 가장 가까웠던 동료이자 마지막 지인인 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는가.
둘째로, 나는 세상에 이 연구에 대해 퍼트릴 생각이 전혀 없네. 이유를 말하자면 무한정으로 이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사정이 아닌 데다 학계에서 그다지 환영받는 주제는 아닐 것 같아서야. 그렇다고 없던 일로 돌리고 싶진 않고, 내 오랜 연구의 성과를 특별히 자네에게만 보여주고 끝내야 홀가분할 것 같네.
셋째로, 이건 정말 자네가 걱정할 염려에서 말하는 건데, 자네의 신상이나 안전에 털끝 하나 위험이 가해지지 않을 거라 맹세하네. 나는 자네가 다만 산증인으로서 이 연구를 관찰해주었으면 좋겠네. 절대로 내 오랜 친구에게 피해가 가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네.
편지로 자세한 얘기를 못 하는 건 유감이네. 편지가 잘못 전달돼서 남들이 알아버리면 곤란한데다가, 미리 말해버리면 호기심의 강도가 떨어져 버리잖나. 나는 과학자의 호기심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지.
그럼 10월 둘째 주 토요일, 연구소B에서 낮 1시경 자네를 볼 수 있기를 간곡하게 청하겠네. 물론 이것은 올 것을 협박하는 것도, 강요하는 것도 아닐세. 이미 연구는 완성되어 있고, 내가 이 연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개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자네야. 만약 자네가 안 온다면, 이 십 몇 년의 결과물은 그저 세상의 빛을 겪지 못한 채로 사라질 뿐이지.
다짜고짜 연락해서 하는 용건이 고작 부탁이라서 미안한 생각이 드는구먼. 올 마음이 든다면, 공복 상태로 오게. 내가 자네를 위해 점심을 준비하겠네. 대학생 시절, 자네는 내가 만든 도시락을 종종 함께 먹었었지.
20XX년 10월 X일.
편지를 읽는 내내 미간에 주름이 선명하게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첫 부분에 써놨듯이, 수신인은 편지의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써놓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머릿속에 그에 대해 너무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천재라고 불렸던, 새하얀 피부가 특징이었던 H 대학교의 수석 박 군. 그일 수밖에 없다. 헌데 15년 전에 사라졌던 그가, 왜 이제야 나를 부르는 것인가? 의심을 안 해볼 수 없는 편지였다.
다시 한 번 천천히 편지를 곱씹듯 읽어보았다. 맨 밑줄의 날짜는 불과 엊그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월의 둘째 주 금요일이면 바로 내일이다.
“급하기도 하군.”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요약해 본다면, 그는 어떤 병의 치료법을 위한 연구를 그만두고 다른 주제의 연구를 거의 완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일한 친구인 나에게 내일 당장 보여주고 싶다는 뜻을 편지로 전달한 것이다.
희한한 건 그는 편지를 쓴 뒤 우체통에 넣지 않고, 몸소 내 연구소로 가지고 왔다. 어제 점심쯤 우편함 확인을 했으니, 아마 어제저녁이나 오늘 아침에 넣었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내가 있는 연구소 주소를 안 걸까? 오래된 편지지나 우표를 사용한 것은 의도적일까? 직접 가져다 놓은 이유는 뭐지? 그는 대체 무엇을 나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인가? 떠오르는 질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대충 휘갈긴 편지를 그다지 환영할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내 호기심은 자극되고 있었다. 호기심 같은 심리적인 요인까지 의도해서 쓴 글일까? 곧바로 ‘아니다.’라는 대답이 뇌에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는 박 군은 천재이긴 했지만, 사람의 심리적인 면을 파악하는 덴 영 재주가 없었다.
편지에는 ‘올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서 안 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무릇 궁금해져 버린 것은 다 해소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과학자의 습성이다.
이것은 아기가 처음 보는 물건을 일단 입에 넣고 보는 것과 비슷한 반응이다. 어쩌면 그가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다소 느껴졌지만, 나에게만 공개하고 싶다는 연구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다.
설사 그것이 15년 동안 은둔생활을 한 정신병자의 미쳐버린 행동이든 아니든 간에, 머릿속에 찬 많은 의문을 놔두고 방관해 버리면 나는 아마 평생을 궁금해 하면서 살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 끝에 아무래도 초대에 응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그 이면엔, 대학교 시절 늘 많은 것을 누려왔던 박 군이 15년 동안 망가져 버린 것은 아닐까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떠올랐지만, 이내 부정하듯 지워버렸다.
“김 선생님, 커피 드세요.”
K가 인스턴트 커피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너풀거리는 연구 가운 안으로 살굿빛 블라우스가 살짝 보였다. 예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라고 넌지시 말한 뒤로 그녀는 살구색의 옷을 입고 오는 일이 잦아졌다.
