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G 첫 장편 출간작 ‘짐승’의 신원섭 작가를 만나다!

2018.2.8

지난주 금요일 오후, 브릿G 인기 연재작이자 첫 번째 출판 지원작으로 선정된 장편소설 ‘짐승’ 단행본 출간을 기념하며 신원섭 작가님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

채널예스에 소개된 7문 7답 인터뷰 문답 내용이 알차서 다른 콘셉트를 고민하다가 ‘스포일러 리뷰’ 같은 방식으로 작품에 대해 보다 노골적인 인터뷰를 진행해보면 어떨까 싶었고, 작가님과 작품 전반에 대해 두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매거진 본문에서 중요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완독하신 분만 선택하여 읽을 수 있도록 편집하였습니다.

더불어 미술부 다희 님 & 내가그린기린그림 님께서 사진 촬영에 힘써주시는 와중에 함께 건네주신 질문들도 한데 담았는데요. 작품 전반에 대해 나눈 이야기는 물론, 글 쓰기의 시작과 앞으로의 작업에 대해 전해들을 수 있었던 흥미로운 인터뷰를 함께 만나보세요!

 

 

짐승’의 여섯 인물 탐구

Q. ‘짐승’의 구성은 네 명의 인물들이 번갈아가며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인물 시점의 변환을 소제목으로 풀어낸 연재 분을 따라 읽으면서 이런 구성이 탄력을 받는다고 생각한 지점이 있었는데요, 남에게 쉽게 공개하기 힘든 길티플레저나 지저분한 습관 같은 것들이 일상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구성으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인물들을 한 명씩 살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각 캐릭터를 구상하실 때 작가님께서 생각하셨던 이야기를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 사실 인물들의 세세한 설정, 분명 기분 나쁘게 여겨지는데 묘하게 공감이 되는 부분은 처음 쓰면서부터 염두에 둔 것들이에요. 사람들이 그런데서 공감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의도가 있어서 구상을 했던 것이고요.

여러 명을 번갈아가면서 시점 전환을 한 것은 제 숙련도가 떨어져서 그런 점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단편만 써봤는데, 제 단편들을 보면 다 교차 시점으로 진행이 되거든요. 그 구성을 그대로 차용해서 장편 분량으로 끌고 가려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분량 때문에 사람들을 한 명 두 명 더하게 됐고요. 근데 인물이 너무 많으니까 정신이 없더라고요.

인물들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어요. 예를 들면 최준과 오동구는 처음 구상에서는 각자 시점이 분리된 캐릭터였는데, 둘의 시점을 하나로 묶어서 나름 줄인다고 줄였던 거예요. 그런 부분에서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는데 하다 보니까 또 배우는 게 있어서요. 다음 작품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요. 사람 수도 좀 더 줄이고, 시점 교차는 이제 안하려고 합니다.

장근덕

Q. 장근덕의 경우엔, 혼자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피는 행동이 드러날 때 캐릭터의 성격이 어느 정도 파악되었습니다. 바보처럼 웃으며 적개심을 숨기는 걸 스스로의 장기로 여길 만큼 결핍이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A. 장근덕은 제일 먼저 생각한 캐릭터예요. 주변에 이미지가 비슷한 친구가 한 명 있었어요. 남이 보기엔 저희들끼리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들 속으로 ‘내가 쟤보다는 낫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물론 아무도 그런 말은 안 하죠. 근데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는 다들 은연중에 무시를 해요. 언젠가 이런 걸 글로 써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장근덕하고 최준을 제일 먼저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최준
Q. 최준은 전형적인 강약약강 스타일이에요. 오동구에게 품는 열등감마저 전형적이고 어떤 인간 유형의 표본처럼 읽힙니다. 누군가의 연인을 트로피처럼 평가하고 또 그 트로피를 차지하지 못해서 열등감이 치솟는데, 그러면서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임을 확인받기 위해 오동구와 어울리는 것을 포기하지 못해요.

A. 최준은 저 자신의 지질한 면들을 강조해서, 과장되게 만들어본 거예요. 나한테 이런 지점이 있구나. 내가 이럴 때 열등감을 느끼는구나 하고요. 저는 남중남고를 나왔는데, 대학교 1학년 때 동창 중에 한 명이 제일 먼저 여자친구를 사귀게 됐어요. 그때 다들 축하해주면서도 속으로는 묘한 시기질투를 하는 거죠.(웃음)

걔가 우리보다 뭔가 앞서나가는 느낌이었죠. 그게 정말 지질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더라고요. 소설에서처럼 극단적인 건 아니었지만 크게 다를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걸 써보고 싶었던 게 있어요.

