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준비해. 늦을라.”
아침 창밖을 내다보며 긴장을 삭히는 내게, 어머니는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회사에서 보내준 양복은, 검고 단단하고 차가워 보였다. 살짝 빗겨 보면 물결이 이는 것처럼 반짝였는데, 어머니는 양복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좋아하셨다. 뭐, 양복이 대수라고요, 하면서도 긴장과 설렘 섞인 표정을 풀지 못했다.
첫 출근은 챙겨줘야 한다며 다섯 시간 이상 기차를 타신 어머니는 피곤과 멀미, 낯설음에 시달려 낯빛이 검었다. 그래도 안 힘들다며 연신 싱글벙글이다.
나는 가지런히 정리한 머리를 현관에서 다시 확인했고, 어머니는 연신 내 옷에 묻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내셨다.
“우리 아들, 어느새 나이 들어 직장에도 들어가고…….”
염불 같은 말이 어머니의 입가에 조용히 흘렀다.
“아들, 잘 갔다 와.”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한 뒤, 자취방을 나왔다.
버스 정류장은 무표정한 사람들의 둥지였다. 가끔 그들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내 양복만큼이나 차가워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정류장 한 쪽에 서성이다, 그들처럼 손목을 들어올렸다. 8시 26분. 설마 늦지는 않겠지, 걱정이 앞섰다.
‘먼지 없는 도시, 서울을 만들어갑니다.’
버스 옆구리의 광고는 작대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건물 사진을 담고 있었다. 정말일까? 할아버지는 도시에 다녀와서 먼지에 치를 떨었다고 자손들에게 얘기했다. 몇 번 숨을 쉬고 나면 코딱지가 검게 튀어 나온다는 말에,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다. 할아버지는, 우리 같은 사람은 도시에 하루도 살기 힘들다고 겁을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들이쉬는 숨이 깔끔하다. 차들의 엉덩이엔 으레 달려 있을 거라 생각한 배기구가 보이지 않았다. 소리 없이 달려가는 모습에 미래를 무성영화로 보는 기분이 문득 들었다. 유행인 듯 건물들은 크고 검었고, 골목을 삼키며 서로의 몸을 맞댔다.
어느 도시에서 골목을 없애고 있다는 얘기를 슬쩍 들은 적이 있었는데, 직접 보니 성벽에 갇힌 듯 답답함이 일었다. 건물의 반듯한 옥상 위로, 도시의 중앙 쪽에서 하늘로 솟은 구조물이 보였다. 버스 광고의 작대기와 꼭 닮았다. 아마도 그것이 먼지를 잡아먹는 건물인 듯하다.
J1200번 버스가 소리 없이 달려와 멈췄다. 자동으로 열리는 문도 침묵을 유지했다. 사람들은 일어서 쭉 찢어진 버스의 옆구리로 사라졌다.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도 그들처럼 조용조용 버스로 들어갔다.
시야를 벗어날 정도로 커다란 빌딩이 하늘을 가렸다. 나는 하늘을 찾지 못한 채 목이 뻐근해졌다. 버스는 건물 앞에 멈춰 허리를 벌렸다.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한 명씩 버스를 내렸다. 약속한 듯이 왼발로 버스의 계단을 밟고, 오른발로 바닥을 밟았다. 나도 그렇게 했다.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잠깐 잠깐 하품이 나왔다.
매뉴얼을 꺼내 살피며 중얼거렸다.
23번 게이트…….
몇 개의 회전문이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글자가 회전문 위에서 23번 게이트라는 글자가 반짝였다. 사람들 틈에 끼어 회전문을 지나자 마을 제당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순간 내가 먼지가 된 기분이 들었다. 빌딩이 기침을 하면, 나는 순식간에 나가떨어질 것이다.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입을 닿고 얼굴을 문질러 무표정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도시 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매뉴얼을 슬쩍 보고는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찾았다. 엘리베이터는 첫 경험 중에 하나였다. 로비 끝부분에 수없이 늘어선 엘리베이터를 보자 가슴이 후드득 떨렸다. 숨을 진정 시키며 엘리베이터의 이름표를 살폈다.