“아아, 고마워.”
나는 K에게 웃어 보인 후 뜨거울세라 조심이 입술을 머그잔에 갖다 댔다.
내가 속해 있는 유전공학 연구소에는 나를 제외하고 세 명의 연구원들이 더 있다. 실험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은 초임연구원들은 K까지 세 명, 총 7명이 연구소의 직원이다. K는 3년 전에 내가 내 모교인 H 대학교로 잠깐 강의를 나갔을 때 만난 대학원생이다.
당시 졸업반이었던 그녀는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며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남들이 보기엔 그저 조금 예쁘장한 미모를 가졌을 뿐이지만, 강사 대 제자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 그녀와의 첫 만남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강의 후에, 나는 K를 따로 불러내어 내가 있는 연구소로 오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며 명함을 건넸고,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몇 개월 뒤 그렇게 K는 초임연구원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가끔 자신이 인상 깊었던 이유가 뭐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그때마다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딱히 정확한 이유를 집어낼 수 없었고, 그녀에게서 뭔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풍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면 K가 상처받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가끔 일이 끝난 후 회식 자리에서 동료 연구원들은 “김 선생님과 K 양 사귀는 것 아니에요? 서로 좋아하잖아요.”라며 놀리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사귀지 않는다며 그들의 말을 끊었다. K는 그때마다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 이건 확실했다. K가 연구소에 온 지 며칠 안 돼서 나는 그녀에게 단발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강요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내 여자 취향을 묻기에 답해 준 것뿐이다.
그녀는 다음날 길었던 생머리를 목 부근까지 자른 채로 출근했다. 그 뒤로 내가 어떠한 옷이나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생각 없이 툭 던질 때마다 그녀는 내 말 그대로 자신을 치장했다.
그 밖에도 K는 나에게 간간이 커피를 타주거나 우편물을 가져다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물론 이건 다른 연구원들에게는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 밖에도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따위의 알지도 못하는 기념일에 직접 만든 수제 초콜릿이나 사탕 바구니 같은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나에게 안겨 주었다. 이쯤 되면 그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더러 K를 좋아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확실히 답할 순 없었다. 띠동갑 가까운 나이 차이가 부담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뭐랄까 아직 그녀는 나에게 좀 부족했다. 내가 먼저 K에게 연구소로 오라고 작업을 걸어놓고 무슨 심보냐 라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지만, 아직 그녀는 어려서인지 무언가 모르게 조금 부족한 면이 있었다.
K는 짬짬이 커피를 마시며 내 앞에 앉아 잠깐 얘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어김없이 그녀는 커피를 마시는 내 앞 의자에 앉아 갈색 계열의 아이섀도를 바른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속눈썹은 긴 편이었다.
“편지, 무슨 내용이었어요? 혹시 진짜 테러 같은 거였어요?”
“그래. K 양의 말이 맞았어. 곧 죽이러 오겠다는데.”
K는 제법 진지한 내 말에 장난인지 사실인지에 대한 여부를 파악하지 못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장난이야. 친구가 보낸 거야. 놀러 오라고.”
나는 그녀 입에서 걱정하는 말투가 나오기 전에 손을 저으며 먼저 선수 쳤다.
“꽤 오랜 친구거든. 대학 시절 친구.”
“대학친구요? 우와, 되게 오래됐네. 십몇 년 됐나? 어떤 친군데요?”
K는 자신이 얘기하기보다는 내가 하는 얘기를 듣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 친구 얘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얘기해 주세요. 선생님의 대학 시절 얘기 궁금해요.”
내가 가만히 있자 그녀가 분홍색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을 옹알거리며 말했다. 저 립스틱의 색깔도 아마 내가 좋다고 한 색깔이었을 것이다. 전의 그녀는 빨간 립스틱을 즐겨 발랐다. 내 말 한마디에 자신을 저렇게 바꾸는 그녀가 새삼 고마웠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좀 더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영재 소리를 들었던 나는, 다른 과목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가졌었지만, 특히 과학에는 매우 특출한 면을 보였다. 중학교 때, 나는 실험과학부의 부장으로서 전국 각종 대회에서 상을 거머쥐는데 크고 작은 이바지를 했다. 과학에 대해 소질만 있던 것이 아니라 흥미도 충만했던 나는 주말에는 도서관에 가서 생물, 우주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를 보냈다.
부모님은 이런 나의 재능을 일찌감치 깨닫고 나를 특성과학고에 진학시켰다. 그곳에서도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각종 경시대회와 아이디어 경연을 휩쓸며 언제나 수석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다. 과학을 사랑하여 과학자가 되리란 소년의 의지엔 한 치 흐트러짐도 없었고, 열심히 재능과 노력을 결합한 결과 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공과대학인 H대학교 생명과학과의 입학허가를 받았다.