오동구

Q. 오동구는 사교적인 부분에서 목을 매는 캐릭터인데, ‘사교적 갈망’이라고 표현하신 부분이 오동구 인생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될 거 같아요. 대인관계에서 평등하지 못하다 보니 사체 처리를 대신하러 나설 정도로 자존감은 빈사 상태인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누리고 있는 생활이나 조건을 감각하지 못할 정도로 둔한 인물은 아니에요. 자신을 끝없이 멸시했던 최준에게 ‘너나 나나 똑같다’고 일갈하는 것도 그런 배경이 있어서라고 느꼈어요.

A. 오동구가 겪는 실패한 과거 연애사가 있잖아요. 연애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있는데, 사실 오동구도 주변 사람한테서 따왔어요.

Q. 아, 이번에도요?( 일동 :smile: )

A. 여섯 명의 캐릭터 모두 그런 부분이 커요. 예전에 석사 때 알고 지내던 형이 있었는데 사교적인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어느 날 밤에 그 형이 자취방에 갑자기 찾아와서는 술 한잔 하자는 거예요.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닌데 왜 그러지 싶었는데, 갑자기 울면서 자기 연애 얘기를 하더라고요. ‘나는 이제까지 제대로 된 사랑을 못 해봤다’면서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런 것도 한번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남의 얘기를 제 소설에 쓰는 것도 이상하긴 한데, 양해를 구하고 소설에 써도 되냐고 했더니 오히려 본인 얘기를 써 달라 더라고요. 아마 자기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Q. 주변에서 일어나는 인물이나 감정을 잘 기억하고 있고 그것들에 대해 더 파고들고 싶으신가 봐요.

A. 네, 제가 원래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것도 아니고, 기계공학 전공이거든요. 그래서 취미로 글 쓴다고 하면 주변에서 되게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이 본인 얘기를 많이 해줘요. 단편소설 습작을 보여줬을 때, ‘그럼 내 얘기도 써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짐승’에서는 특히 안 좋은 부분만 모아서 과장을 한 거니까, 이 소설을 보여주면 별로 좋아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웃음)

도미옥

Q. 도미옥은 사실 다른 인물들에 비해 캐릭터의 깊이가 가장 부족하게 느껴진 인물이에요. 도미옥이 도미애를 질투하게 된 일련의 가정사가 짧게 드러나긴 하지만, 도미애와 척을 질 정도로 그 인과가 완전히 납득이 되지는 않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뒤에 가서 드러나는 반전의 구성도 한몫 했겠지만, 도미애가 도미옥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처럼 가끔은 독자 입장에서 도미옥의 존재를 잊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캐릭터가 이런 모호함을 돌파해서 독자에게 가닿을 수 있는 지점이 바로 ‘돈’이라고 생각했어요.

A. 도미옥은 기능적으로 들어간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이야기의 취약점을 메우기 위해 넣은 인물이다 보니, 이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동기가 없더라고요. 제 생각엔 가장 간단하고 합리적인 동기가 돈이었어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는 건 돈 아니면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랑 때문에 이상한 짓을 하는 건 주로 남자들이 그러는 것 같고. 여성 인물을 생각해 보니 돈이 제일 설명이 잘 되지 않나 싶었어요.

사실은 반성을 많이 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해요. 주렁주렁 님이 브릿G 리뷰에서도 지적해주셨듯이, 이 사람의 욕망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거죠. 그래서 차기작에는 인물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어요. 초안은 지금 다 써놨고, 이제 고치고 있는데요. 두 명의 여성이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이야기예요. 제가 남자다 보니 여성의 입장에서 욕망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람이니까 똑같겠거니’ 싶어 일단 초안은 썼는데, 잘 고쳐서 만족스런 작품을 완성하는 게 목표입니다.

Q. 그럼 이런 피드백을 받고 작품의 캐릭터를 고치게 된 걸까요.

A. 그렇죠. 2018년 안에는 완성할 예정이에요.

도미애

Q. 도미애는 표면적으로 바로 이미지화하기 쉬운 인물이에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비춰지는 캐릭터처럼, 미모의 30대 중년 여성으로 표상되었어요. 도도함을 넘어 표정이란 것이 지워진 얼굴. 치부가 없는 인물인데요.