B343…….
버릇대로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덜 몰려 있는 부분에 글자가 보였다. 나는 얼른 달려가 문 앞에 섰다. 다른 사람들처럼 어깨를 폈고, 혹시 다른 점이 있을까 불안하여 구두부터 쭉 살폈다. 나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은 없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B343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잘못 들어온 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문이 닫혔다. B343 맞을 거야, 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매뉴얼에 나온 대로 3892를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처럼, 사람들처럼, 엘리베이터도 침묵했다.
도착을 알리는 땡, 소리는 간신히 잔잔해졌던 심장을 자극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순간엔 호흡조차 곤란했다. 발가락과 허벅지에 힘을 주며 복도로 걸어 나왔다. 복도는 앞과 좌우, 같은 모양으로 뻗어 있었다. 이상하게 지하 감옥에 들어온 듯한 밀폐감이 엄습했다. 여기가 몇 층이지?
눈에 들어오는 글자는 없었다. 몇 층이라는 정보도 없을 뿐더러, 그 외의 정보도 없었다. 복도는 그냥 시커멓고, 천정에 길게 달린 형광등은 희미한 빛을 흘렸다.
복도 양쪽에 달린 문들이 자신의 팻말로 빛을 반사했다. 팻말의 번호를 하나하나 살피며 걸어갔다. 도중에 눈이 피로해져 질끈 감았다 떴다. 엘리베이터 문이 안 보일 정도까지 걸었을 때, 찾고 있던 팻말이 나타났다.
JE4399 라는 글자는 기분 탓인지 다른 것보다 빛나는 것 같았다.
“그래. 가자. 첫 출근이다. 파이팅.”
가방을 고쳐 잡고, 문고리를 돌렸다.
넓은 사무실에 많은 사람들, 시끌벅적한 분위기, 서류더미들이 지나다니는 어수선함, 여기저기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
그런 것은 없었다.
두 평 남짓한 좁은 방에 철제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책상 위의 전화기 하나, 메모지 하나, 볼펜 하나가 썰렁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책상 앞에는 탁상시계가 놓여 있고, 옆 벽에는 동그란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그 밑에 버튼 하나가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뭐지?
아버지는 직장 동료랑 친하게 지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동료는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뭐하는 곳이지?
자리에 앉아 주위를 살폈다. 커다란 상자 속에 갇힌 듯 좁고 답답했다. 형광등 하나가 천정 중앙에 매달려 있었지만 거무칙칙한 벽이 빛을 흡수하는 것 같았다. 어색한 동작으로 책상 주위를 살피고, 의자 밑면까지 훑어보았다. 도시의 피부처럼 깔끔하고 조용했다.
8시 59분이 되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매뉴얼에 나온 대로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말하세요.”
스피커는 잡음과 중년 남자의 굵은 목소리를 뱉어냈다. 굵고 가래 낀 음성은 우리 집 마당까지 내려왔던 멧돼지를 떠오르게 했다. 멧돼지는 그날, 마을 사람들의 위장 속으로 들어갔다.
“네, 이번에 입사한 한윤수입니다.”
“K34324. 업무 내용을 말해주겠다. 전화가 오면 받는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을 테니까 메모지를 활용하도록. 전화에서 오는 지령을 그대로 하면 일은 끝난다. 그 외에 자세한 사항은 이미 받은 매뉴얼에 나와 있을 것이다. 다른 궁금한 점이 있으면 인터폰 버튼을 누르도록. 이상.”
딸깍.
궁금한 점이 많았다. 우선, 왜 나를 K34324라고 부르는지 궁금했다. 매뉴얼에는 단순히 내가 그렇게 불릴 것이란 사실만 나와 있었다.