당시 같이 지원했던 고등학교 동창들은 모두 떨어져 버리고 수석이었던 나만 붙을 정도로 입학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H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하자 선생님들과 부모님, 심지어 주변 친척들까지 모두 내가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H대학교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과학영재들이 모이는 곳이었지만 나는 입학 전 그곳에서도 수석자리를 지켜 보이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하지만 꿈이 깨지는 데엔 그다지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남들보다 그저 조금 더 우수한 보통 사람임을 깨닫게 된 시기는 좀 더 훗날이 아닌 바로 입학식 때였다.
H대학교는 성적을 1등부터 100등까지 나열하여 교문에 붙여놓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입학식 당일 정문에 크게 붙여 놓은 입학 성적 우수자의 명단 앞에는 여러 명의 학생이 몰려 있었다. 나는 당연히 상위권일 것이라 예상하여 위에서부터 훑어 나갔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명단엔 내 이름이 없었다. 늘 1등만 해왔던 나에게 순위권 밖이라는 현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한 채 그 명단을 바라보다가 기가 한풀 꺾인 채로 입학식이 거행되는 강당으로 들어갔다. 내 의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애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에게 불쑥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 나는 박XX야. 생명과학과에 들어왔어. 너는 이름이 뭐니?”
나와 같은 학과였다. 나는 엉겁결에 내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한눈에 호감이 가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훤칠한 키, 오랫동안 운동한 듯 떡 벌어져 있는 어깨. 마치 여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농구부원 느낌이 났다. 단점을 굳이 꼽자면 붉은 기가 전혀 없이 창백하게 하얀 피부 정도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나는 머리를 굴리다 곧 그가 명단의 첫 부분을 장식했던 사람임을 깨달았다. 확인 차 묻는 말에 그는 겸손하게 “나도 내 성적을 잘 모르겠어.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명예의 1등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그가 맞았다. 신입생 대표로서 전체 수석의 입학 소감을 듣는 시간에 그가 불려 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강당에 울려퍼지는 시원시원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멋쩍은 듯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내가 맞았네.”라며 머리를 긁었다. 그게 나와 박 군하고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로 그와 나는 늘 같이 다녔다. 나는 그를 박 군이라고 불렀고, 박 군은 나를 김 군이라고 불렀다. 박 군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이었다. 내가 중학교 때 전국 대회의 상을 노릴 동안 그는 세계적인 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탔다고 했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노력하지도 않지만 일단 한 번 들으면 기억이 다 나서 늘 점수가 좋았고, 주위 사람들도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자랑의 기색을 찾을 수 없는 무덤덤한 어조였다. 부럽다는 나의 반응에 박 군은 부모님은 고등학교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데다 형제도 없어서 그다지 자신을 자랑스러워 할 사람도 없다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박 군은 공부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너스레를 잘 떨고 사교성이 좋아서 그의 옆엔 늘 사람들이 모였다. 학과 사람들, 조교, 교수 모두가 그에게 호감을 표했다. 조용한 성격이었던 나는 박 군에게 말을 거는 수많은 사람 뒤에서 조용히 서 있으며 그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일이 잦았다.
내가 보기엔 성적, 인기를 포함해서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은 없었다. 나는 가끔 그와 나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는 했지만, 박 군은 대학교에 입학한 후 의기소침해져 있던 나를 유난히 챙겼고,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했던 나는 곧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 말을 섞는 일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그가 기억력이 좋다고 한 말은 허구가 아니었다. 박 군은 스쳐보거나 언뜻 듣는 행동만으로 거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아두는 능력이 있었다. 심지어 수업 시간에 교수가 한 농담까지도 몇 달이 지난 시점에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당연히 그는 H 대학교에서 수석을 도맡았고, 위상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박 군은 늘 모두에게 친절하고 상냥했다. 정말 인간적으로 좋은 친구였다. 표면적으로는.
그는 머리가 좋았지만,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일엔 영 소질이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나와 같이 다녔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난 왠지 모르게 그가 두려웠다. 이상하리만큼 좋은 두뇌와 ‘적당히, 정도껏’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그의 능력, 그리고 뭔지 모를 광기. 늘 둘이 함께 다녔던 덕에 나는 그의 광기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다지 관심 없다는 태도로 앉아 있던 이론 시간과는 다르게, 생명을 다루는 실험을 하는 시간이면 박 군은 솟구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곤 했다. 닭 모가지를 비틀고, 도마뱀의 배를 가르고, 살아 있는 쥐를 물에 담가 기절시키는 일 모두 박 군이 자처하여 도맡았다.
