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님께서는 육체적으로 많은 고생을 하신 분이에요.”
15년 전 선친이 마지막 머물던 병원의 담당의사가 전했던 말입니다.
3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19살이 되던 해에 한국전쟁(6.25전쟁)이 발발했고, 청년기에 들어서던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할아버지)와 함께 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훈련을 받기 위해 제주도로 떠났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말씀으로는 징용이라고 하는(아마도 일제시대에 겪었던 용어를 그대로 쓰신 것 같습니다.) 일종의 물자들을 수발하여 전쟁에 참여하여 전투를 지원하는 인원으로 군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전쟁에서 할아버지는 포탄에 맞아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5년이라는 긴 시간 군생활을 하셨습니다.
남편을 잃고 장남을 전쟁 통에 보낸 할머니께서는 이때부터 담배라도 피워서 속을 달래라고 하는 옆집 아주머니의 권유로 담배를 피우셨다고 합니다.
– 할아버지는 원래 국립묘지에 묻히셔야 하는데 할머니의 반대로 지금은 먼 고향, 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선산에 모셔있습니다. 해마다 현충일이면 할머니께 현충원으로 모신다는 편지가 오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 전에 고향에서 서당 훈장도 하셨다고 들었었는데, 우리 형제들은 그 이후에 태어났기에 그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저는 형제 중에 늦둥이(큰 형님과는 15년 이상 차이)로 태어났기에 제가 아는 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며, 적지 않은 가족을의 생계를 돌보시는 모습만이 있을 뿐입니다.
말이 건축업이지, 고향을 떠나 올라와 자본없이 시작한 일이 쉬웠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간혹 아버지께서 집을 짓기 위해 차입한 대출업자들에게 시달리시던 기억의 잔재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캐드같은 것들 때문에 요사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건축도면이 그려진 청사진들이 안방 한 쪽을 차지하고 있기도 했죠.
아버지는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상처와 아픔을 가장 많이 알고 계셨습니다. 전쟁 중 군인들에게 군수 물품이든 식료품이든 무엇이든 부족하여, 어떨 때는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거나, 민가에 구걸을 하면서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같은 부대에 있던 탈영병이 씌운 누명(절도)으로 부대원들에게 죽도록 맞은 기억 때문에, 몇 십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그 사람을 보게 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씀도 하셨다고 합니다.(아버지는 오래 전 개신교에 귀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요.) 전쟁이라는 역사 속에 한 개인의 고통스런 이야기가 남겨 있는 겁니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파킨슨 병을 얻으셨고, 늦둥이 막둥이가 장가가는 것은 꼭 보고 가야할 텐데하고 눈물을 지으시기도 하셨습니다. 거동이 힘들고 병세가 악화되 마지막 2년 간은 거의 병원에 계셨는데, 저는 그때서야 의사로부터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폐결핵도 앓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육체적으로 많은 고생을 하신 분이에요.“
의사의 저 말은 제게 많은 의미와 아픔을 담은 말이었습니다. 그 말속에 아버지께서 겪었던 세월의 상흔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오랜만에 그토록 생전에 장만하고 싶어 마지않았던 선산에 스스로 묻히신 아버지를 뵙고 왔습니다. 거리가 멀어 꼬박 하루를 왕복해야 하거나 고향에 유일하게 남아계신 숙모님 댁에 하루를 신세져야하는 거리라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한 불효자이지요.
증조대와 할아버지, 할머니, 둘째 숙부님이 모여 계신 그곳 선산에서 아버지는 편안하신지 여쭈었습니다. 저는 힘들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고맙다고, 세상에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전해 드렸습니다.
뜨거운 온도의 대지처럼 각박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래도, 나의 기원과 그 기원 기원과, 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문득 아버지가 떠올라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올려봅니다.
건강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