A. 도미애는 노림수가 분명한 캐릭터예요. 악당이긴 한데, 여성이 악당으로 나올 때 전형적인 면들이 분명 있잖아요. 전통적인 하드보일드의 팜므파탈은 결국 마지막에 파멸한다거나. 팜므파탈의 악당 짓 자체도 주도적이지 못 하잖아요. 항상 누굴 유혹하거나 이간질하는 식이라, 이런 것과는 다르게 좀 ‘끝판왕’ 느낌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 쓸 때부터 도미애는 파멸시키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도 염치없는 사람들이 성공하기 편하잖아요. 사실은 도미애라는 이름 자체도 이토 준지의 만화 ‘토미에’에서 따온 거예요. (일동 웃음) 은근히 잘 어울리는 것 같더라고요.

이진수

Q. 마지막으로 이진수는 어쩌면 가장 ‘짐승’에 가까운 인물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런데 자신의 욕망을 의외로 쉽게 인정하더라고요. 이진수가 처음 설정에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니 좀 놀라웠고 나중에 끼워 넣는 게 어려운 캐릭터라고 느껴졌는데, 정말 많은 수정과 퇴고를 반복하신 것 같아요.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탐정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대상으로 이진수를 고려하신 건가요?

A. 막판에 흩어져 있는 시점들을 하나로 모아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어요. 정말 필요에 의해 들어간 캐릭터인데, 그러다 보니 밋밋한 느낌이 있는 거예요. 전형적인 탐정 캐릭터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좀 더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려고 했어요. 소아성애는 절대 용납이 안 되지만, 이진수 같은 경우는 선천적인 부분이 있다 보니 나름의 고뇌는 있겠다 싶어서 고민도 같이 담아봤고요. 그런 식으로 다른 ‘쎈’ 캐릭터들과의 밸런스를 좀 맞춰보려고 했어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바닥 같은 것

Q. 책에 실린 리뷰에서도 언급되지만, 소설 속 인물들에게 독자들이 이입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어떤 인물들에게 느껴지는 모종의 공감 같은 게 있더라고요. ‘이 사람은 나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어디에 내놓고 말하지는 못하는 공감 같은 거요. 특히 장근덕의 자취방의 풍경이 나올 때, 지나치게 세세한 묘사 때문에 불쾌할 정도였는데 혼자 있을 때에만 드러나는 지저분하고 저열한 습성 같은 것들이 낱낱이 나오기 때문이었어요. 어떤 공통분모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지점으로 인해 독자들의 공감을 받기 힘들 거라는 걱정은 안 하셨나요.

A. 걱정하진 않았고, 오히려 처음부터 장점이라고 생각했어요. 공간을 모호하게 퉁치고 넘어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예를 들어 ‘서초구 반포동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실존하는 공간이긴 하지만 반포동에 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봤을 땐 아무 의미 없는 거잖아요. 차라리 가상의 공간이더라도 진짜처럼 느껴지게 해야겠다고 판단한 거죠.

그리고 저도 자취를 오래 했으니까요.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점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단지 그런 건 아무도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죠. 말을 하는 순간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으니까요. 이 생각을 했던 계기가…

Q. 혹시 이번에도 지인들의 이야기인가요.( :smile: )

A. 네, 저는 사전에 다 양해를 구하기 때문에요.(웃음) 오래된 얘기예요. 대학생 때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시는데 비슷한 얘기가 나왔었어요. ‘나는 혼자 있을 때 이러는데, 너네도 그렇지 않느냐’는 식으로요. 코딱지를 파면 자꾸 안으로 들어가서 짜증이 난다는 식으로. 그렇게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니까 다들 공감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중에 딱 한 명이 아무도 공감을 못 하는 얘기를 했어요.

Q. 아, 이건 말할 수 없는 이야긴가 보네요.(웃음)

A. 네, 이건 말을 못할 정도로 지저분한 얘기라서요. 그때 ‘나중에 이런 걸로 써 봐도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들 공감은 하지만 말을 안 하는 지점들이 있는데, 나 혼자만 느끼는 것도 분명 있을 테고요. 늘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짐승’을 쓰면서 그때 생각이 좀 많이 났어요.

