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과 아가씨와 나

  • 장르: 판타지, 호러 | 태그: #경성 #아가씨 #도련님 #괴물
  • 분량: 177매 | 성향:
  • 소개: (작품 제목을 수정했습니다. 이전 제목은 <生(생)의 讚美(찬미)>였습니다.) 1930년대 경성. 호텔 다정(多情)에 손님이 찾아온다. 더보기
작가

도련님과 아가씨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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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윤심덕, <死(사)의 讚美(찬미)>

석남이 대청마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자그마한 손을 마주 쥐고는 꽃담 근처로 종종거리며 다가갔다. 발뒤꿈치를 들고 귀를 기울이는 자태가 반듯했다. 한 바탕 설거지를 해치운 뒤인지 치마에는 군데군데 물방울이 튀어 있고 머리는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석남은 손쓸 수 없는 곱슬머리였다. 게다가 때는 6월, 바느질감을 끌어안고 앉은 채로 든 낮잠 속으로 처마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섞여 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장마철이었다.

“분이오. 분 사시오. 박가분, 박가분 사시오.”

틀렸다. 이번에도 아니었다. 발소리에 잇단 까랑까랑한 말소리의 주인이 방물장수임을 깨달은 석남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세게 한번 발을 굴리더니 쥐고 있던 치맛자락을 놓았다.

“어서 구경들 해보시오. 질 좋은 비단실이랑 연지, 머리 기름도 있다오.”

담장 밖에서 방물장수가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석남이 행랑채 마루 끝에 냉큼 도로 걸터앉았다. 방물장수의 외침일랑 듣는 둥 마는 둥 한숨을 쉬며 대문 쪽으로 다시 시선을 던졌다. 그래서 대관절 언제 온다는 거야? 그놈의 도련님인지 뭔지 나타나기만 해봐라. 사람을 몇날며칠을 기다리게 만들 작정인지.

석남은 백분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를 좋아했지만 희고 고운 그 가루를 손가락에 살짝 찍어 묻혀보기만 했을 뿐 물에 개 얼굴에 발라본 적은 없었다. 석남이 받는 월급으로는 박가분 같은 화장품을 구입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렇다고 물을 긷거나 마당을 쓸고 마루를 닦는 등 자질구레한 일을 맡아 하느라 늘 바쁜 이 소녀에게 비단에 자수를 놓는 따위의 취미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늦은 오후, 그러나 저녁상을 차리기에는 다소 이른 무렵. 북촌은 고즈넉했다. 호텔 다정(多情)은 그다지 인기 있는 숙소는 아니었다. 이름만 호텔이다 뿐 손택호텔이라든가 조선호텔 같은 곳들과는 전혀 달랐다. 지난 몇 년 동안 경성에는 신식 호텔이며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여관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기와집을 개조해 만든 이 호텔은 대청에 유리문을 설치하는가 하면 곳곳에 전기등을 달아놓기는 했으나 여전히 예스러웠다. 구들장에 군불을 뗐고 식사 역시 소반에 차려 올렸다. 정원 역시 연못을 따로 조성하거나 가지치기에 공들이지 않고 계절에 따라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낙엽이 떨어지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래도 방들은 널찍널찍했으며 보슬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문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제법 운치 있었다.

다만 최근 신축된 가옥의 일부가 골목 어귀를 가로막다시피 해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 방물장수처럼 이 근방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아니면 여간해서 찾기 힘들다는 난점은 있었다. 그 같은 집들은 이층으로 지어진데다 길을 면한 벽에 창을 트고 지붕을 뾰족하게 세워 내밀한 맛이라곤 없이 상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듣고 오는지 손님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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