따르릉.
드디어 일이 시작되는 건가? 숨을 한 번 내쉰 뒤,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K34234죠? 9시 5분에 89누르고 485에 3535누르세요. 그리고 ‘당신의 아들은 종로역 4번 출구 앞 건물 안에 있다.’라고 말해주세요.”
“네? 다시 말씀해 주세요.”
나는 팬을 들어 남자가 해주는 말을 받아 적었다. 메모가 끝난 뒤, 알겠습니다, 라는 말을 하려는데 전화가 끊겼다. 점멸하는 9와 4를 멍하니 바라보다 수화기를 놓았다.
이걸 왜 해야 하지?
5분이 되자,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메모지에 적은 대로 89, 485, 3535를 눌렀다. 세 번 신호가 가고, 젊은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잠시, 당황하여 머뭇거렸다.
그냥 말해준 것만 언급하면 될까?
“당신의 아들은 종로역 4번 출구 앞 건물 안에 있습니다.”
여자는 비명 섞인 울음을 터트렸다. 이해 못할 말들이 간간이 섞여 나왔다. 나도 모르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졸아든 땀구멍이 끈적한 액체를 흘렸다. 와이셔츠의 겨드랑이와 등 부분이 금방 축축하게 얼룩졌다.
아버지는 모르면 무조건 물어보라 하셨다.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붙잡고 물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엔 전화기 하나와 버튼밖에 없다.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인가?”
“그냥 전화 지령이 온 대로만 말하면 됩니까?”
“K34234, 당연한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뭔가?”
“왜 저를 K34234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제 이름은 한윤수인데요.”
“이 회사에선 코드 명으로 부른다. 한윤수란 이름으로 부르면 혼동이 올 수 있으니까. 이 건물 안에 윤수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자네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 이상.”
딸깍.
상사는 내가 더 물어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말하기 싫어서인지 인터폰을 서둘러 끊었다. 질문을 모아서 한꺼번에 물어볼까, 생각하는 도중에 전화벨이 울었다.
따르릉.
두 번짼데도 심장이 반응했다.
“K34234죠? 89에 5652를 눌러서…….”
나는 메모지에 숫자를 갈겨 적었다.
“9540을 누른 후, 여자가 받으면 ‘강철진을 바꿔달라.’라고 말하세요. 강철진이 받으면 ‘희연의 딸은 시체가 되었다.’라고 말하시면 됩니다.”
“잠깐만요!”
“네?”
“만약에 여자가 자신에게 말하라 그러면 어떻게 하죠? 그리고 강철진이 말을 걸면 어떻게 합니까?”
“어…… 어떻게 하냐고요? 저도 모르는데요.”
수화기로 남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저도 지령을 받은 거라. 그냥 전달해 줄 뿐입니다.”
“누구한테 지령을 받은 건데요?”
“모릅니다. 저 지금 전화할 때가 있어서 그만 끊어야겠네요.”
딸깍.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들고, 번호를 눌렀다. 우선은 일을 해야 하니까. 두 번 신호가 가고,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강철진을 바꿔 주실 수 있을까요?”
“여보! 당신 전화야.”
여자는 남편을 불렀다. 곧 남편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오?”
“희연의 딸은 시체가 되었습니다.”
“야! 너 누구야!”
남자는 거친 목소리를 뱉기 시작했다. 체구가 큰 남자들이 갖고 있는 전형적인 목소리였다.
“이 새끼, 잡히면 죽는다!”
던지듯 전화를 끊었다.
제대로 된 회사에 들어온 걸까?
도시에서도 꽤 좋은 회사라는 말을 들었다. 먼 친척의 소개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무조건 카노피안의 가르침만 따르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뜻이었다.
부모님은 가족 중 한 명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고, 다섯 남매 중에 선택된 것이 그나마 세상에 대한 책을 많이 읽은 나였다. 실체가 없는 기대감이 나를 도시로 향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다.
