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BornWriter입니다.
이번주 저는 중편 하나를 5회에 걸쳐 연재하였습니다. <멋진 이세계 : Brave Another World>라는 작품이었는데요, 오늘은 완결 기념(?)으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저는 트위터를 하다가 작품의 영감을 얻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작품도 그러했습니다. 다만 최초의 영감은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저는 용사가 공주를 구해서 왕궁에 도착했는데, 여성과 여성이 결혼하면 왕가는 누가 잇죠? 같은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했거든요. 공주가 “내가 대 잇는 기계인가”라고 대사를 하면 꽤 통쾌할 거 같기도 했고요.
사실 동성애를 다루고자 한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도서관 사서 에밀리 힐덴베르크의 우울>에서 주인공과 사이드킥의 동성애를 다뤄보고자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은 동성애 문제를 다루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핵심 주제가 ‘벌어먹고 사는 삶의 우울’이었고, 동성애 문제는 곁가지였거든요. 게다가 작품 내내 언급된 동성애 코드가 너무 가볍게 소모될 우려도 있었습니다. 저는 동성애 문제가 농담거리로 전락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해당 작품은 동성애 관련 이야기를 싹 지워낸 채로 완성을 지었습니다.
<멋진 이세계>에서는 동성애 문제를 곁가지로 놓는 게 아니라 핵심 주제로서 다뤄보자. 이것이 제 첫번째 목적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몇 가지 굴레를 벗어던져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다시 굴레를 뒤집어써야 했습니다.
1. 성별을 지시하는 대명사에 대하여
용사는 성별을 지시하는 명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특별히 성별을 밝히지 않으면 은연중에 용사를 ‘남성’으로 두고 읽으시더라고요. 용사라는 단어의 성별 프리셋이 남성에 맞춰져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용사를 여성으로 두고 서사를 진행시키려던 까닭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몇 사람의 조언을 듣고나니 성별에 관련한 문제를 아예 비틀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용사를 남성으로 두고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성별을 지시하는 대명사 ‘그’ 혹은 ‘그녀’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성별을 밝히지 않았기에 독자는 자신이 살면서 체득한 프리셋으로 용사의 성별을 가늠했을 것입니다.
‘용사’라는 단어로 이 캐릭터는 남성일거야, 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었을 겁니다.
혹은 성별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별을 특정하지 않고 읽으신 분도 계실 겁니다.
어쩌면 성별이 제시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느끼고 읽기를 관두신 분이 계실 지도 모르죠.
저는 4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용사의 성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 의도였습니다. 왕자는 왕자이기 때문에 독자에게 그 성별이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 용사와 왕자가 연인 사이 ➠ 왕자는 당연히 남자 ➠ 그렇다면 그 연인인 용사는 여성인가! ] 하는 식의 논리전개를 누군가는 했을 겁니다. (어쩌면 독자가 적어서 아닐 수도 있음)
성별을 밝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신나게 인간관계를 독자에게 비틀어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것을 해내기 위해 ‘그’ 혹은 ‘그녀’를 사용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저는 올해로 글을 쓰기 시작한지 만으로 11년이 되었지만 (아 물론 11년동안 놀았죠. 열심히 쓰려는 생각은 없고 늘 취미였어요ㅎㅅㅎ 지금도 그렇답니다) 이 두 단어 ‘그’와 ‘그녀’를 전부 사용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정말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성별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저는 대명사 몇 개를 사용하지 않는 굴레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어야 했습니다. 십 몇 년동안 익숙해진 것들이라 한번에 떨쳐내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꽤 성공적으로 해내지 않았나 자평해봅니다.
2. 캐릭터에 이름을 짓지 않고서
아마 이것은 성별과도 연관이 되어있을 겁니다. 가령 빅토리아와 빅토르 처럼 이름에서 성별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죠. 그런데 꼭 그게 아니더라도 저는 이 작품을 하면서 캐릭터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지 않았습니다(이름 지어주기 귀찮았던 게 아닙니다!). 용사는 용사고 왕자는 왕자고 왕은 왕이고 남작은 남작이고 용은 용(용 죽겠고) 이런 식으로…. 이것은 1번처럼 어렵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글을 쓰는 저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시도였습니다. 캐릭터를 지칭하는 데에 ‘이름’을 사용할 수도 없고 ‘그’를 사용할 수도 없으니 오로지 용사만 반복해야 했거든요.
