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종에 대한 음모 리뷰
*다른 곳에 쓴 리뷰를 옮긴 거라 말투가 다소 딱딱한 건 양해 바랍니다.
*비관론, 반출생주의 등 음울한 내용입니다. 관련 내용에 민감하신 분들은 뒤로 가시길……
‘무언가 있음’의 감각으로부터,
도망칠 길은 없다.
평생에 걸쳐 도망칠수록,
평셍에 걸쳐 속박될 뿐이다.
한 줄 요약
우리는 기만의 다른 이름인 의식이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비문학 리뷰는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이후로 4개월 만인데, 여전히 비문학 리뷰는 감을 잘 못 잡겠다. 그래서 내가 읽은 파트들을 요약하면서 대강의 감상들을 떠들어보려고 한다.
서문: 비관론과 역설에 관하여/존재라는 악몽
삶에 대한 낙관론지와 비관론자를 대비시키면서(동시에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비관론자에 대한 오해를 풀고 삶에 대한 비관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말한다. 또한 의식의 과잉으로 인해 인간은 자기파멸적 운명에 빠졌고, 그를 해소하기 위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자기기만하게 됐다.(이때 기만의 네 가지 수법이 다뤄진다) 그렇기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곧 고통을 겪게 하지 않는 것으로 귀결된다.(비존재에 대한 얘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뤄진다)
또한 “인간 꼭두각시”라는 개념을 내세우며 우리가 “대체된 가짜”에 대해 기괴함이나 으스스함(uncanny)을 느끼는 까닭은 대체된 가짜가 보여주는 “대체가능성”, 즉 우리가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가 아닌 얼마든지 재현 가능한 기계적 존재라는 걸 폭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관론자에 대한 소개와 오해를 풀면서,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다루는 서문과 그 화두로서 내세우는 ‘으스스함’에 대해 다룬다. 사실 책의 내용 자체가 비관론자, 혹은 영적인 감각(영지주의자나 미신에 환장하는 사람들이라면 좋아할 법한 그 감각 맞다)이 있는 사람 정도만 이해할 수 있게 쓰였는데, 이건 어쩔 수 없다. 비관론자가 비관론 바깥의 어조로 글을 쓴다는 건 불가능하고, 그건 사실 낙관론자 역시 마찬가지다.
바꿔말하면 본인이 ‘자칭’ 비관론자임에도 이 책을 읽고 ‘이해불능성’을 마주하게 된다면 패션 비관론자 내지는 쿨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드물게 영웅적 비관론자일 수도 있고. 그래서 책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게 좋다. 낙관론자라면 헛소리를 300페이지 넘게 나열한 문자열에 불과할 것이고, 비관론자라면 고립된 유빙인 줄 알았던 비관론이 실은 체계와 계보, 근본이랄 게 존재하는 섬이었단 걸 알게 될 것이다.
거기 누구냐?
의식이라는 ‘존재하지 않지만 모두가 아는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의 발달과 형성이 반드시 선한 것이냐는 의문을 던진다. 인간이 된다는 것이 근사한 일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서도 제기한다. 이 책에서는 인간이란 존재, 삶이라는 것, 의식, 출산, 존속 등에 대해, 우리가(혹은 저들이)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에 대해 돌멩이를 던진다. 돌멩이의 파문이 일어날지, 아니면 그냥 맞고 기분 나빠할지는 글의 논조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태도에 달린 일이다.(이는 책 초반에 이성과 합리의 근간을 이루는 ‘믿음’의 영역에서 글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괴물
의식은 부정할 수 없고 오로지 긍정하도록 흐른다는 말을 꺼내며, 이 기괴한 의식으로부터 벗어날 방도를 논한다.
