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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게북클럽] 절망맛 김치찌개!

분류: 책, 글쓴이: 용복, 3시간 전, 읽음: 12

내가 그 책을 만난 건 평소처럼 장바구니를 들고 아이들과 남편을 위한 저녁거리를 채집하기 위해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것에 신물이 나 빈 손으로 아무 목적도 없이 양아치처럼 몸빼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슬렁거리던 골목에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을 만난 게 아니라 책의 출처를 만난 거였다. 늘 가던 마트도 피트니스 센터도 아닌 유혹적으로 보이는 수제 아이스크림 집이 있는 골목 어귀에 희한한 간판이 보였다. <4분의 3 사잇집 책방> 저런 곳이 다 있나? 요즘처럼 책이 안 팔리는 시기에도 오히려 개성으로 무장한 동네 책방들이 종종 문을 열곤 한다는 소리를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 듯도 했다. 아이들 학원 정보와 생활정보 사이에 뜬금없이 끼어든 글이라 기억에 남은 모양이었다.

여튼 생각없이 배회하기로 했으니 아무데나 들어가보자 싶어 그 책방으로 향했다. 책방은 정말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이래서 4분의 3 사잇집이라고 한 모양인지 구석도 아니고 가운데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1층 건물은 영업을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어둑했다. 들어가기가 망설여졌지만 여기까지 와서 안 들어가기도 그래서 문을  조심스럽게 밀어보았다.

다행히 문은 열렸지만 녹색 실내등 하나만 켜 놓은 채 구석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묘령의 여인은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오르며 나를 보았다. 나도 여인의 존재에 놀라긴 마찬가지라 서로 민망한 가운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 저기 지나가다가요. 입간판이 보여서요. 책이나 좀 구경할까 해서요.”

여인은 잠시 동상처럼 서 있다가 환하게 웃었는데 어둠 속에서 웃는 모양새가 꼭 얼마 전부터 아이들이 미쳐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나오는 호랑이 더피 같았다. 여인이 말했다.

“그러셨군요. 어서 오세요. 편히 구경하시구요.”

여인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책방의 주인인 모양이었다. 실내의 불을 밝혀준다거나 하는 등의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여인의 실내등 불빛에 의지해 서가의 책들을 살폈다. 죽 놓인 서가의 책들은 하나같이 독특했다. 이게 요즘 유행한다는 독립출판물들인가. 나는 인터넷 서점이나 대형 서점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감성의 표지들을 훑어보다가 한 책 앞에 멈춰 섰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표지였다. 금방이라도 김이 피어오르고 시큼하고 매콤한 냄새가 날 것 같은 김치찌개 실사 사진이 a4크기의 백색 표지 한가운데를 장악하고 있었다. 제목도 책등으로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절망맛 김치찌개!>라는 제목이었다. 뒷표지에는 이런 소개 카피가 적혀 있었다.

‘한밤중에야 자신만을 위한 시디 시고 맵디 매운 김치찌개를 끓여 밥 한 공기와 함께 눈물과 같은 땀을 흘리며 먹어본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여성 서사 절망편! 도메스틱 호러 슬라임!’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도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나 역시 어젯밤에 종일 아이들과 남편 뒷바라지를 하다가 한밤중에야 배달시킨 맵디 매운 닭발과 주먹밥, 계란찜을 먹고 아직도 손마디까지 퉁퉁 부은 상태였다. 이 느낌 뭔지 알지. 내일도 똑같은 하루가 반복될 거라는 조용한 절망이 치밀어 오르는 밤을 알지. 음식이 목 끝까지 차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기분을 알지.

나는 책을 펴보지도 않고 가격만 확인했다. 만원. 단 돈 만원에 살 수 있는 공감대 100퍼센트의 절망. 주인에게로 다가가서 책을 내밀자 여인은 두 눈꺼풀을 나방처럼 파닥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주세요.”

“정말 사시게요?”

물건을 사라고 강권하는 가게는 봤어도 물건을 살까 봐 당황하는 가게 주인은 처음이었다. 신선한 충격을 받은 와중에 여인의 말은 더욱 놀라웠다.