 

악(惡)에 대하여

Q. 아까 작가님이 하신 얘긴데 작중에서 이진수가 “사람이 악의를 품는 이유는 보통 두 가지다. 사랑 아니면 돈.”이라는 말을 해요. ‘짐승’에서 가장 집중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뭐랄까 악인의 탄생에 거창한 서사를 부여하는 게 아니거든요. 내재된 성향을 넘겨짚으려 한다기보다 대표적인 스케치로 인물을 조명해요. 단적으로, 장근덕이 처음에 자취방에서 여자 시체를 발견하고 저지른 일련의 행위들을 보면 그냥 절로 알게 되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또 이후에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하는 것들이요. 사실 사회 현상적으로 보면 요즘도 범죄 사건에서 특정 병리적 용어에만 집중하거나 ‘묻지마 범죄’라는 식으로 모호하게 퉁쳐버리곤 하는데, ‘짐승’에서는 저열한 인물들의 선천적 기질에만 의존하지 않아서 좀 다른 고민도 같이 하셨던 게 아닐까 추측해봤습니다.

A. 그런 식으로 쓴 게 개인적으로 제 취향이기도 해요. 요즘 책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사이코패스나 살인자가 마치 슈퍼히어로 같은 느낌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싸움도 잘하고 현실에서 능력도 좋고… 이런 설정들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해요.

‘양들의 침묵’도 보면, 한니발이 사이코패스인 것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아무도 이 사람과 맞서서 이길 수 없는 것처럼 나오잖아요. 그런 걸 좀 피해보고 싶었어요. 오히려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면 악당이 안 됐을 거 같거든요. 인간사회라는 게, 착하게 살면 편하잖아요. 아쉬울 게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악한 행동을 할 이유가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저는 반대로, 악인들은 뭔가가 잘 안 풀리거나 남들이 무시해서 화가 나 있지 않나 생각해요.

사실 진짜 무서운 것들은 ‘악’이라고 명확히 규정하기 힘든 지점에 있는 것 같아요. 회사생활을 예로 들면, 나에게 못되게 구는 상사에게 내가 고통을 받아도 객관적으로는 그 사람을 악인이라고 할 순 없잖아요.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 뭐라 말하기 애매한 게 있으니까요. 오히려 그런 게 더 무서운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피아식별이 확실하면 단죄는 쉽죠. 영화 ‘그것’을 보고 나서 느낀 것도 비슷한 지점이었어요. 분명한 존재로서 악당이 있으니까 ‘우리들이 힘을 합하면 악에 맞서 대적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명확하게 나오지만, 그 아이들이 나중에 어른이 돼서 사회에 나가면 뭔가에 대항하려고 해도 힘이 모이질 않는 거죠. 각자 상황이나 이해관계가 다르니까요.

세상이 그렇게 복잡하니까 악당도 단순해서는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좀 하긴 했어요. 그런데 또 소설이다 보니까 악당이 없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도미애도 쓰다 보니 캐릭터 자체가 과장되게 발전한 부분도 좀 있는 것 같고요. 초기 단계에서는 사실 이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거든요.(웃음)

Q. 저는 도미애를 떠올리면 ‘내가 돈 많은 늙은이랑 사는 걸 부끄러워 할 줄 알았어?’라는 대사가 바로 연상돼요. 이런 것처럼 ‘악’에 대해 고민한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 신경을 쓴 대사 같은 게 있는지도 궁금해요.

A. 대사를 맛깔나게 쓰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는데, 고민도 있었어요. 너무 구어체에 가깝게 쓰면 소설하고 안 맞는 거 같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문어체를 쓰면 생동감이 없어서 그 중간 지점을 찾고 싶었어요.

대사 잘 쓰는 작가 중에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을 많이 읽었어요. 그런데 현실 속의 대화처럼 쓰면 또 소설 같지 않게 느껴져서요. 진짜 이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쓰고 싶다고 생각해서, 고쳐 쓰는 과정에서 캐릭터에 맞게 정착이 되어간 거 같아요. 어떻게 보면 그러려고 퇴고를 하는 거니까요.