그럴 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피를 흘리거나 토를 하며 죽어가는 생명체에게 그는 핏줄 선 눈으로 홀린 듯 존경의 눈빛을 담아 보냈다.
둘이서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시내 한복판 바로 우리가 보는 앞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피해자는 횡단보도를 건너던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머리 쪽에는 검정에 훨씬 가까운 붉은빛의 피가 흘러나왔고, 뼈가 꺾인 채로 경기를 일으키는 그녀의 모습은 여러 밤에 걸쳐 꿈에 나올 만큼 징그러운 몰골이었다. 나는 그때 경찰에 신고하는 등 난리를 피웠지만, 박 군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경찰차가 도착한 후, 담당 형사가 던지는 여러 가지 질문에 대답한 후 여전히 꼼짝 않고 있는 그를 향해 돌아봤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스팔트 위에 흥건히 고인 피를 보며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피에로같이 입이 찢어진 미소였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후에도 나만 볼 수 있었던 그의 광기는 종종 나타났다. 그러나 나 말고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서 문제점을 발견했다 한들 이미 그와 떨어져 다닐 구실은 없었다. 딱히 학과 친구들을 사귀어놓은 것도 아니었고, 가끔 미쳐 보이는 점 빼고는 박 군은 너무도 정상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취생이었던 박 군은 요리를 잘하는 편이었다. 그는 학교 밥맛이 좋지 않다고 말하며 언제나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는데, 어느 순간 내 몫까지 챙겨주기 시작했다.
나는 병아리 모양으로 만든 메추리알, 토끼 모양의 사과, 밥 위에 김으로 아기자기한 사람 얼굴을 만들며 좋아하는 그를 보며 오해를 한 건 아닌지 헷갈리는 경우도 많았다. 조금만 더 이상한 행동을 했다면 알아차리고 확 멀어졌을 텐데, 그는 이상하다 싶으면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정상적이다 싶으면 기묘한 행동을 보였다.
어찌 됐던 간에 나는 ‘그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계속 박 군이랑 붙어 다녔고, 막연한 공포는 늘 얇게 깔려 있었지만 그와 둘이서 나름 보람찬 대학 인생을 보냈다는 생각을 아직도 종종 한다.
“너무 얘기가 길어진 것 같군.”
나는 의식적으로 말을 끊었다.
“설마 끝이에요? 대단한 사람이네요, 박 군은. 선생님 말마따나 조금 이상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그 뒤에 어떻게 됐어요? 계속 같이 다녔어요?”
K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짧은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재촉했다. 마치 엄마에게 곰 인형을 조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간식을 달라고 낑낑거리는 강아지 같기도 하다.
“같이 안 다녔어.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거든.”
“그럼 혼자 다니신 거예요? 궁금하다, 정말.”
“글쎄다. 여자랑 다녔을 수도 있고. 일해야지, 이제.”
나는 일부러 K의 호기심이 한 층 더 자극되도록 돌려 말했다. 나는 사실 이 뒤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고 싶었다. K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혹시 그녀가 뒷이야기에 관심이 없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K는 내 입에서 여자 얘기가 나오자 역시나 예상대로 미끼를 덥석 물었다.
“여자랑 다녀요? 꼭 더 들어야겠네요. 더 해 주세요. 듣고 말 거야.”
그녀가 자못 화난 척 인상을 쓰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나는 그녀의 적극적인 모습에 웃고 말았다.
“알았어. 해 줄 건데, 오늘은 진짜 일해야 하잖아. 다음에 해 줄게.”
나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러면 오늘 저녁 같이 드실래요? 이 주변에 제가 잘 가는 데가 있거든요. 제가 살게요. 그럼 남은 얘기를 마저 해 주실래요?”
역시 그녀에게선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 나왔다.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그녀의 고집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할 수 없지. 그럼 일 끝나고 좀 기다리라고.”
나보다 30분 일찍 퇴근하기로 돼 있는 K는 이것저것 잡일을 하며 나를 기다렸다. 이윽고 일을 끝낸 나는 연구 가운을 벗고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회색의 양복 재킷을 챙겨 입었다.
“그럼 김 선생님, 수고하시고 내일 봅시다.”
연구원 세 명이 사무실 모퉁이 의자에 앉아 있는 K를 힐끔 보더니 다 안다는 눈빛으로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연구소를 나갔다. 격려나 응원의 눈치는 아니었다. 다 알지만 관심 없다는 그들의 표정. 연구소의 동료는 일적인 부분에서도 사생활에서도 자신들의 직속 사항이 아니면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대 사회 개인적 삶의 병폐라지만 나에게 있어선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럼 갈까.”
립스틱을 덧바르고 있는 K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가방에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기더니 내 뒤를 따랐다.