전체 맥락과 큰 연관은 없지만 읽으면서 정말 인상 깊게, 그리고 크게 공감하는 구절이 있었다.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찾는 것이 진리라면, 성찰하는 삶은 당신을 한참동안 차에 태워 고독의 한계까지 데리고 간 다음, 길가에 당신과 당신의 진리만 남겨두고 떠날 것이다.(180쪽)
이 파트는 앞선 파트가 이제 의식이 질병이다, 의식이 문제다, 인간이 된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닐 수 있다…를 말했다면 여기선 그래서 의식을 죽이는 일에 대해 얘기한다. 이때 불교가 언급되는데, 비관론자와 불교도들의 유사성에 대해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던지면서 글을 전개한다. 하여튼 불교의 영리적인 부분은 좀 떼어놓고 이런 비관론과 해탈이라는 에고-죽음의 상태에 대해 얘기하면서 인간이 의식을 죽이고 스스로 꼭두각시라 여기는 실제 사례를 언급한다(다들 임사체험 내지 비슷한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다).
에고-죽음의 상태는 의미를 창출해내지 않는 상태, 곧 모든 것이 그대로지만 거기에 의미가 없이 기계적으로 수행될 뿐인 꼭두각시 상태를 가리킨다. 하지만 여기에 다다르는 건 지극히 운에 달렸으며(=달리 방법이 없음) 에고-죽음의 상태는 추구할수록 추구하고자 하는 의식의 존재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죽도록 지긋지긋한
이 파트에선 의식이 만들어낸 고통과 공포 중 죽음에 대한 걸 다룬다. 의식에 의한 기만으로 인해 사람들은 놀라우리만치 삶에 대해 근심하고 걱정하며 연명할 생각을 할지언정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점을 얘기한다. 자살도 또 하나의 용기라는 말을 톨스토이의 글을 인용해서 말하기도 하고, 안락사의 필요성도 조금 어필하고. 그렇게 재미있진 않았다. 약간 초점을 살짝 옮겨서 했던 얘기를 재정리하는 시간에 가깝다고 느꼈다.
히죽 웃는 순교자의 종단
여기선 이제 의식이 만들어내는 고통과 쾌락에 집중한다. 다음은 인상 깊게 읽은 문단이다.
우리 대부분은 육체적인 쾌락을 칭찬하지만 그런 육체적인 쾌락으로 이끄는 생물학적 충동을 칭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쾌락들과, 마약 중독처럼 욕구에 의해 유발되는 다른 쾌락들 사이의 비유는 분명해야 한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야말로 참된 쾌락이다. 하지만 자연의 냉혹한 방식을 감안할 때, 자연이 우리 행동의 주요 유발 인자로서 고통을 선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돌연변이를 통해 우리 쾌락의 범위에 한계를 걸어두고 쾌락이 지속되는 시간에 제한을 설정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아야 할까?
사실 자연에 의한 인간이란 존재는 딱히 행복을 위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 파트의 후반부는 종의 번식, 곧 출산에 대해서 다룬다. 인류라는 종이 번식해야 할 당위는 없으며 후손을 낳는 일이 어째서 타당한가? 라는 말에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반대로 낳지 말아야 할 결정적 근거 역시 없다고 말한다) 다만 분명한 건 내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압박’이 쌓이기 때문에 그 압박을 배출해야 하고 출산 역시 그러한 압박의 배출 활동의 일환이라고 말하고 있다.
