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ihilation, 소멸 또는 각성의 땅
예전에 SF 관련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구 SF 작품들의 동향(?)을 듣는 자리였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생각할 ‘꺼리’가 많았던 기회였습니다. 외국 SF 작가들은 이 정도까지 생각하며 쓰고 있구나,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빅3나 고전SF나 읽으며 그 한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이후 최대한 (원서를 읽을 능력은 못 되기에) 최근 작가들의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이 책도 그런 최신 작가의 책입니다.
주인공 생물학자가 정부에서 감추고 있는 비공개 X구역을 탐사하는…! 설정의 SF 입니다. 저는 주인공이 X구역에서 마주치는 것들과의 과정이 ‘외계와의 조우’로 읽었는데,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더군요. ‘미지의 것’으로 열어놓고 있습니다. 해설에서도 이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배경과 사건을 다루는 위어드(Weird) 픽션으로 분류하더군요. 그런 소설을 몇 편 읽은 것 같긴 한데, 위어드라는 하위 장르가 있는지는 이 책을 읽고 알았습니다.
사실, 대단히 극적이거나 흥미를 추구하는 소설은 아닙니다. 영화 같은 재미를 찾는 독자에게는 권하지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새로운 글거리를 찾는 장르 작가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사변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제프 밴더미어는, 미지의 것과 대면한 한 인간의 변이(또는 각성?) 과정을 차분하면서도 긴장감이 흐르게 그려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에 대해 ‘공포’라는 1차적인 반응을 보이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주인공은 ‘호기심’으로 미지의 것을 대하고 그러면서 겪고 받아들이는 내면의 변화가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결말은 읽는 이에게 (저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어떤 환기를 느끼게 하지요.
무엇보다 이 작품이 제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제는 너무 많이 활용되어온 뻔한) SF의 클리셰 설정들을 가지고 아주 친숙하면서도 ‘세련되게’ 엮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변소설의 고리타분함 같은 선입견이 없어요. 고급스러우면서도 긴장을 놓치지 않지요. 이것이 사변소설의 최신 흐름이겠지요. (아니, 결국은 작가의 역량이겠죠^^?)
책을 다 읽고는, 앞서 느꼈던 생각할 ‘꺼리’가 다시 생각나더군요. 외국의 작가들은 SF라는 범주 안에서 이 정도까지 나아가고 있구나. 나는 여전히 틀 안에 ‘갇혀’ 있구나… 젠장^^!
다른 동네 장르 작가의 최신 작품을 찾으시거나, 새로운 글거리 자극을 찾는 분에게는 좋은 작품일 것 같아 추천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덧. 사변소설 작가의 작품을, 헐리우드의 흥미본위 작가들은 어떻게 각색했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엑스마키나> 감독이 연출했다니 기대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