Q. 퇴고를 열댓 번 정도 하셨다고요.

A. 네, 퇴고를 정말 많이 했어요. 2014년부터 초안을 쓰기 시작해서 브릿G에 연재를 시작한 게 2017년 2월이니까요. 그 사이에 계속 고치고 뒤집어엎고, 인물을 넣었다가 빼기도 하고 했던 거예요. 장편은 처음 써보는 거니까 장편만의 리듬에 익숙해지지 못했었어요. 많이 다르더라고요.

Q. 그런데 이번에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또 고치셨잖아요.

A. 책 나오면서 김준혁 편집주간님한테 큰 도움을 받았어요. 피드백을 주신 게 정확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게, 쓰는 단계에서 ‘좀 애매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하고 넘어간 부분들을 기가 막히게 짚어내는 것 같았어요. 그런 지점들에 대해 물어보시는데 약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거든요. 이런 과정을 겪다 보니 저한테도 도움이 많이 됐고, 다음에 쓸 때 염두에 둬야겠구나 하는 지점들이 있었어요.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글쓰기의 시작

Q. 잠깐 ‘짐승’ 이야기에서 벗어나, 글을 처음 쓰게 된 시작에 대해 여쭙고 싶어요.

A. 어떤 계기가 있어서는 아니에요. 대학 때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재미삼아 친구들 이름을 막 넣어서 콩트 같은 걸 쓴 적이 있는데요. 친구들이 그걸 재밌게 보고 좋아해주는 거예요. 친구 한명이 장난삼아 교내문학상에 내보라고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추리소설을 써서 응모했는데 교내문학상이 워낙 작은 규모라 상을 받긴 했어요.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면 상을 받을 만 해서 준 게 아니라 용기를 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 소설이 교지에 실렸었는데, 교지를 죄다 버렸어요. 세상에서 증거를 다 없애야겠더라고요. (일동 웃음)

그때 당시에 희곡 ‘만선’을 쓰셨던 천승세 작가님이 심사를 하셨는데, 심사평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어요. ‘추리소설도 문학의 한 종류인 만큼 앞으로도 열심히 썼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큰 용기를 주셨던 거죠.

그런데 그때는 어렸을 때라서 정말 제가 잘해서 상을 받은 줄 알고, 신이 나서 막 습작을 하기 시작한 거죠. 추리소설 습작을 하다 보니 고전 추리물 위주로 많이 읽었는데 재밌더라고요. 그러다가 한번은 에도가와 란포 작품집을 읽는데, 뭔가 다른 거예요. 트릭이나 반전으로 독자를 재밌게 하려고 쓴 소설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나도 이런 거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또 황금가지에서 나왔던 최혁곤 작가님의 ‘B컷’을 되게 재밌게 읽었는데, 최혁곤 작가님이 습작생들 도와주시던 인터넷 카페가 있었어요. 거기 가입해서 글 올리면 피드백을 해주셨거든요. 최혁곤 작가님은 실제로도 몇 번 뵀다가, 얼마 전에 ‘짐승‘ 출간되고 나서 다시 한 번 뵙게 됐어요. 그때 저한테 대견하다는 얘길 하셨어요. 그 당시에 습작하던 사람들이 30~40명 되는데, 그중에 지금까지 글을 쓰고 이렇게 책으로 낸 경우가 몇 없다는 거예요.

결국은 어떤 계기가 있고 뜻이 있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기보다는, 중간 중간 도움주신 분들이 있어서, 그게 너무 감사하게 느껴져요. 한동안은 성과가 너무 없다보니까 그만둘까 고민도 했는데 정명섭 작가님 같은 분들이 격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Q. 한국추리스릴러단편선 다섯 번째 작품집에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단편을 게재하셨잖아요. 이것도 마찬가지로 주변에서 제안을 해주신 건가요.

A. 네, 그때도 정명섭 작가님 통해서 원고를 보냈어요. 지금은 후회를 많이 하는 단편 중에 하나예요. 그때 석사 유학하던 때였는데, 외국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시간이 너무 없었어요. 취업 준비도 하던 때라 할 일은 너무 많고 졸업까지는 한 학기밖에 안 남아서 단편 두 개를 급히 고쳐서 쓴 건데, 읽으시는 분들마다 기가 막히게 아시더라고요. 따로 도는 이야기 두 개를 억지로 섞어 놓은 것 같다는 리뷰를 볼 때마다 피눈물이 나요, 정말.

