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굉장히 슬픕니다. 쓰던 글이 한 번 날아갔거든요. 일단은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다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도 쓸지 말지 고민을 좀 했었습니다. 작중에서 천천히 자연스럽게 녹여서 쓰고 싶었거든요.
(미흡하게나마) 자료조사를 거친 저로서는 머릿속에 이미 들어있는 사전지식이 있고,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작품에 녹여내야 하는지는 늘 고민의 대상이 됩니다. 더욱이 작품 배경이 일제강점기고, 배경은 더더욱 예민하게도 일본 육사이니만큼, 댓글로 질문도 들어온 김에 제대로 한번 짚고 넘어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회 부분부터 작품의 신뢰성, 개연성, 핍진성에 의구심이 들면 안되니까요.
1. 일본 육군사관학교 내에서 저런 하극상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일본군은 상명하복과 군기로 유명합니다. 그러니 지금 저 상황이 와닿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 충성의 주체는 ‘천황 폐하’였습니다. “천황 폐하가 머리고, 우리는 수족이다”라고 아예 구절을 외우고 다녔지요. 작품 시작 시점인 32년에는 아예 쿠데타가 발생했는데, ‘천황 폐하’에게 충성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충성하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게 일견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당시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정치계와 군대 내부의 기득권층이 천황 폐하의 눈과 귀를 가린다며 고관대작들을 처형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믿었습니다.
이 일이 발각되기 전, 이미 육사에서는 비슷한 논의가 육사 생도들 사이에서 한번 오가서 학생들은 퇴교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육사 생도들이 가난한 시골 출신의 몰락한 무사계급이었던 것과 군대 내에서 학습된 충성심이 무섭게 결합한 결과입니다. 이후 일본군에서 일어나는 많은 파행이 이러한 결과물이지요.
야나기는 그런 시대의 산물입니다. “메이지 덴노가 발표한 왕공가궤범이 있는데, 어떻게 그딴 소리를 하느냐.”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육군 자체가 충성할 대상을 ‘천황 폐하’로 잡고 있는데, 아무리 상관이라고 해도 황실에 대한 불경은 용납 못하는 것이죠. 물론 제정신이라면 육사 교장에게 일개 생도가 쉽게 덤빌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상황이 극단적입니다. 이안은 실종됐습니다. 다섯 살때부터 함께 지내온 가족 같은 대상이에요. 그런데 육군 교장은 독립운동하러 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기준으로 보자면 가족이 실종됐는데, 증거도 없이 “네 가족은 지금 국경을 넘어 반국가단체에 가담한 범죄자다.”라고 몰아가는 셈이죠. 흥분 상태에서 따지고 드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야나기가 헌병 대좌의 아들인 것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당시 헌병대는 ‘천황 폐하의 직속’이라면서 가장 기고만장하고, 다른 병과에 대한 우월감을 표출했던 곳이지요. 헌병들은 3계급 위를 감시하거나, 긴급한 상황에서는 3계급 위 상관도 살해할 수 있었답니다. 야나기에게는 그런 것이 아주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으므로, 하극상이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많은 경우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실제 일본군도 그랬고요.
2. 야나기의 신분은 어느 정도인가?
작중에서는 육사 생도 / 어학우로 나옵니다. 여기서 어학우는 왕공족을 보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감시자 내지 부관 정도의 위치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야나기는 약 12년을 이안과 함께 지내면서 10세에는 학습원(가쿠슈인), 이후 유년학교, 육사를 거치며 일반인의 생활과 완전히 유리된 채 지냈습니다. 그래서 현실 감각이 없습니다.
가쿠슈인은 황족, 화족들만 다니는 곳이고 유년학교, 육사는 사실상의 군대지요. 그러나 유년학교, 육사에서도 황족들은 분리가 됩니다. 기숙사도 황족사로 쓰고, 책상이나 다른 비품들도 다른 것을 쓰도록 규정되어있어서 상당히 특별취급을 받습니다. 작중에는 아예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황족이 수석인 게 상례라고 지적하고 있고, 야나기는 아무 불만도 없죠. 언급된 스미노미야(훗날의 다카히토. 쇼와 덴노의 막내동생)은 이안과 동갑입니다. 자연스럽게 황족 행사 등 성장과정에서 야나기도 황족이나 화족과의 접촉이 일상이어서, 스스로 은연 중에 자신이 특권계층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특별히 이상하지는 않은 게, 당시 황족에게 여동생을 첩으로 보내서 진급하고 출세가도를 달린 군인도 있었을 정도로 황족과의 커넥션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매우 썩어 있었어요.
작중에서도 황족과 알고 지낸다는 걸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장면도 나오는 등, 유용하게 써먹고 있죠.
야나기는 요약하자면 대부분의 민중들과 격리된 현실에서 자라서 현실 인식이 극도로 부족하며, 좁은 세계 안에 갇혀있습니다. 그 세계는 아름답게 연출된 무대인데 본인은 그것도 모르고 있지요.
3. 혈서를 쓰고 육사에 입교한다는 설정
당시에는 조선 출신 지원자들 사이에서 유행이었습니다. 처음에는 17~19세 사이에서만 뽑던 걸 혈서를 받고 21세 이상의 지원자도 뽑아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후 너무 심해져서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실제 육사에서 조선인 생도를 받기 시작했던건 33년부터이니, 작중에서는 조선 출신 청년에게도 입교의 길이 열리자마자 혈서를 쓴 거고…굉장히 참신한 시도였겠죠? 결국 성공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에 대해서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그건 작품을 봐주세용.
4. 육사 교장은 왜 몰래 이안을 찾고 있는 것인가? 야나기가 저러는데도 참는 이유는?
32년은 여러모로 다산다난한 해였습니다. 독립운동 의거도 몇 번이나 일어났고, 황도파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도 있었고. 원래도 핵심적인 지위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육사 교장이 장래 청년 장교가 될 생도들을 육성하는 중요도가 높아진 가운데, 자기 소관이었던 왕공족 ‘이안’이 탈주를 해버립니다. 궁내성에 보고되면 진급은 고사하고 이제 옷을 벗어야 할지도 모르죠. 한창 엘리트코스를 달리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야나기가 어디까지나 출세를 위해서 이안의 비위를 맞추며 지낸다고 생각해서, 이안이 사라지면 너도 출세길이 막히지 않느냐-라는 말로 끌어들이려고 한 겁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니까요. 그런데 야나기는 게거품을 물기 시작하죠.
여기서부터가 진짜 문제입니다. 야나기가 바로 황족사로 달려가서 덴노의 막내동생인 스미노미야에게 하소연을 하거나, 이왕직에 연락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궁내성까지는 한방에 보고가 들어가는 겁니다. 교장으로서는 가장 바라지 않는상황입니다.
결국, 내키지 않지만 야나기에게 이안을 찾으라고 보내는 동시에 감시자로 다른 조선 출신 생도를 붙여놓기로 하죠. 여기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만…
5. 그 외 드리고 싶은 말씀
일단 저는 자료조사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믿어주세요ㅠㅠ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적고 있지는 않습니다. 무언가 이상해 보인다면 아마 제 전달력의 문제일 겁니다.
궁금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문의주셔도 됩니다. 제가 답변드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답변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