그녀가 안내한 레스토랑은 컨트리풍의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꽤 자유로운 분위기라서 사람들이 웅성대고 말하는 소리가 홀 안을 꽉 채웠고, 아이들은 이곳저곳에서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녔다. 우리를 창가 쪽의 자리로 안내해 준 종업원은 숨바꼭질을 명목으로 테이블 밑에 숨어 있던 여자아이를 내보낸 뒤, K가 앉기 쉽게 의자를 잡고 당겨주었다.
“고마워요.”
K가 웃자 눈 밑의 근육이 한껏 올라가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눈웃음을 자아냈다. 매력적이지만, 여전히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나초 치즈를 얹은 감자튀김과 서로인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와인을 권하는 직원의 말을 거절하고 그녀는 오렌지에이드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종업원이 계산서를 내려놓고 떠나자, 그녀는 “제가 사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해요.”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도 좋아해.”
사실 나는 이런 컨트리풍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처음이었지만,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애주가였는데, 술을 마시지 않는 나를 따라 어느 순간부터 조금의 알코올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이런 데, 여자랑 와본 적 있으세요?”
아까의 여자 발언이 신경 쓰였는지 K는 계속 나를 떠보았다. 입이 작은 그녀는 말을 할 때 꼭 풍선껌을 씹는 것 같았다.
“아니.” 변명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김 선생님이 하는 여자 얘기를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일부로 말을 안 하는 건가, 아니면 오늘 하시려는 건가? 어쩌면 만나본 적이 아예 없으신 건가?”
의도가 뻔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때까지의 여자관계를 빨리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굳이 숨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를 사귄 적은 없어. 그럴 기회가 없더군.”
말을 듣자마자 K는 대놓고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순식간에 그녀는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바뀌었다.
“왜요? 선생님같이 매력적인 분이? 나라면 김 선생님께서 대시해 온 다면 당장 사귀었을 건데.”
K는 두 가지 의미로 그 말을 했을 것이다. 첫째는 순수한 의미로, 둘째는 좀처럼 고백하지 않는 나에 대한 책망의 뜻으로.
대답하려는 순간 종업원이 음식이 가지고 왔다. 뜨거운 접시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몇 초 동안 마주앉아 있는 상대방의 얼굴이 팔랑거리는 연기 때문에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식은 훌륭했다. 미디엄 레어로 주문한 스테이크에서 배어 나온 핏기가 접시 바닥을 살짝 촉촉이 적시며 풍부한 질감을 내보였다. 감자튀김도 막 튀긴 상태여서 입에 들어갈 때마다 바삭바삭 소리가 났다. 음식을 먹으며 K는 나에게 아까 다 못했던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내가 기다렸던 부탁이었다.
그녀와 같이 일한 2년 동안 나는 늘 K에게 박 군과 ‘그 여자’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녀가 알기엔 어쩌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지만, 나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K에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는 마땅히 얘기할 만한 상황이 없었기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지금 K는 나서서 이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고 있다. 완벽한 기회였다. 괴상한 편지를 보내서 이런 행운을 안겨준 박 군에게 잠시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묘하게 승리감에 도취된 상태로 아까 나누던 이야기를 마저 잇기 시작했다.
3학년 과정을 시작함과 동시에, 우리보다 두 살 많은 여자 선배가 2년 동안의 휴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왔다. 같은 학과였던 여자 선배는 2년 후배였던 우리와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다. 개강 날 그녀는 범상치 않은 외모로 첫 등장부터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어깨까지 오는 가지런한 머리에, 큰 키는 아니었지만 비율이 좋아 잘 빠져 있던 다리. 언제나 생글생글한 웃음을 짓고 있던 쌍꺼풀 어린 눈은 작은 코와 옅은 빛의 입술과의 조화를 잘 이루었다. 그녀는 학과 내의 남녀 누구나 선망할 정도로 예쁜 외모의 대학생이었다.
남학생들은 언제나 술자리에서 그녀의 외모에 대해 칭찬을 했었고, 여학생들은 항상 그녀를 부러움과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본명보다 ‘라라’라는 애칭으로 많이 불렸다. 한 남학생이 자신이 기르는 강아지 이름이 라라인데, 해맑은 모습이 여자 선배와 똑같이 생겼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자 그녀는 함빡 웃으며 “그럼 나를 라라라고 불러도 좋아.”라고 말함으로써 생긴 별명이었다.
나도 다른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온 만인의 여자 친구 같은 존재인 라라에 대해 동경의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박 군에게 그녀에 대한 얘기를 했다. 하지만 박 군은 라라의 얘기만 나오면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 하고 넘어가곤 했다.
