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상한 거 찾았다. 형이 좋아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
어느 날 중학교 국어교사로 일하는 동생 박승욱이 웬 종이쪽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먼지로 더럽혀진 A4 용지로, 몇 개 문장이 검은 볼펜으로 갈겨져 있었다.
– 선배님 몸에 손대지 않기. 선배님 눈 똑바로 쳐다보지 않기. 선배님 말씀에 불복종하지 않기.
– 선배님을 보면 곧바로 달려가서 인사말과 관등성명 외치기. 선배님과 대화할 때는 다나까로만 문장 끝내기. 압존법 철두철미하게 준수하기.
– 학번에 따른 복장 규정과 액세서리 규정 지키기. 특히 신입생 여학우는 같은 신입생과는 CC 금지.(어길 시 장학금 대상자에서 배제되는 등 불이익 있음.)
– 나이 말고 철저하게 학번제에 따를 것. 일반 선배님보다 학생회 선배님들이 무조건 더 높음.
“이 짜증 나는 건 뭐야?”
“산책하다 그린티대학교 부지에서 찾았어. 형 이런 거 수집하지 않아?”
나는 본업은 교육행정직 공무원이었지만, 취미로 향토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린티대학교는 우리 동네에 있던 대학교로 원래 그린티 그룹에서 출자해 세운 4년제 종합대학이었다. 그린티 그룹이 직접 관리할 때는 취업률이 괜찮고 ‘입결’도 높았지만 그린티 그룹이 해체된 후 부실 사립재단에 인수되면서 10년여에 걸쳐 꾸준히 쇠락하다가 2015년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E등급을 받고 2017년 결국 폐교되었다.
듣기로는 폐교되기 몇 년 전부터 대학원 연구실이 전격적으로 폐쇄되거나 교직원에 대한 임금 체불이 일어나는 등, 내부 조직이 상당히 망가져 있었다는 것 같았다. 근처 상권도 몰락해서 지금은 원룸에 사는 직장인이나 산책객들이 몇 있을 뿐인 활기 없는 지역으로 방치된 채였다.
애초에 산악 지역에 위치해서 교통도 나쁘고 상업 인프라도 안 좋은 데다가 학생들도 대부분 기숙사에 거주하거나 인근 원룸에 모여 살았기에 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똥군기가 번성하기 쉬운 폐쇄적인 구조였다.
“무슨 과인지는 안 나와 있네. 사립재단 인수 후에 학교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나빠지면서 똥군기가 심해진 과가 여럿 있기는 했는데 이런 규율은 처음 봐.”
“수집할 가치는 있는 거야? 주워 오기를 잘했네.”
“어, 삼촌. 안녕하세요?”
딸 지현이가 방으로 들어오며 동생에게 인사했다.
“엄마가 홍시 사 와서 가져왔어요. 또 뭐 재미있는 거 찾았어요?”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지현이는 어릴 때부터 내 취미에 어울려 주고는 했다.
***
“그린티는 좋은 대학교 아니었어요? 그런 데서도 이런 짓을 해요?”
딸이 문서의 내용을 보고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사람 모인 조직이라면 어디든 있을 수 있어. 워낙 폐쇄적인 인습이니까 내부자가 아니면 잘 모르는 거지. 중고등학교에도 왕왕 있다고. 대학생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끼리 그러면 갑질이라고 부르는 거고.”
동생이 말을 얹었다. 나는 대학을 나오지 않아서 동생만큼 생생한 증언은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대학생이면 다들 성인 아닌가요? 이런 거 시킨다고 따르는 이유가 있어요?”
“내가 다니던 사범대도 똥군기가 심했어. 이게 바깥에서 보면 황당하지만 막상 들어가서 당하면 느낌이 달라.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협박과 폭력을 동원해서 강제하는데, 분위기가 살벌해서 제대로 대처를 못 할 수 있거든. 아예 조직을 나갈 각오가 아니면 하급자 혼자서 반항하기가 쉽지 않지.”
“뭐라고 하면서 강요를 해요? 무슨 이유가 있어요?”
“명목은 있지. 예절 교육이니, 단결력 함양이니, 관리를 위해서라느니, 선배 라인을 타야 한다느니, 사회 나가도 똑같으니 미리 적응을 해야 한다느니. 하지만 그냥 권력 휘두르는 데 취해 있었던 것 같아. 그나마 군대는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들어갔지, 대학은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거라서 충격이 컸어.”
“다들 싫어하는 것 같은데 정작 온갖 곳에 존재하니 신기한 문화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잔을 탁자 위에 두었다. 그런데 그 바로 직전에 딸이 예의 문서를 들고 읽다가 같은 자리에 놓아둔 터라 나도 모르게 뜨거운 커피 잔을 문서 위에 두게 되었다. 그러고 셋이서 동생의 대학 시절에 대해 얘기하다가 다시금 잔을 들었더니 원래는 비어 있던 문서의 반대편에 작고 붉은 글자들이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어?”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업적을 자랑하는 그린티대학교 녹차빙수제조공학과에 입학하신 신입생 여러분 환영해요! 새내기 여러분들의 원활한 학과 생활을 위해 필수적으로 숙달해야 할 내용들을 아래에 정리하였으니, 부디 모든 항목을 빈틈없이 숙지하시어 즐겁고 보람찬 학과 분위기를 이룩하는 데 있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기를 거듭 당부드릴게요~!」
종이에 새로 나타난 문서의 제목은 ‘그린티대학교 녹차빙수제조공학과 신입생 안내문’으로, ‘그린티대학교 녹차빙수제조공학과 학생회’ 명의로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