한 문단 안에서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는 것을 병적으로 기피하는 성향이 있어서, 고생 좀 했습니다.
3. 플롯을 벗어던지면 무엇이 남을까
저는 (잘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찌만) 작품을 써내려가기 전에 충분히 두터운 플롯을 준비합니다. 보통은 [ 스토리 스케치 ➠ 대사와 묘사 추가 ➠ 1차 플롯(러프 플롯) ➠ 2차 플롯(리파인드 플롯) ➠ 초고 작성 ➠ 퇴고 ➠ 퇴고는 무한히 반복되고 탈고는 찾아오지 않는다 ➠ 탈고 ] 같은 식으로 작업합니다. 뭐 하나를 쓰더라도 토대와 설계도가 완벽하지 않으면 쓰면서도 계속 불안하거든요. 글을 쓰다보면 이게 정말 맞게 쓰고 있는 건지 햇갈릴 때가 있잖아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 항해 계획을 탄탄하게 짜두는 것입니다. 플롯을 따라 글을 쓰면 ‘선로를 따라 정해진 결말에 도달한다’는 느낌이 강해요. 자유롭지는 않지만 명확하고, 애당초 그 선로를 깔아놓은 게 저 자신이라 그렇게까지 부자유스럽다는 느낌도 아니고요.
이번 글을 쓰면서 저는 플롯을 버렸습니다. [ 스토리 스케치 ➠ 초고 작성 ➠ 퇴고 ➠ 탈고 ]로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를 써내려갔어요. 심지어 1화와 2화의 스토리 스케치는 머릿속에서 구상한 것으로만 때우고 바로 초고 작성으로 돌입하였죠. 그 덕분인지 이 작품의 분위기는 제가 그동안 써온 그 어떤 작품과도 다르게 느껴져요.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스토리가 어디로 튈지 모르고, 그래서 저도 쓰면서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플롯이 완성되면 ‘문장이 안 나와서’ 완성이 늦어지는 경우는 있어도 ‘어느 지점으로 되돌아가야 해서’ 완성이 늦어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 플롯이랄 것이 없어서 계속 쓰다 지우고 쓰다 어느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고 (스다 마사키는 멋지고) 해서 완성까지 굉장히 오래 끌었습니다.
처음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이 3월 24일이었습니다. 한화와 넥센의 개막전이 있었던 바로 그 날이죠. 1화 분량은 29일에 다 썼으니 딱 5일 걸렸습니다. 2화는 4월 4일에 썼으니 이번에도 5~6일 정도 걸렸습니다. 그런데 3화를 다 쓰는 데에는 20일 가깝게 걸렸습니다. 이미 앞에서 ‘용은 사냥감으로 전락하지 않는다’고 하여 용사vs붉은 용은 성립되기 어려웠고, 결국 어떤 식으로든 용을 회유해야 하는데 그 논리를 완성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거든요(으아아 32mb RAM으로 자라나라 논리논리!).
플롯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니 확실히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제가 좀 더 능동적으로 전개를 끌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능동적’이라는 건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속을 걸어가는 느낌이었어요. 끝에 다다들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심했던 게 한두번이 아니었거든요. 사실 제가 도중에 포기했으면 ‘으아 역시 플롯이 없으니 결말이 안 나는군!’하고 이 작품은 영영 폴더 속에 파묻혀버렸을 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저는 이 작품의 결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안개 속을 더듬어 나와보니 그런 결론이더라고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수정을 하고 싶네요.
이 작품은 잘 써야겠다는 목표도 있었지만, 쓰고싶은 대로 쓰고싶다는 욕망이 더 강했던 거 같아요. 보통은 독자를 상정하고 쓰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제가 쓰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말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작품의 수준만 놓고 보면 썩 훌륭하다 할 수 없겠지만, 저 스스로는 만족스럽습니다. 이런 글을 썼다는 자체에 만족할 수 있다는 건 아직 제가 말캉말캉하다는 거 아닐까요. 하하!
새로운 작품은 언제 쓰기 시작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늘 ‘쓰고 싶은 게 생길 때만’ 글을 쓰니까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작품을 가지고 돌아오고 싶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