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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개북클럽] 그 책

분류: 책, 글쓴이: 실마리, 6시간 전, 읽음: 11

이모가 오래 살던 전셋집을 운 좋게 물려받다시피 들어갔습니다. 자주 놀러 가서 익숙한 공간이었죠. 특히 책을 모아 놓은 게 마음에 들었죠.

아 참, 공포책 후기. 이 책에도 이모와의 추억이 서려 있죠. 어릴 때, 엄마와 서점에서 본 책이고 갖고 싶었지만 엄마의 대답은 “이런 정서에 안 좋은 걸 왜?”였습니다. 너무 서운했죠. 그래서 나중에 이모에게 하소연했더니, “어디 서점? 책 제목은?”

네. 이 집에서 바로 저를 데리고 나온 이모가 사주셨죠.  하지만 엄마한테 들키는 게 겁이나 이모에게 맡겨야만 했답니다. 정서에 안 좋긴 개뿔, 이런 것도 보고 자라야 대범한 어른이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모가 도배와 청소를 다 한 뒤에 제가 가지고 싶다 한 가구 몇 개를 남겨 주셨어요. 책장도 그중 하나였죠. 그 안에 유일하게 남은 그 공포책도요. 전화로 물어보니, “무슨 책? 가구 말고는 남겨 놓은 거 없는데? 다 확인했어.”라 대답하더군요. 하긴, 오래된 책이니 잊을 수도 있죠.

내용은 이래요. 천재지변과 함께 멸망해 가는 세상에서 한 소녀가 홀로 애쓰는 이야기. 좀 특이한 게 제4의 벽, 그러니까 독자를 향해 대화를 거는 주인공이었어요. 세상을 구하는 법은 몇 명의 영웅이 사명을 이어가며 자신을 희생해 찾아냈고 소녀는 실행만 하면 됩니다.

대사는 이렇습니다.

“이게 소설로 읽히고 있다는 거 다 알아요. 지금 저를 보는 당신. 지금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제가 처음으로 말한 신의 이름과 기도문을 이미 읽었죠? 그걸 당신도 읽어주세요. 저 혼자서는 발동할 수가 없어요. 부탁드려요.”

신의 이름과 기도문은 찾아가기 험난한 장소에 있었습니다. 단순히 이름과 기도가 아니라 정해진 장소에 가서 제대로 된 기도 의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더군요. 그 의식에 독자를 포함하는 전개가 신선했죠.

멸망하는 세계관답게 괴물과 사악한 마법사들이 소녀를 방해하죠. 주인공답게 훌륭한 스승에게 배운 마법과 검술, 아이템으로 다 물리치지만요. 이 중 한 마법사는 이런 대사를 합니다.

“그런 걸 원하는 신이 정말 세상을 구해주리라 믿는 것이냐! 넌 속고 있어! 설령 살아남더라도 그건 시간을 늦출 뿐이다!”

이 동화같은 스토리가 호러 장르로 구분되는 이유는 끝에 가서 나와요. 주인공이 독자에게, 제게 이렇게 말하거든요.

“사실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제가 찾은 열셋의 신의 이름은 지금 이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신들이랍니다. 그들은 우리 세계를 살리고 싶으면 다른 세계를 바치라 했어요. 당신이 보는 책은 우리 세계와 당신 세계를 잊는 매개체. 이젠…. 돌이킬 수 없어요.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이제… 안녕.”

대사의 끝이 바로 소설 완결입니다. 모험이 끝난 뒤 에필로그가 이어지기 마련인데 이건 그것도 없었죠. 그래도 재미있는 책이었죠.

모르던 사람이 잊고 간 책이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니, 좀 이상하지만 재밌으면 그만이죠. 요새 흉흉하잖아요? 남극 일부가 갑자기 사라졌네, 캐나다의 어느 마을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네 하는 사건들 말이죠. 진짜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가구가 꽤 남아있는 집을 싸게 얻은 행운이라도 있어야 그나마 살맛이 나겠죠. 특히 책장이 마음에 들어요. 다 가져가고 깨끗하게 비워진 책장을 제 책으로 하나하나 채워가는 즐거움이 기대됩니다.

실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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