존재라는 악몽과 구원이라는 괴물 파트에서도 다뤄졌었지만, 만악의 근원인 의식, 인간 꼭두각시, 에고-죽음, 비존재의 역설, 존속/출산의 당위는 전부 한 줄기로 엮여있다. 의식이(그리고 감정이) 존재하는 한 의미가 창출되고, 그건 다시 말해 그 이상의 고통이 창출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의식을 가진 존재는 본인이 창출해내는 모든 가치와 의미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의식이란 건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저 자연에 의한 기계장치일 따름이다. 그 사실을 마주하는 파멸을 피하기 위해 의식은 기만책을 펼치고 부정을 금지하고 낙관론자들을 대다수로 만들었으며, 살아가는 건 ‘괜찮은 일’이라고 속삭인다. 이를 멈추고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선 에고-죽음이 필요한데, 이러한 에고-죽음에 이르는 길은 순전히 운에 의하지 않고서야, 그리고 성인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므로 이는 최선책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에고-죽음 대신 ‘비존재’를 논하는 것이고, 그것이 존속을 거부하는 자살(이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에고-죽음에 이르면 애당초 자살하지 않아도 된다)과 반출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쩝, 어떻게든 한 번에 엮어서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뭔가 더 난삽해진 것 같다. 이건 내가 온전한 염세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이 책의 논지를 전부 따라가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어쨌든 개략적인 것은 이해했다고 자부한다. 왜냐면 나 역시 부분적인 염세주의자로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의 내용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중요한 건 딱히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 자연에 의한 기계장치(여기선 인간 꼭두각시)임을 가리기 위해 의식은 갖가지 ‘의미’를 덧붙여서 우리 자신을(혹은 저들을) 기만하지만, 비관론자는 그 가식을 최소한 정당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비관론자는 에고-죽음에 이르지 못한 범부들이므로 그들은 가식을 꿰뚫어 본 대가로 더 큰 고통들을 의식하며 살아야겠지만 말이다.(거듭 말하지만 자살은 비존재로 이르는 ‘용기 있는 길’이다. 낙관론자에겐 비겁함으로 읽히겠지만 말이다)
꼭두각시에 대한 부검: 초자연적인 것의 해
마지막 장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다루면서 공포소설 작가들의 계보를 잠깐 짚고 그 특징들을 다룬 뒤 여태 나온 내용을 갈무리한다. 사실 이 부분은 독자로 읽기보단 작가로서 읽게 돼서 리뷰를 남기기엔 조금 애매하다고 느끼긴 했다.
어쨌든 코즈믹호러 단편으로 수상해서 등단한 몸으로서, 초자연적인 것이 어떻게 추구되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으스스함’을 드러내는 건지 이론적으로, 계보적으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었다. 동시에 이 파트에서만 해당하는 내용은 아니고, 책을 읽으며 전반적으로 내가 이전까지 창작한 코즈믹호러, 혹은 필요에 의해 끌어다 쓴 ‘염세주의/비관론’의 논지들 상당수가 이곳에서 진지하게 다뤄지고 있단 걸 확인했다. 특별히 고양감이 있진 않았다.
다만 나는 나 스스로 내 안의 염세적인 면모를 쿨찐이 그럴싸한 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것이 사실 쿨찐이 아니라 진짜로 염세주의자들이 떠드는 얘기였단 걸 알게 돼서 기분이 굉장히 미묘했다. 딱히 기쁘지 않다는 점에서 나 역시 일부는 염세주의자란 걸 확인했다.
이 책의 말미에 스스로 자조하듯, 염세주의자의 시각을 달고 살아가는 건 그리 현명한 생각은 아니다. ‘그리 현명한’ 정도가 아니긴 하다. 인터넷 곳곳에 만연한 쿨찐들의 헛소리들만큼이나 염세주의적 태도는 대다수의 낙관론자로 하여금 불쾌함만을 야기할 뿐이다. 대다수의 낙관론자가 그렇듯, 염세주의적 시각을 갖추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울증이란 아주 유명한 질병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몇몇은 이미 앓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건 마치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다. 낙관론자의 세계에서 교통사고는 ‘존재는 하지만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일어난 순간, 그것이 일어나기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 우울증 역시 마찬가지다. 감정을 죽이고 의미 창출을 중단한 잿빛 세계를 마주한 자에게 필요한 건 더는 작동하지 않는 낙관론적 헛소리들이 아니라 염세주의적 시각이다. 헛소리라고 취급하던 말들이 사실처럼 다가올 수 있단 건, 곧 우리가 믿어온 경구와 지혜들이 실은 지극히 편협한 한쪽의 믿음만으로 이뤄진 반푼이였음을 드러낸다.
낙관론자로서 이 책을 굳이 읽을 필요는 없다. 굳이 이해하려 들 필요도 없다. 어쩌면 평생에 이해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는 편이 아마 인생에 있어서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삶 저 너머에 존재하는 으스스함으로부터, ‘무언가 있음’의 악의가 당신을 덮치고 당신의 낙관론이 더는 작동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 가서 이 책을 펼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생각보다 괜찮은 위로가 될지 모른다.
의식이라는 불치병을 앓는 환자로 입원한 걸 축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