버튼을 눌렀다.
“뭔가?”
“왜 전화 지령을 받고, 그대로 해야 합니까?”
“우리 일이니까.”
“왜 이런 일을 합니까?”
“이래야 돈을 버니까.”
상사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이해가 안 가는데요.”
침묵 사이에 상사가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자네……. 아직 K4543 조치에 대해 모르나?”
“모릅니다.”
“그럼, LK2223 혁명에 대해서도 모르고?”
“모릅니다.”
“이력서에 나온 출신 때문에 조금 걱정했는데 역시 그렇군. 어쨌거나, 하나씩 배우면 되니까.”
“이 회사엔 몇 명이 일하죠?”
“10명 정도? 아니, 사장이 하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럼 11명이군. 어쩌면 더 많을지도…….”
“11명이라뇨? 건물이 이렇게 큰데요?”
“건물 하나에 회사 하나만 있으라는 법 있나? 이 빌딩, YE49에 입주한 회사는 5000개가 넘어. 우리는 5000개의 회사 중 하나일 뿐이고. 어쩌면 회사가 1만 개도 넘을지도 모르지. 내가 갖고 있는 정보는 5년도 넘은 것이니까.”
“저는 전화 받고 거는 일만 하는데, 어떻게 월급을 받는 겁니까?”
“그럼 뭘 해야 월급을 받나?”
“짐을 나른다든가, 아니면 농장에서 일한다든가.”
“이것과 그것이 다른 점이 뭔가?”
“그게……. 잘은 모르겠지만, 누구를 도와주는 것 같지도 않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일을 하는지 꼭 알아야 일인가? 쟝 자크만이 말한 것 모르나?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1퍼센트도 알지 못해. 자넨 시골출신이라 잘 모르나 본데, 그냥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그래도……”
따르릉.
앞에서 전화벨이 울었다.
“전화 일 끝난 뒤에 연락하게.”
딸깍.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댔다.
“K34234죠? 89, 3439, 9989로 전화해서, ‘A45 호수공원에 윤다인이 올 테니 택시에 태워라.’라고 말해주세요.”
나는 수화기를 내렸다 올리고 그가 말한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A45 호수공원에…….”
“이봐!”
남자가 말허리를 자르며 절박한 목소리를 뱉었다.
“나는 하라는 대로 했어. 윤다인의 부모도 죽였단 말이야! 더 뭘 하라는 거야! 왜 나를 괴롭히는 거냐고!”
“전……. 그냥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거기 어디야? 어디냐고!”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팬을 잡고 있는 손에 땀이 고였다.
“A45 호수공원에 윤다인이 올 테니, 택시에 태우세요. 전달 끝났습니다.”
빠르게 말을 던지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땀이 수화기에 얼룩졌다.
버튼을 눌렀다.
“여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곳인지 궁금합니다.”
“세상 사람 다 아는 얘기를 꺼내는 게 참 기분이 이상하군. 자네가 신참이니까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두 번 설명 안 하니까, 잘 듣고, 메모해도 좋고. 여기가 전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 지 궁금하지?”
“네.”
“미안하지만, 나도 궁금해.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잘 몰라. 내가 생각하기엔 이 건물 안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할 뿐이지.
방이 있으면 일이 생긴단 말이야. 참 신기한 일이지. 우리는 그냥 톱니바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돼. 톱니 역할을 하는 거니까 급료를 받아 마땅하지. 톱니로 무엇을 돌리는지 우리는 알 권한이 없다고 봐야지.
첫 주가 지나면 자네한테 코드표가 주어지고, 복잡한 지령을 간단하게 보내는 방법을 배우게 될 거야. 2주 뒤엔 핸드폰이 제공될 테고. 자네는 그냥, 열심히 배우고 하란 대로 하기만 하면 돼.”
