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 판단

  • 장르: SF | 태그: #10월어느날 #루나시티 #SF
  • 평점×85 | 분량: 128매
  • 소개: 아크엔젤 호의 유일한 에너지원인 태양이 사라졌다. 선장은 선택을 내려야 한다. (2024 대한민국 과학소재 단편소설 공모전 최우수상) 더보기
작가

중립 판단

미리보기

충격에 정신이 들었다. 지한은 눈을 뜨려고 했지만 뜰 수 없었다. 무언가가 눈을 덮고 있었다. 눈을 비비자 끈적하고 미끈하고 물컹거리는 무언가가 묻어났다. 그것은 액체라고 하기엔 어느 정도 형태를 유지했고 고체라고 하기엔 맥없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지한은 무엇인지 모를 것을 걷어 냈다. 희뿌연 시야 속에서 내려다본 몸은 눈을 덮은 그것 범벅이었다. 지한은 얼굴을 한 번 더 훔쳤다. 그것이 손에서 덩어리째 묵직하게 떨어졌다. 그나저나 내가 왜 바닥에 쓰러져 있지?

지한은 흐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면낭이 포도송이처럼 천장에 붙어 있었다. 몸집에 따라 크기가 다른 수면낭 속에는 사람들이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거품을 내뿜었고 발을 쭉 내질렀다. 지한은 자신의 수면낭을 어렵지 않게 찾았다. 포도 껍질처럼 찢어진 수면낭에서 온몸을 덮은 무언가가 뚝뚝 떨어졌다. 지한은 이것이 부동액임을 알아챘다. 하지만 지한이 아는 부동액은 액체일 터…… 무언가 이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던 신체 기능이 조금씩 돌아왔다. 인식하지 못했던 아픔과 추위가 뒤늦게 몰려들었다. 팔꿈치와 무릎, 발목 어디 할 것 없이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고 부동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부위는 얼음장처럼 추웠다.

비욘드에 도착한 걸까?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비욘드에 도착했다면 이렇게 고요할 리 없다. 무엇보다 혼자 깨어 있을 리 없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몇 월 며…… 칠이지?”

지한은 눈을 비볐다. 부동액은 걷어 내고 걷어 내도 계속 묻어났다. 여전히 눈앞이 흐렸고 온몸을 파고드는 한기에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지구력 2378년 10월 14일입니다.”

2378년. 이상하다. 예상 도착일은 그보다 더 뒤일 터. 아무리 일찍 도착한다 해도 예상 도착일보다 두 자리 수 이상 차이 날 리 없다. 분명 예상외 일이 발생한 거다. 잠깐만. 이 목소리는……?

지한은 가늘게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새까만 시야 가운데가 부옇게 밝아지며 수면낭 다발 앞에 우뚝 선 네모 블록이 보였다.

“깨웠으면 보고만 있지 말고 말을 해야지. 이민.”

“안녕하세요. 캡틴. 인사가 늦었습니다. 너무 괴로워하셔서 말을 걸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이민이 말할 때마다 블록 모서리가 하얗게 깜빡였다.

“배려. 아주 고마워. 이민, 대체 무슨 일이야. 도착……한 거야?”

지한은 양팔을 지지대 삼아 몸을 뒤로 젖힌 채 블록을 올려다보았다.

“예정에 없는 기상, 죄송합니다. 아직도 캡틴을 깨우는 게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제가 커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습니다.”

이민의 인공 합성음이 떨렸다. 떨릴 리 없지만 지한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떨지 말고 차분히 말해 봐. 그보다 먼저…… 위에 덮을 걸 좀 가져다줄래? 추워서 미칠 거 같아.”

“알겠습니다. 이걸 착용해 주시겠습니까?”

블록 몸통 중앙에 동그란 구멍이 생겼고 그 안에 땅콩만 한 장치가 보였다. 지한은 손을 뻗었지만 헛손질을 했다. 한 번. 두 번. 거리 감각마저 상실한 모양이었다. 이민은 사이드암으로 이어폰을 집어 지한의 손바닥에 올려 주었다.

“고마워.”

“이제 멀리서도 대화할 수 있습니다. 담요도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캡틴.”

이민은 기둥 네 개를 회전초처럼 빙글빙글 회전하며 수면실을 나갔다. 이민은 사각기둥 네 개를 하나의 축에 끼운 형태였는데 각각 기둥이 상황에 따라 몸통과 다리 역할을 바꿨다.

곧장 돌아온 이민이 사이드암을 뻗어 지한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이민,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이민은 모서리를 빠르게 두 번 깜빡였다.

“원래 일어나면 눈이 안 보여? 저번 불침번 때는 춥지도 않았고 눈도 잘 보였는데.”

“급속해동 부작용 때문일 겁니다. 금방 돌아올 겁니다. 캡틴.”

지한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급속해동을 할 정도로 사태가 위급하다고 돌려 말한 것 같았다.

“참아 볼게. 그래, 그 위급한 일이 대체 뭐야?”

“그게 캡틴, 제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깨웠습니다. 죄송합니다. 원래라면 비욘드 도착 한 달 전에 깨워야 하지만 이번 일은 섣불리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 그 얘긴 아까도 들었어. 그리고 사과하지 않아도 돼. 어쭙잖은 판단을 내리느니 나를 깨운 게 나아. 그게 내 역할이잖아.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얘기해 봐.”

“태양이 사라졌습니다.”

이민의 모서리가 신중하게 깜빡였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