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와 스티븐스와 코베인과 메이저와…
“저는 그림으로 옮기기 전에 우선 글로 씁니다.
제가 아직 어릴 때, 그러니까 책을 이제 막 한 두 권쯤 출판했던 시점에
‘오, 맙소사, 더이상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난 어떻게 살지?’하고 걱정했던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실제로 저는 작가들이 마주치곤 한다는 벽에 2분 이상 가로막혀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미처 그림으로 옮기지 못한 수 백 장의 원고들이 쌓여 있고요.
제가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습니까, 그 중 몇 작품이라도 다 완성하면 다행이게요.
– 에드워드 고리

사랑해마지 않는,
죽음과 어리둥절함과 아이러니와 그 모든 것에 대해 끝도 없이 써내려갔던 (그려내려갔던) 고리의 말입니다.
저는 항상 그 ‘작가들이 마주치곤 한다는 벽’에 빙 둘러싸여 있는데 말이죠. (웃음
사는 동안 다 풀어낼 수 없는 아이디어로 머릿속이 가득한 기분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의 이야기만으로도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는 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인생이에요.
이야기 속 하나의 죽음만으로도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는 저로서는.
만일 당신이 넌센스를 제대로 다룬다면, 그 결과물은 기괴한 모습일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건 기괴하게 마련이니까.
한때는 나도 밝은 넌센스를 고안하려고 해봤다, 어린이를 위한 밝고 신나는 넌센스…
슈베르트가 말하기를, ‘세상에 행복한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행복한 음악같은 건 없다.
마찬가지로, 행복한 넌센스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 에드워드 고리
증거는 이미 오래전부터 명백했는데
오 신이시여, 나는 스스로의 죄 안에서 길을 잃었고
모든 것이 돌이 된 듯 얼어붙은 세상에서
네 심장도 더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아
아이야, 어째서 삶이란 게 이토록 잔인하고 냉정한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 사실이 내 심장을 짖누르곤 해
살인과 범죄의 편에 선 세상의 법이
네 눈동자에서 모든 기쁨을 앗아가 버렸지
화석에 새겨진 단단한 선들은
석회 속에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로
스스로의 죽음을 증언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모든 게 그 원인으로 보이는 법
오 내 사랑, 폭력이 야기하는 것은
그 너머에서 넘쳐흐르는 악의를 만드는 일
이제 내 심장은 더이상 버틸 수가 없어
오 기쁨이여
저는 이제 빛이 두렵습니다
내 영혼의 보석들이 산산조각나버렸으니
부디 신께서 살인과 범죄의 편에 서 계시는 동안
간신히 살아있는 그 무엇도 파괴되지 말기를
오, 내 사랑
나 역시 삶이라는 게 왜 이토록 잔인하고 무정한지 모르겠으나
그 사실이 내 심장을 짖누르고 있어
화석에 새겨진 흐린 선들은
시간 속에 그림자를 드리워
스스로의 죽음을 감추려 하는데
증거는 그 자리에 남아있으니, 우리는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오 하느님, 저는 응답의 송가 속에 길을 잃었습니다
죽어버린 것들을 위한 장소가 정녕 존재합니까
제 심장엔 더이상 부서질 조각도 남아있지 않나이다
– 살인과 범죄 / 수프얀 스티븐스
“폭력이 야기하는 것은 넘쳐흐르는 악의를 만드는 일” 수프얀 스티븐스의 말입니다.
조작된 기억.
창 밖의 풍경은 단 몇 장의 슬라이드 필름으로 이루어진 장난감 망원경처럼 단조로이 흐르고 스쳐갔다 되돌아오길 반복합니다.
강물 위로 하나의 다리가 지나고 찰칵, 나무가 흐르고 찰칵, 아파트의 숲 너머로 찰칵.
다시 다리가 지나고. 강물은 시야에 담기엔 방대했는지 눈가에 차고 넘칩니다.
단조로이 흐르는 차 창 밖의 풍경, 차고 넘치는 눈물, 약간의 냉소-틀림없이 저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어요
수첩에 휘갈겨 놓은 문장들이 그것을 증명하죠,
그런데 다음 순간,
수첩에 적힌 문장들은 어느 지리한 오후 커피숍에 앉아 하릴없이 번역해 놓은 수프얀 스티븐스의 노랫말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 문장들은 노랫말이며, 나의 경험이 아니죠.
그러나 그것이 노랫말임을 깨닫기 바로 전까지 저는 생생한 경험으로써 그것을 인지했습니다.
수첩 속 문장들의 인과적 당위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나는 나 자신에게 거짓된 경험을, 그토록 리얼한 감각들을 심어놓은 것이죠.
그리고 아직도, 생생하게 각인된 가짜 기억속에서 차창 너머로 절실한 사색들을 흘려보내는 가짜 내가,
사실은 그 모든 게 노랫말인줄도 모르고 가짜 감상에 젖어있는 겁니다.
-바쁘게 손을 움직여야만 해, 내 영혼을 움직이기 위해선. 그래, 비록 혼자 죽는다 해도, 혼자 죽는다 해도
커트 코베인보다 그의 유서를 먼저 접했더랬어요.
우리는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그토록 외롭게 죽을 수 있었는가 하고 생각하조
그의 곁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었더라면 하고…
나는 그가 죽어가는 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나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고
그러는 동안
내 곁에서
또다른 아름다운 것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봄이 오지 않았는데 나무에게 꽃을 피우라 할 순 없고
한밤중에 집을 나서면서 새들이 지저귀길 기대해선 안돼
까닭을 알고 싶다면 그리 어렵지 않아
때로는 아무리 좋은 것도 끝날 때가 있는 거야
동전 한닢으로 대단한 부자가 될 수 없고
삶의 끝자락에서 젊음을 바라봤자 아무 소용 없어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순 있어도, 물고기에게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칠 순 없는 것처럼
때로는, 좋은 것이 죽어가는 걸 봐야만 해
아무것도 없이 불을 지필 순 없고, 손뼉을 쳐서 눈을 내릴 순 없어
애초에 너에게 사랑이 없다면 무슨 수로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어
인생은 영화와 같지 않지만, 결국 널 울게 할 거야
너도 알잖아,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야
사랑했던 이의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순 없고
모든 것엔 끝이 있으니 영원을 바라는 건 그만 두자고
만일 그 생각에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샌다면, 그만 눈물을 닦아
왜냐하면 때로는
선한 이들의 죽음을 겪어야만 하니까
– 선한 이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 / 브루노 메이져
저는 작가도 아니고 뭐도 아니지만
누구나 그렇듯
지난 꿈에서 나눈 이야기를, 뱉은 대사를, 모험의 디테일을, 줄거리를
가장 가까운 노트를 펼쳐 적어놓고야 안심하고 다시 잠들 수 있었던
그런 순간들이 있죠
그리고 물론 누구나 그렇듯
잠이 깨어 그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면 대체 이게 뭐라고, 싶은 겁니다
문장은 너접하고, 대화는 삐걱거리고, 줄거리는 중구난방
지난 밤 그 완전했던 상이 잠결의 착각이었는지
혹은 그것을 현실로 끄집어내어 옮기는 과정이 상의 완전함을 교란시킨 것인지
문제는 어느 쪽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지난밤 가슴 졸이며 몰두해있던 완전한 순간이 허접한 잠꼬대로 둔갑해 있는지
꿈이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만
사는 게, 혹은 사는 것의 어느 단면이
잠결에 꿈의 줄거리를 옮겨적는 것과 닮아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죽겠죠, 그게 뭐 어떻습니까.
– 에드워드 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