라라가 휴학했던 원인은 당시에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휴학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그냥 몸이 좀 좋지 않았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이 이야기를 꺼린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고 “그래? 이젠 괜찮지?” 하며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 바쁜 것이다. 라라는 H대학 생명과학과의 여주인공이자 헤로인이었다.
박 군이 나보다 먼저 라라 얘기를 꺼낸 건 그 해 2학기 과정이 끝나갈 때쯤이었다. 잠시 기숙사 앞 공터에서 얘기를 나누자는 그의 말에 낮잠을 자고 있었던 나는 잠옷 바람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날따라 노을은 유난히 불타는 듯한 진홍색으로 하늘 위에 칠해져 있었다.
먼저 도착한 박 군이 나무 밑 벤치에 앉아 커피 우유를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내 몫으로 사다 둔 초콜릿 우유를 건네고는 노을 너머 지는 엄지손톱 크기의 태양을 바라봤다. 우리는 그렇게 태양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어둠이 확 덮쳐올 때까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이 본 풍경이지만 볼 때마다 마음이 잔잔해지며 평온해지는 기분이었다. 가로등의 등불이 하나 둘 켜질 때 그는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라 말인데……. 나, 라라랑 사귀기로 했어.”
그 말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우리 사이엔 몇 초 동안의 침묵이 머물렀지만, 이내 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기 때문에 고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박 군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웃어?” 그는 물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세게 두드리며 말했다.
“뭐야, 왜 이런 걸 이제 말해. 전혀 눈치도 못 챘네. 언제부터 둘이 만난 거야?”
박 군은 우물쭈물하며 두 달 정도 됐다고 말했다. 방과 후 그와 라라는 같은 영어회화 수업을 들었고, 그 안에서 파트너가 된 것을 계기로 하루이틀 만나다 보니 애정이 싹텄다고 한다. 먼저 사귀자고 제안한 쪽도 라라 쪽이었다고 한다.
능청맞고 천연덕스러운 성격을 가지긴 했었지만, 연애엔 숙맥이었던 박 군은 그 두 달 동안의 애매한 상황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쩔쩔매다가 라라의 고백에 사랑이 시작됐음을 비로소 깨달았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는 사람의 심리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날 그가 가장 걱정이라며 털어놓은 고민은 라라는 학과 내 모든 남자가 좋아하는 여성인데 감히 그런 사람과 교제해도 될까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런 쪽은 이상하리만큼 소심하고 멍청한 그에게 ‘다른 남자애들이 라라에게 품었던 감정은 동경이지 사랑이 아니다, 실제로 라라는 그중에 누구하고도 사귀지 않았지 않느냐’며 장황하게 설명한 뒤 힘을 심어주는 갖가지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학과 내 최고의 여학생과 사귀니 잘해줘야 한다.”, “넌 이제 나랑 그만 다니고 라라 도시락이나 싸라.” 등 잔뜩 놀려대고는 기숙사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운 나는 왜 진작 그와 라라가 맺어지는 상상을 하지 않았는지를 의문스러워하며 키힉, 하고 웃었다. 박 군이 약간 이상한 면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 당시엔 내가 완벽한 그를 너무 삐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의심도 공존했기 때문에 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음날 박 군과 라라가 사귄다는 소문을 들은 학생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잠깐 놀라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이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학과 내 가장 관심 받는 두 명의 조화에 대해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넘지 못할 벽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곧 입을 다물었다.
이후로 박 군 옆은 나대신 라라가 차지했다. 박 군은 키도 크고 어깨도 믿음직스럽게 떡 벌어져 있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라라를 지켜준다는 느낌을 주었다. 박 군이 떠난 나는 혼자가 됐지만, 어렴풋이 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딱히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쏠리는 관심을 옆에서 더는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을 느끼며 나는 혼자서 대학생활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뒤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때는 4학년 졸업시험 준비가 한창이던, 매미울음이 서서히 들리는 초여름이었다. 졸업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서는 생명과학과의 전공 서적뿐만 아니라 다른 관련서적들도 모조리 읽어봐야 했었고, 때문에 그 시기의 도서관은 공부하는 학생들로 언제나 북적북적했다.
나 역시 졸업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몸이었기 때문에 도서관을 밥 먹듯 드나들었다. 6월의 어느 날, 도서관의 빈자리를 찾기 위해 서성이고 있을 때, 모퉁이의 책상에서 박 군이 라라에게 시험에 관한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도 공부도 열심히 하는군.”