그런데 이걸로 누굴 탓할 수도 없잖아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짐승’ 같은 경우에는 출간 계약을 한 이후에도 열심히 퇴고했던 거 같아요. 단편선 때 호되게 교훈을 얻은 전례가 있으니까요. 한번 책이 나오면 돌이킬 수 없구나 싶어서 너무 후회되더라고요.

최근에 또 실감한 게, ‘짐승’에 대해서 써주신 리뷰를 읽었는데요. ‘단편선에 실린 작품은 구려서 기대를 안했는데 이번 건 좀 괜찮네.’라는 식의 평가가 있었어요.(웃음) ‘짐승’ 리뷰는 매일 인터넷 검색해서 찾아보거든요. 장편을 낸 게 처음이다 보니까 궁금해서 자꾸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Q. ‘짐승’은 처음으로 혼자만의 이름이 들어간 결과물이 나온 건데, 기분이 어떠셨나요.

A. 사실 엄청 좋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까지 좋진 않고 오히려 ‘아, 이제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음에 더 좋은 작품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편집에서는 책임감도 참여한 작가 분들 수만큼 나눠지는데, 장편을 내면서 제일 큰 경험이라고 생각한 건 아무래도 무게감이 달랐던 거랄까요.

책도 하나의 제품이잖아요. 작가는 제품에 콘텐츠를 납품하는 사람이고요. 편집, 디자인, 마케팅 등 하나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공수를 들이는 거니까, 제가 제 몫을 해내지 못했을 때 책임감이 좀 들겠더라고요.

반면에 기쁜 건… 서점 매대에 제 책이 놓인 걸 보는 게 정말 좋았어요.(웃음)

Q. 책이 나오고 부모님이나 주변에서 ‘짐승’을 읽으신 분이 있나요.

A. 어머니가 보셨어요. 어머니는 제가 글을 쓴다는 걸 별로 진지하게 생각 안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연재할 때는 별다른 얘기를 안 했고요. 근데 얼마 전에 출장을 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니께서, 무슨 출판사에서 저한테 택배가 왔다는 거예요. 뜯어보니까 ‘짐승’ 스무 권이 있으니 이게 뭐냐고 물으시는 거죠.

이번에 나온 제 책이라고 말씀드리니까 정말 좋아하시면서 친척들한테 선물해야겠다며 한 권 가져가셨어요. 그런데 다 읽으시더니 말이 없으세요.(일동 웃음) ‘너무 재밌다, 술술 읽힌다’ 하셨는데, 다 보시더니 제 책장에다 그냥 꽂아놓고 가셨어요.

 

 

 

세계의 진창 같은 곳, 성환 연립

Q. 그럼 다시 돌아와서 공간 얘기를 좀 하려고요. ‘짐승’의 주 배경이 되는 가양시는 영화 ‘아수라’의 안남시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신도시의 사타구니 같은 곳’이라는 표현처럼 화려한 신도시 사이에서 유난히 낙후된 도시에 있는 성환 연립이라는 공간을 빼놓을 순 없는 것 같아요. 세입자를 돌리려고 싸게 대충 지은 건물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알 여력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건물 관리인마저 손을 제대로 쓸 필요가 없는 노후한 빌라잖아요. 이곳에서 모든 사건이 시작되고, 이곳에서 발생한 사건의 흔적을 소멸하려 멀어지려 노력하고 다른 공간에서 애써보지만, 결국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암시해요. 사실 여기서 숙식을 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장근덕 한 명뿐인데 성환 연립이라는 공간을 관통하고 경유하는 사건의 귀결이 좀 흥미로워요.

A. 공간 자체는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이 있어요. 업무차 지방 소도시에도 출장을 많이 다녀요. 화력발전소가 있는 도시들, 이를 테면 북평시나 동해시 이런 곳은 사람들이 잘 안 가요. 여수도 산업단지 쪽은 안 가잖아요. 그런 데를 가면 딱 느껴지는 쇠락한 소도시의 이미지가 있어요.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데 아파트가 덜렁 들어 서 있고. 그런 이미지를 차용해서 섞어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고요.

가양시 같은 경우는 짐작하시겠지만 가양동을 그냥 가양시로만 바꾼 거예요. 실제로는 없는 도시명을 만들려고 지도서비스에 검색을 했는데, 가양시를 입력했더니 아무것도 안 나와서 넣게 된 거예요.

