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은 남자 친구에게 이메일을 쓰기로 결심한다. 헤어진 지 꼬박 10일째가 되던 날이다. 헤어지자고 말한 사람은 자신이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미안하다는 말, 용서해 달라는 말, 단지 그 말이 듣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남자 친구는 헤어진 후로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고, 오히려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자존심이 강한 미영이었지만 이대로 가다가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굳은 맘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이메일 주소 창에 남자 친구의 주소를 입력한 후 미영은 어떤 내용을 써야 할지 고민한다.
‘먼저 사과를 하는 게 좋을까? 아냐, 내가 왜 사과를 해. 용서해 준다고 하는 게 좋겠지? 아냐, 이건 너무 호소력이 없어. 음, 음…….’
허리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를 손으로 꼬아가며 미영은 생각에 잠긴다. 무작정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 그만이었으나 그것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이건 아냐……이것도 아냐……아, 이것도…….”
계속해서 썼다 지웠다가를 반복하던 미영에게 순간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대체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지? 따지고 보면 다 그 자식이 잘못한 거잖아. 지금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다른 여자를 만나?’
그 순간,
죽어.
미영은 무의식적으로 ‘죽어’라는 글자를 치고 만다.
“어? 이러면 안 되지. 깜짝이야…….”
의도하지 않게 손이 움직여 스스로도 깜짝 놀란다. 도리질을 치며 백스페이스를 연타한다. 그리고 또 다시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러던 중, 무언가 결심했는지 양손으로 뺨을 한 번 철썩 때린다.
“그래, 유미영! 오늘 딱 한 번만 자존심 버리자. 정말 내 생애 마지막이다. 알았지, 미영아?”
미영은 무조건 굽히기로 작정한다. 일단 마음이 정해지자 미영은 거침없이 타자를 쳐 내려간다. 보기 민망한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나 는 아 직 도 널 사 랑…… 그런데 이 나쁜 새끼가 어떻게 다른 여자를…… 망할 새끼…….”
한창 글을 쓰다가 또다시 나쁜 생각이 떠오른다. 깜짝 놀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미영. 그렇게 울컥하는 마음을 여러 번 가라앉히며 다양한 애정 표현으로 범벅된 이메일을 가까스로 완성해간다.
‘이 정도면 되겠지. 이렇게 정성을 들였는데도 안 돌아오면 진짜 나쁜 새끼다.’
A4 용지로 다섯 장은 거뜬할 길이의 장문이다. 문장의 끝마다 갖가지 이모티콘을 곁들였는데 특히 하트가 가장 많다. 그녀는 마우스 휠로 스크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자신의 글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본다.
“음…… ‘보고 싶은 형석이에게.’ 아, 아냐. ‘To. 형석.’ 아 이것도 아냐. 음음…….”
마지막으로 제목만 적으면 메일은 완성이다. 이것도 미영에게는 쉽사리 결정하기 힘든 고민이다. 여러 문구를 놓고 걱정하다가 결국 ‘사랑하는 형석에게’로 타협을 보고 제목을 입력한다. 문장 양 옆으로 하트를 두 개씩 박는 것도 잊지 않는다.
보내기 전에 한 번만 더 글을 확인해 볼까 하다가, 왠지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까 두려워 눈 딱 감고 ‘메일 보내기’를 클릭한다.
…발송 중 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제 남자 친구가 읽는 일만 남았다. 어쩌면 벌써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메일이 오면 핸드폰으로 알람이 오게 할 정도로 꼼꼼하게 체크하는 남자 친구의 버릇을 미영은 잘 알고 있다.
미영은 초조한 마음으로 ‘보낸메일함’을 클릭하고 방금 보낸 메일을 연다. 다시 봐도 정성이 느껴지는 이메일이라고 생각하며 첫 줄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용서해 줘 제발(づ_T) 난 너 없이는 못 사는 거 알잖니(づ_T)
너와 헤어지고 나의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ㅠ.ㅠ)
사랑한다구∼♡ 너도 사랑한다고 말해 줄 거지?( ̄.^)
“아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미치겠네…….”
쓸 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온통 낯 뜨거운 말뿐이다. 후회하지 말자고 되뇌며 꾹 참고 읽어 내려간다. 그런데 미영이 갑자기 한 문장에서 멈칫한다.
나는 아직도 널 사랑해♡ 죽어. 너도 아직 날 사랑하잖아 그렇지?(*^^)/
“어? 이거 뭐야, 언제 이런 말이 들어간 거야!”
미영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자신도 모르게 ‘죽어’라는 말을 문장에 섞어 버린 것이다.
‘메일을 취소해야 돼…… 제발 읽지 않았기를…… 제발…….’
부랴부랴 ‘수신확인’을 클릭하는 미영.
