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손
책을 읽다가 책장 사이에서 손이 하나 불쑥 튀어나와 내 손을 턱, 잡는 순간이 있습니다.
꼭 손이 아니어도 좋아요, 목구멍 깊숙히 들어와 심장을 꾹 쥐어짜거나.
‘히스토리 보이즈’라는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에 이런 대사가 나오더군요, 헥터 선생의 대사입니다.
‘독서가 주는 최고의 경험이 뭔지 아니? 가만히 읽어내려가다가 문득 어떤 생각 혹은 어떤 느낌, 어떤 관점을 마주하는데 거기에 너만의 특별한 문장, 그러니까 아주 사적인 너의 생각이 고스란히 적혀있는 거야. 너와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 네가 만나 본 적도 없고 심지어 수 세기 전에 죽었을 수도 있는 사람인데. 문득 책 속에서 손이 하나 쑥 튀어나와, 너의 손을 움켜쥐는 거지’
나는 다시금 망가지고
속아 넘어가고
또다시 울다 웃는 어린애가 되네
매혹당하고 괴로워하고 어리둥절한 채로
잠들 수 없는 건
잠들지 않는 건
사랑이 내게 와서 잠들지 말라 하는 까닭이니
영문을 모른 채 매혹당하고 괴로워하네
마음은 아프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한들, 그 또한 어떠한가
그저 그의 웃음만으로도 내겐 사랑이 충만한데
비록 그 웃음이 나를 향한 비웃음이라 해도
그를 향해 노래하리
다가오는 봄마다
그가 걸친 실오라기 하나도 경배하리
매혹당하고 근심어리고 어리둥절한 채로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 history boys
네, 왜 인용을 먼저 하지 않고 제 얘길 먼저 했냐면
영화 속 헥터 선생이 말한 ‘책 속에서 손이 쑥 튀어나와 네 손을 움켜쥔다’는 문장 자체가 저에겐 손이 쑥 튀어나와 제 손을 움켜쥔 문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떠올려왔던 아주 사적인 묘사인데 그게 토씨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나오더라고요. 그 의미와 표현 때문에 이중으로 흠칫했던 기억이 나네요.
사람이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 그렇지요.
만나본 적도 없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 책 속에서 내 손을 턱 하고 움켜쥐는 거예요. 그런 순간.
‘그녀에게 음악을 연주해주시고, 집안을 꽃으로 가득 채워놓으시고, 새들이 지저귀게 하시고, 바다로 데려가 해지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녀에게 베풀어 주십시오. 행복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세상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습니다.’
– 사랑과 다른 악마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영화 멜랑콜리아의 마지막 장면은 언젠가 제가 꿈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이었어요.
스크린을 뚫고 불쑥 내밀어지는 손. 그 손을 덥썩 잡지 않을 수가 있나요.
때로는 그런 문장을 제공해주고 싶은데, 그런 건 의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죠. 시공간을 뛰어넘어 당신과 내가 공명하는 우연, 우연의 힘이 필요할 뿐.
하지만 내 능력으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정신나간 것들을 간단히 서술된 문장으로 만나는 기쁨은 오늘도 도저히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 손을 덥썩 잡기 위해, 그 손에 덥썩 잡히기 위해.
이제와서야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아
내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서있게 된 건지
난 좀 더 강해져야겠다고, 자유로와져야 한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니었어
석연치 않은 게 있어, 뭔가 놓친 것이…
그건 틀림없어, 애초에도 이럴 줄 알고 있었지만
석연치 않은 게 있어, 뭔가 빠뜨린 게…
아니, 이런 식일 줄은 사실 몰랐었던 것 같아
내 능력으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정신나간 것들을
어느날, 어느 책 속, 어느 페이지에서
너무나도 간단히 서술된 한 문장으로 맞닥드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어
물론 아주 유심히 들여다 본다면 말야
하지만
아직 석연치 않은 게 있어, 뭔가 놓친 부분이…
그 점은 변함없어, 그럴 줄 알았어
의혹이 들어, 뭔가 놓친 게 있다는…
내가 한 번이라도 이해한 적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겠어
하지만 인생의 아주 작은 조각들을 모두 들여다 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그저 저만치 물러서서, 그 파편들의 풍경을 멀찌감치 바라보면 어떨까
자, 외투를 챙겨들고 그만 문 밖을 나서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깊이 들이마셔봐
네 마음쯤은 네 맘대로 해도 좋잖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입을 맞추고 작별을 고해
의혹은 남을 거야, 뭔가 놓친 게 있다는…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아프진 않잖아
석연치 않은 게 있어, 뭔가 빠뜨린 게…
괜찮아, 모든 걸 다 이해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Doubts remain / Ar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