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 장르: 판타지, 로맨스 | 태그: #환상해역 #동양판타지 #가모장 #모란 #일처다부
  • 평점×40 | 분량: 94매
  • 소개: 어머니로부터 딸에게 왕위가 승계되는 왕조. 왕이 버린 공주가 양부의 복수를 위해 생부를 죽이고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더보기

모란이 피기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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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잃었다. 어른이 되었다.

어머니가 딸에게 작위를 승계하고 재산을 상속하는 고나라의 왕실에서 왕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 하고 이름을 부르며 하대했다. 후궁들은 그들의 자식이자 왕이 낳은 아이들에게 왕에게 하듯 존대를 했다. 나는 여염의 아이들처럼 아빠를 아빠라 부르고 아빠는 나를 ‘아가’, ‘고운 아가’,’내 아가’,’사랑하는 아가’라고 불러서 내 이름도 아빠의 이름도 잊고 살았다. 아기였던 적은 한참 전에 지났지만 아빠에게 나는 영원히 아가였다. 궁의 모든 아이들은 가마를 타고 다녔지만 나는 아빠의 어깨에 앉아 무등을 타거나 등에 업히거나 품에 안겨 다녔다. 그들이 비단방석에 앉을 때 나는 아빠의 무릎에 앉았다. 나나 그 아이들이나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사는 건 매한가지였으므로 나는 한번도 그들이 부럽지 않았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왕의 총빈이자 고나라 최고의 명문가 출신 후궁인 ‘좌고’의 아들인 ‘편경’은 왕의 아이인데도 혼자 자기 발로 다니고 방석 없이 맨바닥에 앉았다. 언제까지 날 안아주고 업어줄 거냐고 어리광을 부릴 때마다 아빠는 ‘우리 아가 어른될 때까지’라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내가 열 살 때부터 병을 앓아 자리보전을 하느라 더 이상 나의 가마이자 방석이자 날개가 되어 주지 못 했다. 그래도 아빠는 가늘어진 팔로 밤마다 팔베개를 해 주며 자장가 대신 불길한 저주 같은 혼잣말을 했다.

“현나라의 왕이 후계 없이 죽어가는구나. 내 이복동생이 나를 죽이는 구나. 너의 숙부가 너를 노리는구나.”

아빠는 원래 고나라 바로 옆에 붙은 현나라의 세자였다. 고나라가 정복전쟁을 벌이며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굴복시킬 때 가장 오래 치열하게 항전하며 버틴 나라가 현나라였다. 세자였던 아빠는 투항하려는 부왕의 머리를 베어 성벽에 걸고 화살이 떨어지면 돌을, 돌이 떨어지면 분뇨를 퍼부어가며 성을 지켰다. 고나라의 봉쇄가 길어져 군량을 다 먹고 시체를 뜯어먹고 자식을 잡아먹을 지경이 된 현나라의 백성들은 마침내 성문을 열고 세자를 내보내 항복했다. 세자는 화친혼을 명분으로 고나라 왕의 후궁이 되고 대신 고나라는 허울 뿐이나마 현나라를 그대로 두었다. 세자의 이복동생이 이름 뿐인 현나라의 왕이 되었다. 고나라의 왕은 현나라의 세자를 철저히 모욕하고자 했다.

“고나라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 두고 절대 찾지 않아 오래 혼자 쓸쓸하게 잊혀지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패배한 적국의 세자가 승리한 왕을 오만하게 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바라 마지 않는 바입니다.”

그 얘기를 나는 아빠의 궁에 있던 궁인들에게 들었다. 아무리 잊혀 질 사람이라 해도 세자였던 이를 홀로 보내는 건 매정하다 여겼는지 현나라의 왕이 된 아빠의 이복동생, 내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내 숙부는 아빠가 고나라에 올 때 현나라 출신 궁인들을 몇 명 함께 보냈다. 아빠는 같은 현나라 사람인 궁인들에게 냉랭해서 거의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들은 날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침략자인 고나라 왕의 핏줄이며 아빠의 친딸도 아니고 아빠를 아프게 한 못된년이라고 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자주 아팠는데, 아빠는 전쟁 때 너무 고생해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궁인들은 나 때문에 생긴 상처가 덧나서라고 했다. 궁인들은 나를 목욕시킬 때마다 옷으로 가려지는 부위에 뜨거운 물을 끼얹고 때를 벗긴다며 살갗이 벌개지도록 박박 문질러댔다. 아빠가 수건과 부채로 머리카락을 말려 줄 때 징징대면서 목욕하기 싫다며 궁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일러바쳤다. 아빠는 그 즉시 ‘감히 왕의 아이를 학대했다’면서 왕명을 빌어 궁인들을 내쫓았다. 전쟁 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남은 사람들은 누가 누굴 챙길 겨를이 없어 스스로 뭐든 다 해야 했다던 아빠는 궁인들 없이도 가사일을 하고 나를 잘 기를 수 있었다. 궁인들은 모두 궁을 벗어나기 전에 자진했다. 나 때문에 그런 거냐고 물었을 때 아빠는 그들이 현나라 왕의 첩자여서 축출한 거라고 했다. 그 때부터, 아니 현나라에서 추방되듯 고나라로 오면서부터 아빠는 현나라 왕을 의심하고 있었다. 언젠가 현나라 왕이 자신을 암살할 거라고. 고나라 왕실에서 암살은 흔한 일이니 현나라의 소행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거라고.