받은날짜 : 2008. 8. 18 (20:47)
한발 늦었다. 남자 친구는 이미 미영의 메일을 열어 버렸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내가 대체 그 말을 왜 쓴 걸까. 혹시 아까 나쁜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때 무의식적으로 쓴 건가? 미치겠네, 정말!’
단어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말 미칠 노릇이다. 그가 다른 문장들을 보면서 이런 오타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 주길 간절히 바랄 뿐.
미영은 애꿎은 입술만 계속 깨물며 초조하게 시간을 보낸다. 오른손은 마우스 왼쪽 버튼을 연신 두드려 댄다. 남자 친구의 답장을 바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받은메일함’을 계속해서 클릭하는 것이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지치지 않고 클릭하던 미영의 손가락이 멈춘다.
RE: ♥♡사랑하는 형석에게♡♥ (21:10:43) 2.1k
기다리던 남자 친구의 답장. 그런데 제목이 미영 본인이 보낸 그대로다. 그리고 터무니없이 적은 용량. 대체 몇 마디나 적혀 있을까. 미영은 긴장되는 마음에 쉽사리 클릭하지 못하고 손만 부들부들 떤다.
‘그래, 괜찮을 거야. 분명히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적혀 있을 거야.’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돌덩이 같이 굳어 버린 손가락을 내려 마우스를 클릭한다. 메일 주소 하단으로, 보낸 사람 ‘김형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스크롤을 내린다.
죽어
짧고 간결했다. 그는 미영이 실수로 적은 단어 하나만을 사용해서 답장을 보낸 것이다. 슬픔과 충격에 휩싸인 미영은 한동안 그 간결한 메일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고작 이런 답장을 받으려고 내가…… 이렇게 고생해서 메일을 썼단 말이야. 나쁜 새끼. 정말 나쁜 새끼.’
한편으로는, 그런 실수를 간과하지 않는 남자 친구의 꼼꼼한 성격을 알고 있었는데도 확인하지 않고 메일을 보낸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그래도 수확은 있다. 남자 친구에게 더 이상 미련의 여지가 없음을 알았으니 끙끙 앓을 시간은 줄 게 아닌가.
‘그래, 나 혼자 가슴앓이 하지 말고 깨끗이 포기하자. 형석이는 더 이상 나한테 마음이 없는 게 분명해.’
열은 받지만 동시에 고마운 메일이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 동안, ‘죽어’라는 한 단어가 전부인 메일을 쳐다보고 또 쳐다본다.
*
다음 날 아침, 미영은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늦잠을 자고 만다. 적어도 7시에는 일어나야 정상적으로 준비를 마치고 9시까지 출근을 하는데, 무려 한 시간이나 늦게 일어나 버린 것이다. 밤새 울었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정신없이 화장실을 향해 달려간다.
고양이 세수와 가글로 초고속 세면을 마치고 부스스한 머리를 빗질만으로 진정시킨 채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잊은 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던 미영이 문득 켜져 있는 컴퓨터를 발견한다.
“어? 내가 어제 컴퓨터를 켜 놓고 잤던가?”
슬쩍 마우스를 움직여 보니 까만 대기 화면이 원래대로 전환된다. ‘죽어’라고 적혀 있는 남자 친구의 답장도 그대로 열어 놓은 상태다.
“어, 이상하네. 어제 분명히 컴퓨터를 끈 기억이 나는데.”
미영은 늦었지만 이왕 컴퓨터가 켜 있는 김에 받은 메일이 혹시 있는지 들어가 본다.
“어? 형석이?”
남자 친구에게서 두 통의 메일이 와 있다. 보낸 시간만 다를 뿐 제목과 용량은 어제와 똑같다. 첫 번째 메일을 클릭한다.
죽어
두 번째 메일을 클릭한다.
죽어
출근길. 미영은 만원 버스 안에서 용케 자리에 앉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미영은 그 어느 날보다 지끈거리는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두통의 원인은 남자 친구다.
‘내가 미친년이지. 그런 오타는 왜 쳐 가지고.’
자책에 이어지는 원망.
‘그래도 그 나쁜 새끼. 차라리 무시를 하든가. 똑같은 메일을 세 번이나 보내서 나를 엿 먹여? 개새끼.’
30분이나 지각한 출근길이라 미영의 마음은 더더욱 불편하다. 게다가 오늘 조회는 악독하기로 소문난 ‘악녀’ 양 과장이 맡는 날이 아닌가. 정말 최악의 아침이다.
버스는 세종 사거리를 지나 시청역 4번 출구 앞에서 멈춘다. 문이 열리자 마치 팝콘이 터지듯 버스에서 사람들이 밀려나온다. 미영 또한 그들 중 한 명이다.
버스에서 내린 미영이 사람들을 밀치며 달리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회사 엘리베이터 앞까지 2분 만에 도착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볼썽사납게 헥헥 거리긴 하지만.
“어, 미영 씨. 어디 급한 일 있나 봐?”
