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틸리와 블랭크
“틸리, 저 사람 화살 깃에 먼지가 굉장한데.”
마임 연기가 한창인 길거리 배우에게 시선을 빼앗겨 있던 틸리가 고개를 돌렸다. 블랭크가 가리킨 방향으로 한 남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명중반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조르주. 남부 프랑스 출신이며 현재 런던에서 주재원으로 지내는 40대 인간이다. 이 광장은 그의 퇴근길로, 틸리는 마침 그가 지나치기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틸리는 마임 공연을 조금 더 보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커다란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서두른 덕분에 저만치 멀어진 조르주를 순식간에 앞질러 그의 가슴에서 화살을 뽑을 수 있었다.
화살 깃에는 블랭크의 말대로 먼지가 잔뜩 엉겨 있었다. 천사의 깃털을 좋아하는 투명 거미도 세 마리나 달라붙어 있었다. 사랑을 계속하고 있는 인간에게 꽂힌 화살은 깃에 윤기가 흐르고 천사의 날개에서 방금 빠진 것과 다르지 않게 깨끗해야 한다. 화살이 이런 상태가 되었다면 조르주의 사랑은 이제 끝났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 먼지가 쌓여 가는 것과 비슷했다.
조르주는 자기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채로 광장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틸리는 수거한 화살을 허리에 맨 길쭉한 통에 집어넣은 다음, 명단 마지막에 남아 있던 조르주의 이름을 지웠다.
“그렇게 한 번에 휙 뽑으면 아프지 않을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블랭크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아무 느낌이 없다는 뜻이야?”
“이미 시들어 버린 화살이니까.”
틸리는 자꾸 물어 대는 블랭크를 귀찮아하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했다. 말을 걸어오는 존재에게 무심히 굴 수 없는 성격 탓이었다. 블랭크도 그걸 알고서 늘 이렇게 달라붙었다.
틸리가 날개를 접고 걸음을 옮기자 블랭크도 단짝처럼 뒤따랐다. 서머타임의 때늦은 노을이 광장을 짙게 물들이자 틸리와 블랭크의 흰 날개도 은은한 오렌지빛으로 빛났다. 그렇지만 광장에 있는 어떤 인간도 그 둘의 광채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그럼 생생한 화살을 뽑을 때는 달라?”
“아직 사랑이 남아 있으면 살짝 바람 빠지는 느낌이 들기는 한대. 아무튼 천사의 화살 자체는 고통을 주지 않아. 아픈 건 사랑 그 자체지.”
“호오. 아픈 건 사랑 그 자체라. 심오한 이야기군.”
과장스러운 블랭크의 반응에 틸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늘의 마지막 화살을 수거했으니 그만 하늘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어차피 그사이 마임 공연도 끝나 버렸다.
틸리는 지상 업무를 마치고 천국으로 향하는 천사들의 통근 버스인 엔젤데커를 타야 했다. 빛나는 순백색에 하늘을 난다는 것만 빼면 인간들이 타고 다니는 빨간 더블데커와 비슷하게 생긴 버스였다. 가장 가까운 정류장은 세인트 폴 대성당 돔이었다. 틸리는 고개를 들어 그쪽 하늘을 살폈다.
“우리 그 심오한 주제에 대한 토론 좀 더 하지 않을래, 틸리 플레임?”
블랭크는 이대로 틸리를 보내 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너의 사랑 토니 말이야. 그 더블데커 운전사는 어떻게 지내? 응?”
블랭크는 마치 자신이 사랑에 빠진 당사자처럼 한껏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인간이었다면 이 천진난만한 얼굴에 속아 넘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천사인 틸리에게는 통하지 않는 수법이었다.
블랭크의 소속은 다름 아닌 지옥이었다. 지금은 자유롭게 모습을 바꾸는 재주로 하얀 날개와 헤일로를 달고 틸리의 동료 흉내를 내는 중이었다. 블랭크는 틸리가 지상에 내려와 화살을 수거할 때마다 불쑥 나타나 이것저것 묻고 참견하는 취미를 가진 악마였다. 인간의 고통과 불행이라는 주제에 열광하는 블랭크는 끝난 사랑의 뒤처리 담당인 틸리에게 여러모로 관심이 많았다. 틸리의 업무뿐 아니라 사생활에도 그랬는데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