“현나라는 고나라와는 달리 아버지가 적자인 장남에게 왕위를 세습한단다. 그러니 부왕의 서자이자 차남인 현나라 왕보다는 내가 정통성이 있지. 그래서 그는 나를 두려워한단다. 내가 내 몫의 왕관을 요구하면 자기 머리에서 왕관을 벗어줘야 하니까. 현나라의 백성들도 나의 귀국을 원하지 않는단다. 내가 고나라와 다시 싸우면 극심한 기아를 겪을까 봐 두려워한단다. 나는 아마 살아서 현나라로 돌아갈 수는 없을 테지.”

궁인들이 나가고 난 후로 아빠는 나와 단둘이 좁은 처소에 고립되었다. 편경을 제외하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나는 아빠와 늘 함께였다. 아빠는 맑아서 멀리까지 보이는 날이면 내 이마에 손을 대어 손차양을 만들어 주고 함께 현나라 쪽을 바라보며 내게 글과 현나라의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현나라가 조금이나마 보일까 늘 창밖을 보며 현나라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아빠는 결국 다시는 국경을 넘지 못 했다. 현나라 전 세자와 고나라 왕의 딸인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아빠의 정원에는 작약이 피었다. 꽃의 왕이라는 모란과 닮았으나 모란은 아닌 꽃. 어린 내가 작약을 꺾어 고나라 왕의 유일한 하사품인 화병에 꽂으려 하면 아빠는 “꽃을 꺾으면 며칠 만에 시들지만 흙 속에 뿌리를 내리면 씨앗을 맺고 그 씨앗을 심으면 또 꽃이 피고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단다”라며 만류했다. 아빠는 고나라에 오래 살았는데도 뿌리를 내리지 못 해서 일찍 시들어버렸나. 아빠 없는 궁은 꽃 없는 화병 같았다. 아빠가 꽃 대신 감상하고 애만지던 아무 무늬 없는 화병. 침대 위에 죽은 아빠를 두고 차고 딱딱한 바닥에서 혼자 잠들었다. 삼일장의 첫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빠가 졸하였다고 왕에게 고했는데도 왕은 아무런 장례 용품도 내어 주지 않았다. 둘째 날에 편경이 혼자 관을 끌며 걸어 들어 왔다.

“이제 해금 너도 나 같은 처지가 되었구나.”

편경은 왕이 나를 낳기 직전 해에 낳은 아들이었다. 편경의 아비인 좌고는 왕의 아이인 편경을 대놓고 구박하진 못 했으나 나를 미워하듯 편경을 미워했다. 편경에게 아비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없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버림 받은 나와 아비에게 미움 받는 편경은 어릴 때부터 친했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좌고의 아들과 어울리다가 혹여 실수라도 하여 이 나라 최고 실세인 좌고에게 트집이라도 잡힐까 저어하였으나 아빠에게 예쁨만 받고 자라서 무서울 게 없던 나는 아무렇지 않게 편경에게 말을 걸었고, 아빠도 편경에게는 과자라도 한 입 더 주려 했다. 편경은 편경대로 자기와 놀아주는 사람이 나 밖에 없으니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아빠의 이름도.

“아쟁은 이제 현나라로 돌아가는 건가?”

“후궁이 죽으면 왕조의 무덤에 묻히잖아. 아빠도 그러지 않을까. 전하께 시신을 현나라로 운구하게 해달라고 궁인을 통해 간곡히 아뢰긴 했지만…”

현나라 사람들이 아빠의 귀국을 원할까. 아직도 항전을 명한 세자를 거부할까. 현나라 왕도 후계 없이 아빠와 한날한시에 죽었다. 아빠는 현나라 왕이 자신을 죽였다고 믿었다. 현나라 왕도 아빠에게 혐의를 씌웠을까.

“그럼 전하께서 결정해 주시겠지. 시신이 부패하기 전에 명령을 내리셨으면 좋겠는데.”

편경은 나와 함께 아빠의 시신을 닦고 염했다. 그토록 격렬하게 저항을 이끈 세자였다고는 믿기지 않게도 말갛고 선이 가는 얼굴에 호리호리한 체형이어서 흰 꽃봉오리나 날개를 접은 물새를 떠올리게 했던 아빠의 등에는 거칠고 험한 무수한 흉터가 있었다. 비가 오거나 날이 추우면 아문 자리가 다시 벌어지는 듯 아프다며 아빠는 며칠씩 앓아눕곤 했다. 아빠가 쫓아냈던 궁인들은 나 때문에 아빠가 궁 안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짐승처럼 맨 살을 드러내고 채찍으로 맞았다고 했었다. 왜 그랬냐고 물었을 때 아빠는 하얀 초승달처럼 웃으며 “부모는 아이를 선택할 수 없단다. 아가가 내 자식이니 마땅히 그리 했어야 했단다”라며 나를 둥기둥기 얼렀다. 아빠가 나를 선택한 이야기를 나는 아빠에게 조르고 또 졸라서 자꾸자꾸 들었다.

고나라에서는 왕이 아이를 낳으면 왕이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정해준다. 그러면 그가 아이의 아비가 된다. 왕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 그 아이는 후계자의 자격이 있다. 그러나 왕은 나를 낳고서는 아이의 아비를 지정하지도 않았고 수유를 하지도 않았고 유모를 정하지도 않았다. 그 전 아이들과는 다르게 지독한 난산이었던 탓에 자신을 죽일 뻔한 아기가 증오스러웠을까. 왕은 아기를 그냥 내다버리라고 했다. 그 추운 겨울에. 아기는 누가 봐도 좌고를 빼닮았다. 그러나 왕은 이미 회임했을 때부터, 좌고를 총애하고 권력을 주었지만 후계까지는 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왕은 후궁 중에 왕비를 발탁하겠다며 후궁들을 경쟁시키고 궁중암투로 밀어 넣고 왕비 자리를 비워 뒀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