“그래도……. 누군가 전체적으로 관리하지 않는다면 엉망이 될 텐데요.”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집단이 아니야. 가이아 이론이라고 들어봤나? 그 원리를 우리는 몰라. 아마 엄청 복잡하겠지.
어쨌든 우리가 몰라도 생태계는 돌아가고 있지 않나? 세포 하나를 예로 들어볼까? 이것은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 상사가 말해줬던 얘기야.
우리 몸엔 세포들이 엄청나게 많잖아. 그렇지? 그것 하나하나를 생명체라고 가정해 봐. 그것들이 모인 집합체를 인간이라 부르고. 세포 하나하나가 인간이 하는 사랑이나 갈등, 다툼 등에 대해 신경이나 쓸까?
그들은 단지 피를 통해 들어오는 영양분을 받고, 쓸 수 있는 형태로 변화시켜 살아남는데 쓰지. 남은 쓰레기는 다시 피를 통해 배출하고. 그런 행위만 해도 복잡한데, 전체가 돌아가는 원리를 어떻게 알겠어?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세포 하나라고 보면 돼. 어쨌든 다른 곳보다 급료는 높잖아.”
따르릉.
“전화 받고, 또 궁금한 것 있으면 버튼 누르라고.”
딸깍.
“K34234죠? 9, 43, 2211로 연락 하세요……. 다 적으셨죠? 받을 직원이 J19393이예요. 그 직원한테……. 지금까지 다 적으셨죠? 그 직원한테 ‘89, 665, 4646으로 전화해서 윤다인에게 단도를 전달하라.’라는 지령을 내리라 말하세요.”
“윤다인이라면, 공원에 갔던 윤다인 말인가요?”
“저는 전달만 하는 거라 모르는데요.”
딸깍.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지령의 결과에 대해서는 일말의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9, 43, 2111. 번호를 눌렀다. 건조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J19393이죠?”
“네.”
“89, 665, 4646으로 전화해서, ‘윤다인에게 단도를 전달하라.’라고 말하세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 칼을 전달하라는 이상한 지령 따위나 전달하고 있고…….
따르릉.
“네. 전화 받았습니다.”
“K34234죠? 식사는 12시에 배달됩니다. 오후 1시에 청소부가 치워갈 테니까 문 앞에 놓으시면 됩니다.”
“거긴 어디죠?”
“여기요? 여기는 UL434 방인데요.”
“식사와 관련된 일을 하시나요?”
“네? 아니요. 그냥 전화 받은 걸 전달할 뿐인데요.”
딸깍.
탁상시계는 9와 45라는 글자를 내비쳤다.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중 45가 46으로 희미하게 변해갔다. 고개를 숙였다 드니, 이미 10시 8분을 넘어가고 있다. 잠이 들었던 것일까?
시간을 도둑맞은 기분이 든다.
따르릉.
“네.”
“K34234죠? 89, 435, 3328로 전화해서 ‘정민구의 뇌를 꺼내, 냉동실에 넣어라.’라고 전달해 주세요.”
“네?”
“아……. 89, 435…….”
“아니요. 뇌를 어떻게 하라고요?”
“냉동실에 넣어 놓으라고요.”
“왜요?”
“저는 그냥 전달만 하는 거라 모르겠는데요.”
딸깍.
번호를 누르려다 멈추고, 만약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생각해 보았다. 혼란이 일어날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세포 하나가 이상해진다고 몸 전체가 변하진 않으니까. 이상해진 부분을 수정하려고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 어떤 식으로 조치가 취해질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임에 틀림없다.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리고 이곳을 소개시켜 준 먼 친척들에게도 면목이 없지만, 일을 계속하긴 그른 것 같다.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뭔가?”
“이상한 지령이 왔습니다.”
“뭔가?”
“정민구의 뇌를 꺼내 냉동실에 넣으라는 지령을 전달하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지 않나?”
“아니, 어떻게 사람의 뇌를 꺼내라는 말도 안 되는 지령을 전달합니까?”
