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가을 초저녁, 그러니까 뉘엿뉘엿 저물던 해가 어느새 모습을 감추고, 연보라색 어둠이 텅 빈 하늘에 야트막히 내려앉을 무렵, 메마른 나뭇가지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달려있던 누런 잎사귀 하나가 잔바람에 톡 떨어져 허공을 부유하다가, 쌓여있는 낙엽들 위로 힘없이 추락하는 그런 초저녁, 여기 어느 자매가 낯선 언덕길을 지나다가 도적들과 맞닥뜨려 곤경에 처하였다.
도적들이 흉기를 겨누고 위협하며 가진 전부를 내놓으라 윽박질렀다. 허나 자매의 수중에는 얼마 없는 푼돈과 몇 줌의 미숫가루가 전부인 마당이라, 이마저도 없어지면 꼼짝없이 굶어야했다. 자매가 응하지 않자 부아가 치미는지 도적들은 거친 언사로 험악하게 굴었으며, 그러는 한편 위아래로 은근슬쩍 자매를 연신 훑어보며 음흉한 기색을 내비쳤다.
자매 중 언니인 계연은, 비록 몸은 가냘프되 머리가 영민하였다. 입을 다물고 표정을 담담히 하며 침착하게 머릿속으로 이모저모 방안을 궁구하니, 비록 젊음과 어림 그 사이 어딘가에 걸쳐있는 나이였으되 그 차분함이 진중하여 일견 근엄한 느낌을 자아냈다.
자매 중 동생인 진미는, 비록 동생이되 언니보다 크고 튼튼한 몸에 혈기가 왕성하였다. 도적들의 협박하는 말에 꼬박꼬박 대꾸했으니, 이를 두고 물론 부질없는 객기라 폄하할 수도 있겠으되 적의에 찬 눈빛이며 자아내는 공기며 범상치가 않았으니 실로 대단한 기백이었다.
이때 홀연 감미로운 목소리가 “멈추어라!”하고 호통을 쳤다. 자매와 도적들이 고개 돌려 살피니, 한 청년이 천천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청년(이라고 해야겠지만 어딘지 소년 같은 느낌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 그런 청년, 그러니까 말인즉 그런 식으로 아름답게 잘 생긴 어느 청년)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접힌 부채를 한 손으로 쥐고는 그 끝으로 도적들을 겨누며 엄히 꾸짖었다. 그 자태가 희한하게도 우아하고 단정하였다. 꾸짖음을 다 하고서는 자매에게 눈길을 옮겨, ‘이제 안심하시어도 좋다’라는 의미로 가벼이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눈이 웃는 그 모양새가 밤하늘 구름 사이로 다소곳이 떠올라 은은하게 빛나는 초승달마냥 가늘고 고왔다.
도적들로서는 우스운 정도를 넘어 어이가 없었으니, 체구도 작거니와 얼굴도 반반하니 뉘 집 도련님 소리나 들으면 적당할 놈이 별안간 나타나서는 나이 먹은 영감들이 젊은이를 상대로 야단치는 그런 말투로 자신들을 다그치기에 그리 느끼는 게였다. 게다가 변변한 무기도 없는 주제에 고작 부채 하나를 꼬나 잡고 엣헴거리는 꼬락서니란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것이라.
이에 도적 무리 중 한 놈이 어이가 없다는 듯 가소롭다는 듯 일견은 매우 건방지다는 듯 짧게 코웃음 뱉고서 청년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자매가 ‘이렇게 사람 하나 죽게 생겼구나’ 하는 마음에 저희들도 모르는 사이 눈을 찔끔 감으려는 찰나,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청년이 물 흐르듯 칼을 피하고는 순식간에 손발을 놀려 도적놈을 때려눕히는 게 아닌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머지 무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아무도 청년을 해하지 못하였다. 도리어 청년에게 반격을 당했으니, 우수수 쓰러지는 그들의 모습이 말 그대로 가을날의 낙엽이어라.
이제 보니 청년의 부채는 보통의 부채가 아니요 쇠붙이를 붙여 만든 쇠부채(鐵扇)였으니, 청년은 쇠부채를 펼쳐 방패처럼 쓰다가 다시 쇠부채를 접어 몽둥이를 쓰듯 휘두르기도 하면서 도적 무리를 상대하였다. 혼쭐이 난 도적들은 뒤늦게 부랴부랴 줄행랑을 쳤다.
청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뒷짐을 지고서 허둥지둥 달아나는 도적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도적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허리춤에 쇠부채를 도로 차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단정히 하였다. 그리고 자매에게 다가가 안부를 살폈다.
“늦은 시각에 두 여인께서 이런 곳에 계시니, 짐작컨대 필경 곡절이 있어 방랑하는 처지이신 듯합니다. 이 비루한 자가 알량하게도 누추한 집 한 채를 가지고 있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청하건대 잠시 머물러 쉬어 가심이 어떨까 합니다. 그리 하실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