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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웹소설 쓰기”의 SF 소설 왜곡

분류: 책, 글쓴이: OneTiger, 18년 7월, 댓글3, 읽음: 177

창작 서적 <도전! 웹소설 쓰기>는 이른바 웹소설(인터넷 소설) 작가에게 조언하는 내용입니다. 이 책은 웹소설이 무엇인지, 얼마나 크게 웹소설 시장이 발달했는지, 어떻게 웹소설을 쓰는지, 웹소설에 어떤 장르들이 있는지 설명합니다. 웹소설을 쓰기 원하는 작가 지망생에게 <도전! 웹소설 쓰기>는 좋은 조언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웹소설 작가에게 좋은 조언이 된다고 해도, 장르 소설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좀 거시기합니다. <도전! 웹소설 쓰기>는 세 가지 로맨스 장르들, 미스터리 장르, SF 및 판타지 장르, 무협 장르를 구분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모두 6가지 장르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장르들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대충 넘어갑니다. 웹소설 작가 지망생에게 조언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도전! 웹소설 쓰기>는 깊이 있는 분석이나 비평을 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웹소설이 가볍고 빠른 소비 문화이고, 종이책과 달리 진지한 내용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인터넷 화면이 복잡한 장문을 보여주기에 적합하지 않고, 웹소설이 짧은 문장들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장르 분석과 비평 역시 후딱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몇몇 부분은 아예 설명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가령, ‘정통 로맨스 소설’을 설명하는 대목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장르 소설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문학이다. 삶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잠시 와서 마음을 쉬고 갈 수 있는 오아시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의 치열한 삶에 대한 고뇌를 풀어내며 작가 정신을 발휘하고 싶다면 로맨스는 적합한 무대가 아니다. 장르 소설은 독자가 있기에 존재한다. 독자가 로맨스를 왜 읽는지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약 자신에게 독자를 즐겁게 해주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일찌감치 로맨스를 접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이 설명은 꽤나 이상합니다. 장르 소설과 웹소설과 로맨스 소설이 등치되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에서 장르 소설과 웹소설과 로맨스 소설은 똑같은 의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르 소설과 웹소설과 로맨스 소설은 서로 다른 의미입니다. ‘장르 소설’이 뭘까요? 장르 소설은 특정 장르에 해당하는 소재, 양식, 주제를 따라가는 소설입니다. 가령, SF 소설은 세계를 논증하고 차이와 변혁과 단절을 사변하는 소설입니다. 그래서 SF 작가들은 저런 핵심적인 특징을 따라가느라 애쓰죠. 장르 소설에는 비단 SF 이외에 판타지, 추리, 로맨스, 무협, 공포, 미스터리 등이 있고요.

 

<도전! 웹소설 쓰기>는 장르 소설이 위안을 주는 문학이라고 말했습니다. 아, 그래요? 장르 소설이 위안을 주는 문학? 언제부터 SF 소설이 독자에게 휴식을 주는 문학이 되었습니까? 저는 그런 SF 소설들이 많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어른 독자들에게 아이 같은 즐거움을 주기 위해 아서 코난 도일은 <잃어버린 세계>를 썼겠죠. 하지만 위안과 휴식이 SF 소설의 주된 목적인가요? 위안과 휴식을 주기 위해 메리 셸리와 허버트 웰즈가 <프랑켄슈타인>과 <모로 박사의 섬>을 썼나요? 위안과 휴식을 주기 위해 잭 런던과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강철 군화>와 <붉은 별>을 썼나요? 위안과 휴식을 주기 위해 스타니스와프 렘과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솔라리스>와 <노변의 피크닉>을 썼을까요?

<빼앗긴 자들>과 <붉은 화성>은 분명히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달하는 소설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희망은 현실 도피적인 위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건 투쟁과 저항을 선동하는 희망입니다. 엘리너 아나슨 같은 작가는 기후 변화에 투쟁하기 위한 SF 소설을 제안합니다. 따라서 장르 소설은 독자에게 위안을 주는 문학이 아닙니다. 저는 다른 장르 소설들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SF 소설은 세계를 논증하고 변혁을 사변하는 소설입니다. SF 소설의 핵심적인 가치는 그겁니다.

 

어쩌면 <도전! 웹소설 쓰기>는 장르 소설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이 책은 장르 소설을 웹소설과 동의어로 쓰기 원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게다가 장르 소설은 이미 수많은 작가들, 평론가들, 독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왜 이런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요? 누군가가 웹소설이 독자에게 현실 도피적인 위안을 준다고 말한다면, 저는 거기에 별로 반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웹소설을 장르 소설과 전반적으로 등치시킨다면, 저는 그게 틀리다고 반박하겠습니다. 웹소설 세계에 장르 소설들이 많다고 해도, 장르 소설과 인터넷 소설은 엄연히 다른 의미입니다.

<도전! 웹소설 쓰기>를 집필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 인기를 얻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틀린 건 틀린 거죠. 아니, 주류 문학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장르 소설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이런 웹소설 작가들조차 장르 소설을 틀리게 설명한다면, 그건 커다란 문제가 아닐까요. 왜 장르 소설을 현실 도피적인 문학으로 끌고 갑니까? 물귀신 작전인가요? 왜 엄연히 존재하는 장르 소설을 왜곡하나요? 웹소설을 설명하기 위해 SF 장르를 왜곡하는 걸까요? 그건 아니겠죠. 그저 작가가 제대로 모를 뿐이겠죠.

 

이것 이외에 <도전! 웹소설 쓰기>에는 SF 장르를 비롯해 장르 소설을 왜곡하거나 무시하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대체 역사 소설을 설명하는 부분은 참…. 주류 문학가들도 아니고, 웹소설 작가들이 이렇게 장르 소설을 무시하는 상황은 좀 당황스럽습니다. 어떻게 장르로 먹고 산다는 사람들이 장르를 무시할 수 있나요. 물론 웹소설이라는 특수한 매체를 설명하기 위해 <도전! 웹소설 쓰기>는 좀 더 독특한 설명을 원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엄연히 존재하는 장르 소설을 왜곡한다면, 그건 커다란 잘못이겠죠. 특히, SF 소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남한 사회에서 그건 더욱 그렇고요.

 

※ <도전! 웹소설 쓰기>에서 어떤 작가는 자본주의 나라에서 지갑을 여는 소비자가 왕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짜 왕은 생산 수단을 차지한 자본가 계급입니다.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의 지갑이 두둑해질까요?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나요? 아닙니다. 노동자들이 재화를 생산하기 때문에 재화를 거래하기 위한 화폐 역시 존재합니다. 하지만 재화를 생산하는 생산 수단은 자본가들이 차지하고, 그래서 노동자들은 생산 수단에서 소외됩니다. 이는 죽어나가는 비정규직이나 기후 변화 같은 환경 오염으로 이어지고요. 소비자가 왕이라는 관념은 자본주의 체계를 재생산하는 관념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자본주의 체계를 재생산하고 지배 계급을 추종하는 관념들이 너무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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