“감사합니다. 실은 이거 제가 쓴 책이에요.”

“예?”

아, 그러니까 이 분이 <절망맛 김치찌개!> 작가인 홍박사님? 홍박사라니 필명이 참 희한하다 싶었지만 작가의 부연 설명에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제가 이래 봬도 박사 과정까지 밟았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여기서 부정기적으로 책방이나 하고 있지만.”

“아, 예.”

실은 나도 석사과정까지 수료는 했다고 부연할까 하다가 관뒀다. 어딜 봐도 40대, 누가 봐도 아줌마에 애 엄마인데 석사과정을 밟았건 고졸이건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홍박사에게 돈을 내고 책을 사서 밖으로 나왔다. 거짓말처럼 사방이 밝아졌다. 마치 어둠 속에서 건져낸 것 같은 책을 보다가 아까 봐 두었던 수제 아이스크림 집으로 들어가 솔티 카라멜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책을 넘겼다.

하얀 종이에 신명조체 11포인트로 또박또박 찍힌 글자들을 읽던 나는 어느새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인공은 나와 같은 40대 주부였고 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밥인 아이들의 겨울방학을 나는 중이었다. 낮에는 음식 냄새만 맡아도 지겹고 아이들 학원과 공부를 챙기느라 신경이 곤두선 속에 콜라와 커피만 들이붓다가, 아이들이 천사처럼 잠들고 남편이 퇴근한 저녁이면 둘이서 함께 야식을 배달시켜 먹는 나날. 하지만 이 야식 시간마저 종일 직장에서 일한 남편을 위로하는 시간으로 변질되고 만다. 술에 취해 남편을 추켜세워주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에게도 돌봄을 받지 못한 주인공은 유독 짜고 시큼한 김치찌개를 좋아해서 새벽마다 목이 말라 깨다가 이내 불면증에 걸리고 만다. 며칠 잠을 걸렀더니 몸이 어쩐지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기분 탓이라고 넘기기에는 손이며 발에 힘을 줄 수가 없다. 하지만 아이들과 남편을 계속 챙겨야만 하는 가운데 몸은 점차로 녹아들고…

고개를 드니 어느새 내 앞에 놓여있던 컵에 담긴 솔티 카라멜 아이스크림 역시 녹아 국이 되어 있었다. 이게 뭐야. 입맛이 떨어진 나는 이어 계속 책을 읽어나갔다.

몸이 녹아 줄줄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아이들도 남편도 그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주인공은 흘러내리는 몸으로 청소와 빨래, 요리를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떨어진 피와 살점이 그 모든 것들에 들어가 엉망이 된다. 마침내 다 녹아버린 주인공은 집 안 전체에 들러붙었다. 그제야 가족들은 짜증을 내며 ‘이게 뭐야!’ 하고 외치고 특히 딸은 ‘난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하고 외치며 놀이터로 뛰어나가 버리고, 남편과 아들은 스크래퍼를 들고 집 안 전체에 들러붙은 주인공을 화난 표정으로 떼어내지만 좀처럼 잘 되지 않는다. 남편은 스크래퍼를 내던지며 이렇게 외치기까지 한다. ‘이 껌 왠지 김치찌개 냄새가 나. 기분 나쁘게.’

이게 끝? 으악. 뭐야. 다 읽은 나까지 기분이 나빴다. 한편으로 나까지 입에서 시고 매운 김치찌개 맛이 날 정도로 실감나면서도 갈 데까지 간 희망 따위라고는 없는 절망적인 이야기에 묘한 위로를 받았다. 나는 녹아버리지 않을 거야, 라면서 과감하게 녹은 아이스크림을 버려버리고 이번에는 커피티라미수 맛으로 다시 주문한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는 한 입 떠서 입 안에서 천천히 녹여 먹었다. 달고 쓴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며 아직도 입 안에 감도는 것 같은 들척지근한 김치찌개 맛을 깔끔하게 지워주었다.

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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