소설에서 신도시 쪽 번화가나 유흥가 묘사는 몇몇 산업단지들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어요. 산업단지 옆에는 늘 유흥가가 있거든요. 네온간판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낮이랑 밤이랑 완전히 풍경이 다른데, 그런 게 좀 인상적이었어요. 쇠락한 소도시와 유흥가들을 섞어서 배경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물들하고도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고요. 가양시가 가진 속성이 ‘짐승’의 캐릭터와 비슷한 부분도 있는 것 같거든요.

그리고 제 친구 중에 성환이라고, 건축과 나온 애가 있어요.(웃음) 예전에 그 친구가 흑석동에 작업실 인테리어할 때 며칠 도와준 적이 있거든요. 그 작업실도 정말 낡고 허름한 건물이었는데 월세는 또 비쌌어요. ‘성환연립’은 그때 생각하면서 쓴 거예요.

그리고 그 공간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건, 사실 어떤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기교적인 측면에서 이야기 구조를 그렇게 구성해야 할 것 같았어요. 흩어진 시점들을 하나로 꿰는 데 ‘이진수’ 같은 인물이 필요했듯이, ‘성환 연립’ 같은 공통된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고요.

다만 여기서 또 반성해야 할 지점을 찾았는데, 동선을 치밀하게 생각 못 했어요. 각 인물들이 이 도시의 어느 동네에 살고 있는지, 이동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등… 중간에 너무 많이 수정하다 보니 저도 헷갈리는 거죠. 지금은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해요. 차기작에서는 등장인물이 어느 동네에 살고, 거기 가는 데 몇 시간 걸리고 하는 걸 미리 생각하고 있어요.

Q. 저도 그런 생각은 했지만 사실 별로 개의치는 않았던 게, 약간 이 공간이 주는 그런 특수함 때문이라고 여겼거든요. 어딘가에서 각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모일 수밖에 없는 그런 귀결성이 있다고 느껴져서 많이 신경이 쓰이진 않았는데, 듣다 보니 공간적인 배경을 설계할 때에도 엔지니어의 기질이 묻어나는 것 같네요.(웃음)

A. 플롯 자체를 설계하듯이 생각하니까 편한 면도 있어요. 제가 다니는 회사가 산업용 가스압축기를 만드는데, 저는 거기서 제어시스템을 만드는 일을 해요. 제가 하는 일에서는 이종 시스템 간의 인터페이스 구성이 중요하거든요. 그게 초반에 명확히 정해져야 나중에 일하기가 좋은데, 명확하지 않으면 설계가 계속 바뀌는 거예요. 디테일한 문서나 프로그램도 다 바뀔 수밖에 없고요.

그런 일을 하다 보니 글을 쓸 때도 초기에 얼개를 정해놓고 들어가는 걸 선호하는 것 같아요. 중간에 바뀌면 다 들어 엎어야 하는 부분이 많아지니까요. 그런 건 지금 하는 일에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거죠.

 

 

확신이 불러일으킨 절묘한 시차, 결정적 트릭

Q. 이런 걸 다 한데 모으려면 메모를 틈틈이 하시는 걸까요.

A. 평소에 메모도 하고 노트북에 나름의 데이터를 정리한 게 있어요. 버전별로 관리를 하거든요. 초안 단계에서 썼던 것부터, 리비전이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다 따로 보관을 해요. 나중에 봤을 때 ‘이때는 이랬는데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고 파악이 되니까, 관리를 그렇게 하는 면이 있어요.

이것도 사실 일을 하면서 도움을 받은 부분이죠. 소프트웨어 관리할 때 리비전 관리가 제일 중요하잖아요. 원본 백업도 해야 하고요. 저는 프로젝트 폴더를 하나 만들어서 하나의 소설을 넣는다고 치면, 그 안에 트렁크(TRUNK) 폴더랑 태그(TAG) 폴더를 각각 만들어요. 최신 문서는 항상 트렁크에서만 유지하고, 그걸 아웃풋으로 내보낼 때마다 버전을 매겨서 태그 폴더에 옮겨놔요. 이렇게 하면 이력은 항상 태그폴더에 남고, 최신문서는 항상 트렁크에만 유지되니까 편하더라고요.

 

 

날것의 ‘짐승’

“마치 달빛을 뒤집어쓴 한 마리 짐승 같았다.”

