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했습니다.”
3월 29일. 4월이 얼마 남지 않은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밤하늘에 구름이 가득했고 구름 그림자에 마구잡이로 이지러진 달이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 칸 창문으로 보이는 을씨년스러운 공포 영화 포스터. 하지만 그걸 보면서 어쩐지 오늘 밤은 하늘이 무섭다고 생각하는 건 감수성이나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나 품을 수 있는 감상이다. 물리적인 공간은 둘째치고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직전의 폐가에 내동댕이쳐진 상태인 나는 ‘달이 음산한데 어쩌라고?’ 정도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낡았어도 정들었던 방은 천장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침수되고, 있는 돈 없는 돈 긁어모았던 저금은 물 먹은 가재도구를 처리하고 다시 사들이느라 놀란 참새 떼처럼 재빨리 날아가 버렸다. 집주인이 수리를 하기는 했으나 계약 만료로 조만간 다시 새 방을 구하러 다녀야 하는 처지를 생각하면 반짝반짝하니 깨끗한 장판이나 깔끔한 문턱은 공연히 화를 돋우기만 했다.
그렇다고 특별히 하소연할 곳이나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도 없다. 다만 여유시간이 있었는지라 인터넷에서 재밌는 얘기가 없나 서성이고 있었다. 적당히 시원한 날이라 환기할 겸 창문은 열어 놓았다.
그게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뭐라고요?”
“실직했습니다.”
내가 되묻자 상대방이 아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근데 어떻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그자는 딱 어깻죽지에서 발끝까지만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고 그 위로는 검은 까마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잘 만든 탈일까? 하지만 그가 목을 까딱일 때마다 보이는 깃털의 움직임은 인간의 손으로 재현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불미스런 사태를 예감한 나는 재빨리 입을 손으로 가렸으나 배 속에서 끓어오른 닭고기와 탄산의 기운은 아주 힘차게 뻗어 나왔다. 꺼어억.
“흐음! 저를 보시고도 놀라거나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트림이라니! 아주 멋집니다.”
“당신, 아니, 당신이…… 누군데요?”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악마입니다.”
여름은 한참 멀었고 날씨는 아직 쌀쌀했다. 저녁과 함께 콜라를 마신 것뿐이니 더위를 먹거나 술에 취한 것도 아니었다. 코로 스며드는 향수 냄새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고 보면 아빠가 외출한답시고 되잖은 멋을 낼 때 이런 향수를 뿌렸던가. 유쾌하지 않은 추억을 떠올리고 있자니 자신을 악마라고 소개한 자가 한쪽 팔을 접어 인사했다.
“악마 가빈! 그게 제 이름입니다. 편하게 가빈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렇게 쉽게 이름을 가르쳐 줘도 되는 건가요?”
“물론 가명입니다. 진정한 이름은 저희가 더 깊은 밀약을 맺을 때 알려드리죠.”
악마 가빈은 꽤나 공손했지만 그의 태도와 달리 내 머릿속에 퍼진 경악과 공포의 감각은 강도나 강간 같은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만한 덩치와 육탄전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 상대는 장갑 낀 손을 제외하면 무기로 쓸 만한 것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지만 만약 저 팔로 나를 제압하거나 공격한다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리 없다.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자니 가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신 얼굴이군요.”
“…….”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시고 찬찬히 생각해 보세요. 제가 처음에 뭐라고 말씀했는지 기억나십니까?”
처음? 처음에? 자칭 악마 가빈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나는 5년 동안 사용한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거금을 털어 마련한 전자기기로, 꽤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는 별문제 없이 작동했다. 기억을 더듬고자 무선 마우스의 휠을 굴리는 동작을 재현해 보는데 불현듯 가장 처음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실직…… 했다?”
“네, 실직했습니다. 잃을 실(失)에 직분 직(職)! 다시 말해 저는 무직 악마인 셈이죠.”
그게 가능한가? 멍청하게 입을 뻐끔거리고 있자니 가빈이 어디선가 가져온 생수의 뚜껑을 열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어디서 난 친절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내가 구매한 제품이었다. 오늘 도착한 물건이라 손도 안 댄 상태로 현관에 뒀는데 언제 뜯어서 가져왔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일단 그가 건넨 물을 마시자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갈증이 마구잡이로 몰려왔다. 정신이 들고 보니 이미 절반 넘게 생수를 마셔 젖힌 뒤였다.
“악마?”