순간 내가 비꼬는 어조로 말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돌아서는 찰나 라라에게서 예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무엇인가 미세하게 이상했지만,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나는 눈썹을 문지르며 그저 착각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빈자리를 찾아 다른 층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만약 나의 눈썰미가 조금 더 날카로웠다면 그때 그 변화가 뭔지 쉽게 잡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이 의문점은 금방 해결됐다. 라라가 점점 말라간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점차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살이 빠지고 있었다. 마른 체질이 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기를 써대는 여학생들은 흔했지만, 라라는 도가 지나쳤다. 비단 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라라의 비정상적인 다이어트의 심각성을 느끼고 걱정해 주었다.
처음의 “살 빠졌네.”, “말랐다, 부러워.” 따위의 말들이 점점 “너무 말랐다.”, “많이 좀 먹어.”, “병 아냐? 주사 좀 맞아.” 같은 우려의 말들로 바뀌었고 방학 직전인 6월 말에는 아무도 라라에게 그녀의 모습에 대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라라는 마치 가죽만 남기고 말린 박물관의 미라처럼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와 박 군이 듣지 않는 자리에서, 거식증 아니면 루게릭병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럽고도 은밀한 추측이 생겨났다. 그녀의 병명에 대해서는 수없이 많은 주장이 펼쳐졌지만, 라라를 휴학하게 했던 병이 다시 도진 것이라는 의견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하지만 정작 박 군은 여자 친구의 변화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대로 라라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벤치에 앉아 박 군이 싸온 도시락을 먹고, 아무렇지 않게 공터를 산책하거나 소풍을 갔다. 두 사람 사이의 변화는 라라의 살이 격하게 빠졌다는 것 빼고는 없었다.
가끔 눈치 없이 라라의 병에 대해 직접 박 군에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박 군은 얼굴을 찡그리며 “뭐가? 난 모르겠는데?”라고 쏘아붙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라라의 변화는 날이 가면 갈수록 더 확연해졌다.
이제는 단순히 살이 빠진 것이 아니라 몸에도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강의실을 옮기는 잠깐의 걸음 후엔 이마에 맺힌 땀이 그녀의 힘든 기색이 역력히 보여주었고, 걸음이 보통사람보다 두 배는 더 느려졌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대한 반응속도나 눈을 깜빡이는 행동들조차 모든 것이 느릿느릿해져서 마치 라라 혼자 굼뜬 시간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별명을 짓게 한 강아지 같은 웃음은 늘 잃지 않았다. 라라는 뭔가 엄청난 병을 앓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볼우물이 살짝 패이게 웃는 모습은 전이나 후나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1학기의 종강과 동시에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라라는 아무래도 휴학을 해야겠다며 학과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박 군은 그녀 옆에서 다른 먼 곳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딱히 말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종강의 기쁨이 순식간에 우울한 기류로 바뀌었다.
피골이 상접한 라라의 모습에 안타까운 감정을 차마 숨기지 못하고 울어버리는 여학생도 있었다. 모두 그녀 주위에 둘러서서 2학기 때는 꼭 건강하게 돌아와, 라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라라는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손을 흔들었다. 그게 라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말을 마친 후 K의 표정을 살폈다. K의 표정에서는 안타까움의 감정만 실려 있었다. 이상한 감정을 느끼는 경향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 뒤로, 라라 양은 어떻게 됐어요? 병은 다 나았나요?”
“다 나았을 거라 생각해?”
“음, 아뇨……. 너무 안타까워요. 그 예쁜 나이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 남자아이가 들고 있던 그릇을 박살내며 큰 소리를 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김 선생님, 대학 시절에 아웃사이더였네요.”
때 아닌 소동 덕분에 우울한 분위기를 극복한 듯 K가 나를 향해 혀를 내밀며 놀렸다.
“아웃사이더? 굳이 집어서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겠지. 상관없었어. 혼자가 편했거든.”
“근데 선생님은 박 군이 무서웠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말만 들어서는 별로 이상한 면을 못 느끼겠어요. 선생님이 착각한 것 아닐까요? 라라 양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로맨티시스트인걸요. 아픈 여자 친구를 떠나지 않고 계속 보살펴 주는 것 말이에요. 마음은 찢어질 정도로 슬펐을 텐데.”
“그랬겠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지경이 됐는데. 그나저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그런 일로 걱정시키지 말았으면 좋겠군.”
나는 또 K의 마음을 떠보는 말을 하며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볼이 살짝 빨개지더니 “절대 안 그럴게요.” 작은 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박 군이 이상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선 이 이야기의 결말까지 말해야겠군.”
오랜 시간 떠들어대서 말라버린 목에 수분을 공급하기 위해 컵에 물을 따르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녀는 필기라도 할 것 같은 자세를 취하며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끝냈다. K는 불과 몇 시간 전 연구소에서보다도 부족한 면이 훨씬 채워져 있었다. 이야기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의문의 병이 방학 동안 순식간에 낫게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라라는 다시 한 번 휴학을 했다. 담당교수는 그녀가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들 병문안이라도 가고 싶어 했지만, 그녀가 입원한 병원의 소재는 알 수 없었다. 박 군도 라라를 따라 휴학해 버렸기 때문이다.
