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처럼 희고 연기보다 하얀 벽을 본다. 바위보다 무겁고 얼음처럼 단단한 침묵을 지킨다. 나는 이 밀폐된 암자에 유폐되었다. 하루 종일 면벽하고 묵언수행을 한다. 흰 벽은 새벽의 푸른 빛을 온몸으로 받아냈다가 저녁이면 붉은 빛을 토해낸다. 벽을 마주하면 어느새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의 얼굴이 그려진다. 그 얼굴을 몰아내려 도리질을 하고 눈을 감아도 얼굴은 끝까지 내 눈꺼풀 안에 숨어 떨어지지 않는다. 난초처럼 청초하고 연꽃처럼 고고한 얼굴. 손끝으로 내 얼굴을 더듬어 본다. 어머니는 내 얼굴과 어디를 얼마나 닮았을까. 어머니는 어디 계실까. 어머니도 내가 보고프실까. 아니면 이미 연등을 들고 탑돌이를 하던 사람들 중에서 내 얼굴을 훔쳐보고 가셨을까.
내 어머니는 한낱 궁인이라고 했다. 폐하께서 즉위하실 적에 폐하의 형제들은 사사되거나 유배되거나 출가당했다. 나는 어머니가 호족의 딸이 아니라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젖이나 다 떼었을까 싶은 어린 나이에 가사와 장삼을 입었다. 매일 경을 읽고 명상을 한다. 파르라니 머리를 깎는다. 속세와 유리된 산 속 작은 절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나는 아직도 산 아래 세상을 기웃거리고 암자에 앉아 대숲 속에서 사슴이 해금을 켜는 소리를 듣는다. 암자의 흰 벽에 또래의 사내들처럼 각시와 농사를 짓고 어린 것을 안아 올려 재롱을 보는 상상을 그린다. 그럴수록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고 흰 벽을 노려본다. 모든 게 깨끗하게 지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노을이 내려앉던 어느 날, 주지스님이 부르셨다.
“찾아온 손님이 계시니, 모시거라.”
대웅전 앞 마당에 불꽃처럼 노을이 타올랐다. 옥으로 깎아 만든 듯 희고 고운 사람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얼굴을 만지면 차갑고 매끄러울 것 같았다.
“유비자(有非子)입니다.”
미성의 목소리가 귀에 감겼다. 족하께서 유비자라면 나는 무시옹(無是翁)인가. ‘유비자’나 ‘무시옹’이나 둘 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법명을 발음했다.
“’정윤’입니다.”
왕후의 아들을 의미하는 ‘정윤’과 같은 음이었다. 유비자의 시선을 따라 간 대웅전에는 여인이 있었다. 먹구름처럼 풍성한 머리채를 금으로 장식하고 수 놓은 비단옷을 입은 인형 같았다. 유비자가 가만가만 속삭였다.
“선우 씨의 따님이십니다.”
선우 씨라면 유력한 호족의 따님이었다.
“척리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입궁하신지 오래 되셨으나 아직 회임을 못 하시어 백 일 동안 불공을 드리러 오셨습니다.”
“왜 회임을 못 하시었습니까.”
“초야 이후로 폐하께서 찾지 아니하셨습니다. 궁에는 호족의 딸이 많고 많습니다.”
“폐하께서 영영 궁주 마마를 찾지 아니 하시면 어찌 되십니까.”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족하께서는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선우 씨 집안의 사병으로서 선우 씨의 따님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성큼 대웅전으로 올라섰다. 부처님 앞에서 여인이 한 번 절 할 때마다 염주알을 굴렸다. 백팔, 이백십육, 삼백 이십 사…여인은 한 시진 넘게 쉬지 않고 꼬박 천 팔십 배를 했다. 이 절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니고 있던 염주 팔찌는 이제 너무 낡아서 열 바퀴를 돌리자 끈이 끊어져 버렸다. 대웅전 바닥에 염주알이 후두둑 떨어졌다. 절을 마친 여인이 염주알이 떨어져 구르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황급히 대웅전 바닥을 기어 다니며 염주알을 주웠다. 여인의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유비자가 비단 수건으로 여인의 땀을 닦아주었다. 노을은 이제 보랏빛으로 잠들어가고 머룻빛 하늘엔 은빛 별들이 보석처럼 빛났다. 나물반찬과 된장국으로 늦은 저녁을 차려 냈다. 궁에서 드시던 음식에 비하면 초라한 밥상이었다. 절간에는 여분의 수저가 없어 분지나무로 깎은 수저를 여인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유비자가 분지나무 젓가락을 가져다가 자기 밥그릇에 꽂고 봇짐에서 은수저를 꺼내 여인에게 드렸다.
“부처님의 자비가 사찰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이름난 절에서 치성을 올리시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왜 굳이 이런 산골짜기에 있는 조그만 절까지 먼 걸음하셨습니까.”
“용의 후손을 낳아야 합니다.”
여인이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 먹은 밥상을 들고 나갔다. 여인은 나를 따라 암자까지 좇아왔다. 유비자가 뒤를 따랐다. 유비자는 문 밖에 남고 여인은 암자에 들어와 요를 깔고 이불을 덮었다. 기가 차서 말을 던졌다.
“불공을 드리러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인은 나를 똑바로 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여인의 눈에 내 눈동자가 어떻게 비칠지 궁금해졌다.
“홀로 절에서 백 일간 치성을 드리면 회임을 한다는 게 뭘 의미하겠습니까.”
상의를 벗어 옆구리를 보여주었다.
“이걸 원하십니까.”
손가락으로 가리킨 자리에 비늘이 있었다. 왕 씨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피부였다. 이 비늘을 두고 왕 씨는 용의 후손이라고들 했다. 여인은 손을 뻗어 비늘을 하나하나 만져 보았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만일 백 일 내에 회임하지 못 하신다면 어찌 됩니까.”
“유비자가 저를 베고, 선우 씨의 다른 딸을 다시 궁에 들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