“자신보다 크고 강한 상대와 맞설 때,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물러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고 연약한 짐승이 한껏 몸집을 부풀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Q. 인물들의 면면이 흔히 짐승이라고 불리는 속성에 부합하는 캐릭터나 성격으로 짜여져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짐승이라는 형상에 대한 묘사도 등장해요. 짐승의 기질적이고 형태적인 성질을 모두 소설에 끌어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묘사들이 작품 자체가 내뿜는 건조함과 황량함, 불쾌함과도 맞닿아 특유의 심상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짐승의 외피와 기질을 모두 빌려오고자 한 것이 맞나요.

A. 짐승 같다는 묘사나 표현은 나중에 제목에 맞춰서 수정한 거예요. 사실은 초고가 완성될 때까지만 해도 제목이 없었어요. 그래서 일단 연재를 시작하려니 제목이 필요한데 마땅히 안 떠오르는 거예요. 일단은 등장인물과 잘 맞을 것 같아서 ‘짐승’이라고 가제를 붙여봤는데, 제목을 정하고 나니까 아예 이쪽으로 좀 밀어도 좋지 않을까 했어요.

사실은 출간계약을 한 다음에 제목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온라인 서점에 ‘짐승’을 검색해보니까 19금 소설이 너무 많더라고요. 검색 결과 때문에 다른 걸로 바꿔볼까 했지만 이미 표지가 나왔다고 하셔서 기존대로 가게 되었어요. 아직도 온라인서점에서 ‘짐승’으로 검색하면 5~6페이지쯤 가야 제 책이 나오더라고요. 다음에는 이런 부분도 고려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이야기

Q. 제가 준비한 질문은 여기까지입니다. 미처 못 다한 이야기가 있다면 덧붙여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A. 글 쓰는 게 생업은 아니다 보니, 오히려 혼자서 더욱 파게 되는 것 같아요. 프라모델 하는 사람이 다음에는 더 난이도 높은 제품을 조립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저도 더 좋은 걸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짐승’에서 잘못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게 있어요. ‘짐승’은 요즘 시대정신하고 방향성이 안 맞는 것 같아요. 요즘 여성 혐오나 대상화에 대해 비판적인 담론이 활발한데, 이게 앞으로 시대가 그렇게 변해간다는 반증이거든요. 그래서 만약 제가 차기작으로 ‘짐승’ 같은 책을 또 낸다면 정말 제가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잊혀지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어쨌거나 제 목표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책을 쓰는 거거든요.

말씀드렸듯 계속해 다음 작품, 또 다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있고요. ‘짐승’을 재밌게 보셨다면 제 다음 작품들도 관심 가져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또 분명히 ‘짐승’을 보고 실망하신 분들도 계실 텐데, 다음 작품을 한번 눈여겨 봐주시면 다른 면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실제로 피드백을 통해 차기작의 방향성도 많이 고민하시는 거네요.

A. 네. 처음 지적을 받았을 때 뜨끔한 게 있었어요. 연재를 하면서도 고민을 하고 있던 지점이기 때문인데, 편집주간님이 짚어주셨을 때랑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어요.

Q. 그래서 브릿G 연재에서 작가의 말도 업데이트를 하신 거군요.

A. 네. 그런 고민도 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고민하고 있으니 봐 달라, 이런 건 아니고.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정도는 어필하고 싶어서 괜히 그런 사족들을 막 붙인 거죠.

Q. 다음 작품은 브릿G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A. 다시 연재를 했을 때 ‘짐승’ 만큼 사람들이 좋아해줄지 확신이 없어요. 제 스타일이 시대에 너무 뒤쳐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고요. 좀 올드하지 않나, 스릴러를 쓴다는 것 자체가 잘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거나 다음 작품은 스릴러물이지만 농도가 비교적 옅은 편이에요.

그 다음으로는 제가 제일 잘 아는 이야기를 쓰려고 해요. 추리적인 기법은 빌려오되, 범죄나 살인은 나오지 않는 엔지니어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부조리하다고 느꼈던 것들에 대해 써보려고요. 제가 추리장르에 어떤 뜻이 있어 추리소설을 쓴다기보다는, 소설을 쓰고 싶은데 우연히 집어 들게 된 도구가 추리였던 거니까요. 제가 좀 더 다양한 도구를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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