정확한 라라의 병명은 끝내 공개되지 않았고, 그 둘은 사라졌다. 두 사람의 행방불명에 대해 학과 사람들은 대부분 걱정과 안타까움을 표했지만, 너무 완벽한 박 군이 사라져버려서 속이 시원하다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잘난 사람은 뭘 해도 미움 받기 마련이다.
한동안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둘의 얘기를 하느라 바빴다. 라라와 박 군은 카페 안에서 친목 형성의 밑거름으로, 술자리 안주로, 그리고 소개팅 자리의 얘깃거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하지만 졸업시험이 바로 코앞에 닥치자 더 이상 그들의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늘 똑같았던 성적 우수자 명단 맨 위의 이름은 졸업시험이 치러진 후에야 비로소 바뀌었다. 물론 수석이 바뀐다 해서 내가 그 명단 안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나는 여기 H대학교에선 지극히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으니까.
졸업시험도 끝나고 여유로운 날들만 계속되고 있었다. H대학교는 우리나라 최고의 공과대학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각종 연구소에서 학생들을 데려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나도 당시 스카우트 제의를 해오던 여러 개의 연구소 중 유전 분야인 지금의 연구소를 택했다. 졸업 후가 보장돼 있었기 때문에 그 시기의 다른 대학생들보다 훨씬 느긋한 삶이었다. 취직이 확정된 나는 강의실 뒤편에 앉아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창문 너머로 감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어 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신선놀음을 즐겼다.
박 군이 찾아왔던 날에도 어김없이 맨 뒷자리에 앉아 교수의 노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중이었다. 가지에 매달린 감은 이미 홍시가 될 정도로 익어 있었지만 떨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나는 좀 더 멀리 바라보았다.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보자 학교 외벽 너머로 갈대밭의 시야가 확보되었고, 그 끝엔 당시 폐쇄된 지 몇 년 안 된 연구실B가 간신히 눈에 들어왔다. 본디 그곳은 H대학교의 소유였으나, 실험 중의 큰 사고로 몇 명의 연구원이 죽은 뒤로는 곧바로 폐소되었고, H대학교도 소유권을 포기했다고 한다.
어째 으스스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감나무로 눈을 돌렸다. 곧이어 내가 본 게 잘못된 게 아닐까 생각하며 눈을 비볐다. 그곳에 박 군이 혼자 서 있었다. 재빨리 그의 주변을 훑어봤지만 라라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떨어진 낙엽 위에 혼자 서서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며 학교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수업이 끝났다는 교수의 말과 동시에 나는 교실에서 튀어나와 박 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두려워했던 옛 친구라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도 마찬가진지 나를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널 기다렸어.”
박 군은 밥이나 한 끼 먹자고 제안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라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기 위해 온 것임을 알아챘다. 그는 라라만큼은 아니지만 못 본 사이 굉장히 야위어져 있었다. 내 눈에 담긴 생각을 알아챘는지 그는 초췌해진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나, 많이 살 빠지지 않았어? 다이어트를 빡세게 했거든.”
하나도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우리는 근처 회전 초밥 가게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기 때문에 가게는 전체적으로 한산했다. 자리에 앉고 시간이 꽤 흘렀지만, 그는 선뜻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눈앞에서 돌아가는 초밥 접시를 집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녹차가 담긴 찻잔만 응시한 채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찻잔이 아닌 그 위로 솟아나는 김을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그런 박 군의 모습에 나도 동시에 불편해져 버려 내 앞에 집어다 놓은 광어초밥에 선뜻 젓가락을 가져가지 못했다.
몇 분 동안의 정적이 더 흐른 뒤에, 박 군은 비로소 정신 차렸다는 듯이 머리를 한 번 흔들더니 드디어 지켜왔던 침묵을 깼다.
“궁금하지 않아? 라라.”
“라라만 궁금한 게 아니야. 네 안부도 궁금해.”
나는 아랫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접시 위의 광어초밥이 공기 중에 수분을 뺏기며 말라가고 있었다.
“라라의 상태가 곧 너의 안부겠지.” 덧붙여 말했다.
그는 다시 찻잔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눈동자가 흐렸다. 그는 찻잔을 보는 게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리라.
“라라는……”
검은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박 군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생새우초밥이 담긴 접시를 집었다. 특별히 생새우를 좋아해서 고른 것이 아닌 손가는 대로 집은 결과인 듯했다.
그가 나머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내 주변의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나를 향해 말하는 그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요였다. 하지만 입 모양은 그가 내뱉은 말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