“네, 악마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계약을 통해 사람의 영혼을 빼앗고, 정갈한 영혼을 타락시키고. 그런 일을 하지요.”
이걸 보여드리면 이해가 더 빠르시겠군요. 가빈은 손가락을 맞부딪쳐 딱 소리를 내고는 자신의 품에서 꺼낸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인마물산
제46부서 과장 가빈
그 밑에는 개인 직통 단말기 번호로 보이는 것이 적혀 있었으나 도무지 내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형태였다. 왠지 나도 명함을 줘야 할 것 같아 반사적으로 헐렁한 트레이닝복 주머니를 뒤져 봤지만 딱히 잡히는 게 없었다. 음, 어, 같은 소릴 내며 여기저기 눈길을 던지다 보니 책상 구석에 밀어 두었던 명함 뭉치가 보였다. 이미 퇴사한 회사라 지금은 쓸모없는 종잇조각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게 뭐 대수랴. 달리 쓸 데도 없다. 나는 그 종이 뭉치에서 한 장을 빼 가빈에게 내밀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예전에 퇴사한 곳이고, 지금은 다른 곳에서 일하지만.”
“음! 감사합니다.”
가빈은 자신의 것보다는 이런저런 정보가 많이 적힌 내 명함을 정중히 받아 들고는 찬찬히 읽어 보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어느 회사 어느 부서 소속의 누구누구라는 정도의 신상밖에는 적혀 있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처음 만난 상대의 직무와 경험을 존중하는 그 태도를 본 나는 뻣뻣한 긴장을 풀고 다소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와 제대로 명함을 교환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을현 씨. 역시 제가 찾아온 분이 맞군요.”
“대체 왜 저를……?”
그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는 이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존재한 개념이자 만인의 두려움을 받는 악마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왜 나를 찾아오지? 이전 회사에서도 과장급 직원은 귀찮고 변변찮은 일의 뒤치다꺼리를 떠넘길 때가 아니면 나를 찾지 않았다.
“비즈니스에선 두괄식 어법이 좋다고는 하지만, 이번엔 제가 다소 서둘렀나 보군요.”
가빈은 부끄럽다는 듯 자신의 부리를 긁적이고는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해도 될지 양해를 구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이 원룸에는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책상 의자를 제외하면 마땅히 앉을 것이 없었다. 그걸 머쓱하게 말하려는데 가빈이 능숙하게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았다. 아무래도 그가 다니는 회사 내규에는 악마가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안 된다는 내용은 없나 보다.
“한결 편하군요. 강을현 씨는 거기 계속 앉아 계셔도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나는 바닥에 앉은 그와의 높이 차이가 더 어색하게 느껴져 슬그머니 의자에서 내려와 앉았다. 마주 앉아 보니 가빈의 덩치가 생각보다도 더 크다는 걸 체감했다. 하지만 이제껏 그가 보여 준 예의 바른 태도와 정중한 말투 때문인지 처음 마주쳤을 때 느낀 위압감이나 공포는 제법 사그라들어 있었다. 어쩌면 볼 것도 없는 내 명함을 찬찬히 읽어 준 순간부터 이 자에게 미약한 신뢰를 느끼게 됐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 모습 하나로 이 방문객을 완전히 신용하는 건 아니다. 사회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일시적인 배려 따위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데 하물며 악마가 그런 걸 모르겠는가.
“처음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실직했습니다.”
“악마가 실직하는 일이 있나요?”
“의외로 많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빈도도 늘었죠. ‘사탄 실직’이라는 말을 들어 보지 않으셨습니까?”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만.”
일반적인 상식이나 통념의 기준을 악랄하게 뛰어넘는 사람들을 두고 농담처럼 하는 말 아닌가.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고 말끝을 흐리니 가빈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건 인간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농담이었습니다. 저희 악마들도 이따금 회사에서 우스갯소리로 삼았죠.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 말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악마들도 회사에 다니나요?”
“네, 아무래도 인간 사회를 닮아 가게 마련인지라.”
언제부터 그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빈은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에는 매출 흑자를 제대로 내지 못한 회사들이 하나둘 대기업에 인수합병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는 합병된 회사 출신이거나 제대로 된 실적을 내지 못한 악마들이 무기한 대기 발령이라는 형태로 업무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심적 피로를 느낀 많은 악마들이 스스로 사직서를 내고 프리랜서로 전향했다고 한다.
“프리랜서 악마라는 것도 있나요?”
“어떻게든 입에 풀칠은 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