“정민구가 사람인지, 아닌지 자네가 아는가? 그리고 뇌라는 것이 머리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암호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 않나. 그 뜻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림짐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지령에 자신의 판단을 넣는 것도 어리석고.”
“어쨌든, 일을 오래 못할 것 같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사표를 내는 건가, K34234. 매뉴얼을 읽었으면 알겠지만, 사표는 하루 노동을 끝낸 다음에야 낼 수가 있네. 첫 날 사표를 안 내면 자동으로 기업법 제321조항에 따라 10년 간 의무 근무를 해야 하고.”
“네, 그것에 대해선 읽었습니다.”
“그럼 어쨌든 오늘 근무를 마치고 사표를 내면 돼. 메모해 놓게. 끝날 때 7, 323, 5213로 전화해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사표는 수리되는 거야. 어쨌든 회사 그만 둔다고 오늘 일을 소홀히 하지 말게.”
“번호를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7, 323, 5213, 다 받아 적었나? 이상!”
딸각.
나는 상사가 말한 번호를 메모지에 적어 주머니에 넣었다. 다른 메모랑 분리해야 하니까. 어느새 전화기 왼편엔 번호가 가득한 메모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89, 435, 3928 번을 눌렀다. 여자가 전화를 받자 곧바로 지령을 전달했다.
“여보세요. 정민구의 뇌를 냉동실에 넣으세요.”
낮은 흐느낌이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니…… 하란 대로 다 했잖아요. 더 이상 뭘 하란 말이에요!”
여자는 오열하며 소리쳤다.
“전……. 그냥 전달만 할 뿐입니다.”
딸각.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사도 모른다고 했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인가?
따르릉.
“K34234죠? 89, 432, 2111로 전화해서, 고상구에게 ‘내일 처형입니다.’라고 말해주세요.”
“제가 안 하면 어떻게 되죠?”
“아……. 뭐라고요?”
“제가 그곳으로 전화 안 하면 어떻게 되냐고요.”
“전 모릅니다. 어차피 제 일은 끝났습니다. 전화를 하고 안 하고는 그쪽 선택인 것 같네요.”
딸각.
처형이라……. 처형을 명령하면서도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래도 처음이 있을 것이다. 시작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지령을 전달할 수밖에.
89, 432, 2111 번을 눌렀다.
“고상구 씹니까? 내일 처형입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나방의 날갯짓 마냥 떨렸다.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세요…….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냥 전달을 할 뿐입니다.”
“다시 회사 나갈게요. 사표 따위는 다시 내지 않을게요.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전화를 끊으려다 사표라는 말에 손이 멈췄다. 다시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사표라니요? 사표를 낸 것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까?”
“아마도요……. 다른 잘못이 없으니까요…….”
“자세히 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사실은 오늘이 첫 출근이거든요.”
“아……. 그렇군요. 저도 한 달 전에 첫 출근을 했습니다. 그날 사표를 냈죠. 그런데 회사를 나온 다음 날부터 전화가 오는 거예요. 어디로 가라. 저리로 가라. 이런 식이었죠. 뭐냐고 물어보면, 다들 전달만 할 뿐이라고. 당연히 전화에서 하라는 대로 안 했죠.
그러니까, ‘아내가 죽는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당연히……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혹시나 해서 아내 곁에 있었죠.
그런데 밤에 강도가 들었어요. 보니까,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인데, 아내를 끌고 나갔죠. 내가 왜 그러냐고 소리치자…… 그냥 지령이 있었다는 말만 남겼어요.
나는 몽둥이에 맞아 기절했죠. 깨어난 후 경찰에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은 경찰은 내게, ‘조용히 옥상으로 올라가라.’ 라는 거예요. 내가 뭐냐고 그랬더니, 지령을 받았데요. 고상구에게 전화가 오면 조용히 옥상으로 올라가라고 말하라는…….”
