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0.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어떤 것도 의도된 바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적어도 우리가 의도한 바는요.
그 순간엔 악의도 고의도, 선의도 없었어요. 현상이 있었을 뿐이죠.
기록 1.
우리가 어쩌다 여기까지 도달했는지는 지금 저를 조사하시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더 자세한 증언이 필요할 것 같진 않네요. 했던 얘기를 또 하는 거잖아요.
네? 번거로워도 그게 절차상의 문제라고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처음부터 다시 얘기하는 수밖에요.
제가 약간 복잡한 얘기를 해도 이해해주세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저도 머리를 좀 써야 하거든요. 가끔은 말이 안 되는 구간도 있을 거예요. 그것도 이해하셔야 해요. 아니면 보고서에 쓰실 때 좀 과한 부분은 적당히 지우시던가요.
다차원 연구를 통해 3차원 외의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 건 꽤 오래전의 일이죠. 수많은 양자 충돌 실험 끝에 ‘중력이 새어나가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학계가 뒤집혔던 기억이 납니다.
하긴 이상했죠.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른 힘에 비하면 중력이 가지고 있는 힘은 10의 -39승 수준 정도에 불과했으니까요. 0.000000…(39개의 0과) 1.
컵을 떨어뜨리는 행위만으로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으면서도 다른 힘들보다 약하기 짝이 없었거든요. 희한하죠. 하물며 그저 간단히 제자리에서 뛰거나 트램펄린 위를 뛰는 행위만으로도 지상의 중력은 잠깐이라도 거스를 수 있는 문제였어요. 왜 이렇게 약한 힘만 남아있을까? 그래서 그 질문은 유구한 질문이었어요.
‘그 많은 중력은 다 어디로 갔지?’
분명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어디선가 중력 누수가 일어나고 있고, 그건 우리가 있는 3차원 공간이 아닌 다른 차원으로의 누수일 거라는 가설은 학계에 늘 존재해왔어요.
결국, 우리 세대에서 답을 얻어낸 거죠.
다른 차원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요.
정확히는 그간 이론으로만 정립되어 온 것을 실체화한 것에 가깝겠군요. 아인슈타인은 이미 4차원을 이론으로 정립한 적이 있고, 여러 세대에 걸쳐 다른 힘에 비해 약한 중력에 대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초끈이론까지도 나왔었으니까요.
그래요. 결국 그간 이론만 무성했던 것이 일부나마 우리가 인지 가능한 현실로 정립된 겁니다.
그리고 조우가 일어났죠.
기록 2.
3차원에 생명체가 있다면 다른 차원에도 생명체가 있을 수 있다는 건 문장만 놓고 보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3차원은 인간들이 입체와 형태를 유지하고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이죠. 그럼 다른 차원은? 우리가 쉽게 인지할 수 없는 다른 형태와 방식이 있는 차원. 거기에 생명체가 있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처음부터 무수히 많은 생명체의 차원 속에 존재하는 하위 그룹일까요?
처음 조우를 잡아낸 건 미국이었어요. 중력 누수 실험을 재검증하는 과정을 통해서였죠. 그들이 이전의 양자 충돌 모델을 시뮬레이션하는 도중에, 무언가가 그들과 접촉했습니다. 처음엔 실험에서 생긴 오류라고 여겨졌어요.
근데 검증을 반복할수록 오류가 아닌 확증이 되어갔죠.
곧 같은 검증을 벌이던 세계 곳곳의 연구소에서 같은 보고가 올라왔어요.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차원에 있는 존재에 관한 얘기였죠. 첫 번째 조우는 우주의 녹색 외계인이 아닌 차원의 단계에서 일어났다는 게 퍽 흥미로워요. 하지만 어쩌면 그것 또한 외계와 접촉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어쨌든,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반응하기 시작했어요. 그것도 꽤 적극적으로. 놀랍게도 대부분의 교류는 그들의 주도로 이뤄졌는데,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어요.
2차원 평면에 그려진 그림은 3차원의 인간을 인지할 수 없지만 3차원의 인간은 2차원 그림 위에 무언가를 더 그려 넣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딱 들어맞는 설명은 아니지만, 이게 그나마 제일 간단한 비유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우리는 그들을 대체로 그림자로 인지했어요. 이것도 일종의 비유죠.
그들의 그림자를 말 그대로 육안으로 보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원기둥도 원뿔도 구체도 어떤 각도에서는 모두 동그란 그림자를 만들 수가 있잖아요. 우리는 그저 그림자를 보고 저게 원뿔인지 원기둥인지 구체인지를 추측하는 거고.
소통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이 전하면 우리가 일부를 해석하고, 어떻게든 개념을 이해하려 애쓰고. 이게 원기둥인지 원뿔인지 구체인지, 어떻게 그들과 우리의 차원이 중첩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고요.
이 과정에서 과학계는 물론이고 종교계마저 들끓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고차원에 존재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은 명백했고, 고차원에 존재하는 상위의 존재를 신이라고 해석할 여지는 충분했으니까요.
누군가는 그 고차원이 사후세계고, 우리는 지금 죽은 사람들과 연결된 거라는 이야기도 했어요. 그 가설에도 많은 이들이 열광했었고요. 말도 안 되는 인터넷 토론부터 진지한 종교 철학적 담론까지 모든 차원의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진짜 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신중하고 회의적이었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사실 꽤 많은 수의 이들이 그 존재를 신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죠.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이요.
결론적으로 첫 번째 조우가 이뤄진 지 3달 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중력의 누수를 가장 처음 알아낸 LHC, 유럽입자물리연구소 근처로요. 스위스와 프랑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죠.
마침 LHC에서는 몇 번의 소규모 빅뱅재현실험을 통해 우주 탄생 당시의 입자들을 연구해본 전적이 있으니 그야말로 맥락상 최적의 장소였어요. 게다가 그곳에선 더 큰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었으니까요. 뭔지 아시죠?
네. 신의 현신(現身)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