귀에 익은 목소리. 미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확인한다. 갈색 휴고 보스 정장, 배가 살짝 나왔지만 위엄 있는 풍채.
“아, 아!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다름 아닌 미영이 근무하는 회사의 사장이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가를 찌푸린 걸로 보아 결코 좋은 시선은 아니다.
“그래, 혹시 지금 출근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에 그런 거면…… 적어도 40분은 늦었는데 말이야, 그렇지?”
사장이 손목에 찬 파텍 시계를 쳐다보며 말한다.
“아, 저기, 그게, 음.”
우물쭈물하던 미영이 끝내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땡.
때마침 들려오는 엘리베이터 벨소리. 미영이 고개를 슬쩍 들어 사장의 눈치를 살핀다.
“저…… 사장님…… 엘리베이터 왔는데요.”
미영을 빤히 쳐다보던 사장이 ‘쯧’ 하고 혀를 한 번 찬다.
“아, 나는 1층에 볼일이 좀 있어. 그리고 양 과장한테 이따가 오후에 잠깐 내 방에 들르라고 하세요. 참나 사원 관리를 이 모양으로 하나.”
“예…… 알겠습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는 미영. 9층 버튼을 누르고, 모서리에 기댄 채 핸드폰을 꺼낸다. 그리고 액정을 확인하는 순간 미영의 눈이 갑자기 커진다.
읽지 않은 메시지 53개가 있습니다.
53개. 미영이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 하루 평균 받는 문자메시지의 양은 50개는커녕 30개도 될까 말까다. 불과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거의 이틀 치의 메시지가 온 셈이다. 평소 같았으면 기대하는 마음으로 문자를 확인했겠지만, 오늘은 불안함이 앞선다. 미영이 확인 버튼을 누른다.
(싸이월드) 쪽지(New)
통화 : 연결하기
“응? 이게 뭐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미영이 다음 메시지를 확인한다.
(싸이월드) 쪽지(New)
통화 : 연결하기
똑같은 메시지. 그 다음도, 그 다음 메시지도 역시 같다. 미영의 엄지가 바쁘게 움직인다.
미영은 엘리베이터가 열린 줄도 모르고 메시지 확인에 몰두한다. 메시지의 내용은 모두 똑같다. 적어도 지금 확인 중인 34번째까지는.
“유미영 씨!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미영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팔짱을 끼고 표독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양 과장이 보인다.
*
점심시간.
미영은 오전 내내 양 과장의 눈치를 보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켠다. 한 손으로는 300원짜리 싸구려 종이컵 커피를 들고 있다.
미영은 아침에 확인한 메시지의 정체가 궁금하다. 똑같은 내용의 메시지. 점심시간에 확인해 본 바로는 32개가 더 와 있었다. 윈도우 로그인 화면에 엔터를 누르고, 곧장 익스플로러 아이콘을 클릭한다.
주소창에 자신의 미니홈피 주소를 입력한 후 팝업 창이 뜨길 기다린다. 초조한지 종이컵 끝 부분을 연신 물어뜯다가, 화면이 나타나자마자 받은 쪽지함을 클릭한다.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김형석 죽어 08.8.19
미영은 잠시 할 말을 잃는다. 한 페이지당 10개의 쪽지가 보이는데, 안 읽은 쪽지가 8페이지에 달한다. 미영은 굳이 상세 내용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판단, 그저 멍하니 다음 페이지를 클릭한다.
김형석 죽어 08.8.19
다음 페이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 다음 페이지도, 그 다음 다음 페이지도. 그렇게 80개의 쪽지 중 78개가 남자 친구로부터 온 것으로, 쪽지의 내용은 한결같이 ‘죽어’ 두 글자다.
미영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입을 반쯤 벌린 채 모니터만 쳐다본다. 그나마 남아 있던 정마저 싹 사라지는 기분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그 상태로 시간이 조금 흐르자 마치 전기가 흐르듯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극도의 불쾌감, 그리고 모멸감.
어느새 얼굴까지 시뻘게진 미영이 자신의 핸드폰 슬라이드를 거칠게 밀어 올린다. 그리고 1번 버튼을 길게 누른다. ‘우리여보♥’ 라는 글자와 함께 연결중이라는 메시지가 액정화면에 뜬다. 아직도 단축키 1번에 저장 되어 있는 남자 친구의 번호.
뚜우…… 뚜우…… 뚜우…….
언제나 연결 음이 세 번 넘기 전에 받던 남자 친구였다. 그런데,
뚜우…… 뚜우…… 뚜우…… 뚜우…… 고객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십니다. 잠시 후 소리샘에 연결됩니다.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두 번을, 세 번을 걸어도 마찬가지다. 미영이 시계를 확인한다. 12시 58분. 점심시간은 2분 남았다. 미영이 재빨리 마우스를 클릭한다. 클릭한 곳은 쪽지의 ‘답장쓰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