“아내는 어떻게 됐나요?”
“이틀 뒤에 토막 난 채 발견됐어요. 밖을 떠돌다 돌아와 보니, 거실 한가운데 비닐에 싸여 있었어요. 썩은 고기들 토막 내 버리는 거 있잖아요. 딱 그런 모습이었죠. 조금 뒤 청소부들이 들어와 비닐을 가져가는데, 그냥 지령을 받았데요. 이런 제기랄…….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옥상엔 올라갔나요?”
“안 올라갔어요. 당연히 안 올라갔죠. 그놈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데.”
“그놈들이 누구죠?”
“몰라요……. 제기랄…… 돌겠어요…… 전화 오는 놈들도 다 다르고……. 물어보면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미안하네요. 저도 드릴 말씀이 없어서…….”
“어쨌든 놈들은 저를 처형할 생각인 것 같네요. 그걸 알려주는 것을 보니, 이미 내가 숨어 있는 곳을 아는 것 같네요. 결국엔…… 죽는 건가…….”
딸각.
고상구가 전화를 끊었다. 그가 다니던 회사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다시 다이얼을 돌렸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순 없었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꾹 눌러 문질렀다. 고상구가 단순히 사표를 낸 것 때문에 이런 불행을 겪었다면, 내가 사표도 보류를 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사표 때문일까? 나와 같은 일을 했다면, 비밀을 유출했던지 지령 전달을 잘못했던가. 어쨌든 뭔가 실수가 있었을 것이다.
따르릉.
직원에게 전달 사항 두 번, 어린 아이에게 전달 한 번, 노인에게 전달 한 번.
딸각.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2시가 되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비슷한 양복의 남자가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 나는 그가 건넨 도시락을 책상 위에 놓았다.
“원래 도시락을 배달하는 일을 하십니까?”
남자는 나가려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지령이 내려와서 하는 거예요.”
남자가 문을 닫자 나는 도시락을 열었다. 네 개의 칸을 음식물이 메우고 있었다. 맛은 별로였으나, 5분도 지나지 않아 도시락을 비웠다. 빈 도시락을 복도에 놓아두고, 책상에 엎드렸다. 긴장에 이은 포만감은 졸음을 낳는다.
따르릉.
눈을 뜨자마자 시간을 확인했다. 1시 10분. 눈을 비벼 눈곱을 밀어 빼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K34234죠? 89, 4848, 3821에 전화해서 ‘눈을 찌르는 것은 드라이버가 아니라 송곳이다.’라고 말해주세요.”
“잠깐만요!”
잠이 확 달아났다.
“뭐죠?”
“눈을 찌른다고요?”
“저는 잘 모릅니다. 그냥 전달만 할 뿐이에요.”
“잠깐만요. 끊지 마세요. 그냥 그쪽의 생각을 묻고 싶어서 그러는데, 이렇게 드라이버가 아니라 송곳이라는 지령은 어떨 때 생기는 거죠? 그냥 추측이라도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마, 지령이 잘못 전달되었을 때나, 아니면 드라이버로 찌르면 다음 지령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을 때, 이런 지령이 나오는 거겠죠.”
딸각.
눈을 찌른다니……. 손가락 끝이 부르르 떨린다.
89, 48……, 48, 382……, 1.
수화기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십대 초반이거나, 아니면 더 어릴지도 모른다. 분명히 몇 개의 지령으로 정신이 난도질당한 상태일 것이다.
“눈을 찌를 땐 드라이버가 아니라, 송곳을 사용하세요.”
훌쩍임이 있었지만, 여자는 또렷이 말했다.
“정말……. 어머니 눈을 찔러야 제가 살 수 있는 건가요?”
어머니?
어머니 눈을 찌르는 것이라면 불가능한 지령이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여자는 어머니 눈을 찌를 각오가 되어 있는 듯했다. 무엇이, 불가능한 지령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일까?
오히려 내 목소리가 떨렸다.
“모릅니다. 저는 그냥 전달할 뿐입니다.”
“알았어요. 한 시간 내로 할게요.”
딸각.
한 시간 내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번호를 꾹, 꾹 눌렀다. 통화 중이라는 메시지가 뒷목을 날카롭게 쑤시는 것 같았다.
지령이 진지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후에 온 지령 중에는 ‘피자 주문을 대신 해 달라.’, ‘우는 아이를 달래 달라.’, ‘골목에서 우회전하는 것을 잊지 말라.’ 등, 가벼운 것도 있었다.
사각의 플라스틱으로 둘러싸인 4와 6을 멍하니 바라보다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상사는 처음과 같은 톤의 목소리를 뱉어냈다.
“뭔가?”
“지령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지령에는 이유가 있고, 시작을 만든 사람이 있을 겁니다. 시작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여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고 있을 겁니다. 혹시 아십니까?”
“쓸데없는 생각들을 많이 했군. 지령이 몇 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하나?”
“많으면 3, 4단계?”
“내가 이곳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바로는, 지령이 100단계 이상이라는 거야. 자네가 나중에 받게 될 책 속에는 복잡한 지령을 조합해서 간단하게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어. 인간의 머리로는 그 퍼즐의 비밀을 알 수가 없지. 코드집도 자주 바뀌거든.
우리는 그냥 책을 뒤적여 지령을 따를 뿐이지. 그런 어지럽고 혼란스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지령 자체가 생명체가 되는 것 같아. 사람의 입과 코드집을 오가면서 조금씩 변하고, 스스로 살아남으려 노력을 하는 거지. 뭐, 우리들과의 관계는 공생이라고 보는 게 마음 편할 거야. 혹시, 아드레한드로라는 학자를 아는가?”
“얼핏 들어봤습니다.”
“지령도 아드레한드로가 말한 것처럼, 생명체야. 스스로 살아남으려 하고 진화하지. 지령이 왜 자꾸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나? 지령을 만드는 것은 지령이야. 그것을 깨닫는데 5년이 걸렸어. 어느 순간 내가 지령을 만들어내는 수도 있더라고.
그렇게 내 입에서 시작된 말이 백 개 이상의 입을 거치면서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 움직이고 뭔가를 이뤄내는 거야. 지령 자체가 살아남기 위해 하는 일들은 신비하기보단 잔인하지.
지령들은 인간이 두려움에 약하다는 것을 잘 알아. 그래서 그것을 이용해서 지령을 생산하게 만드는 거지. 지령은……. 아니, 여기까지만 말해 두는 것이 좋겠군. 많이 안다고 좋은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대항은 안 하는 게 좋아. 자네만 다치니까.”
딸각.
지령이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믿기 힘들다. 도시의 삶을 잘 모르지만, 속고 속이는 일이 많다는 얘기는 책에서 읽었다. 이곳에 오면서 도시에 속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퇴근 시간은 두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6시가 되면, 상사가 준 번호로 전화를 할 것이고,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전달할 것이다.
따르릉.
잠깐의 침묵을 깨며 전화기가 울었다.
“네.”
“K34234이죠? 지령 혼란 유도로 ‘주의 조치’가 내려짐을 알려드립니다.”
“주의 조치라뇨?”
“잘 모르겠습니다.”
“잠깐만요. 그럼 제가 메시지 전달을 잘못했다는 건가요?”
“저는 잘 모릅니다. 그냥 전달할 뿐입니다.”
어차피 더 이상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 돌아올 게 뻔하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실체가 불분명한 불안감이 가슴과 겨드랑이를 조였다. 어릴 적, 늑대 계곡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뭔가?”
“제게 주의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결과가 있다면 원인이 없을 리 없지. 아마도 뭔가 잘못한 게 있을 거야. 잘 생각해 보라고.”
“별로……. 생각나는 게……. 주의 조치가 내려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