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신부

  • 장르: 추리/스릴러 | 태그: #죽음의신부 #박하익 #추리단편 #추리스릴러단편선
  • 평점×25 | 분량: 139매
  • 소개: 암 판정을 받은 수환은 과거 연인이었던 하정을 버린 결과 얻게 된 천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사를 알 수 없는 하정의 모습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듣게 되는데……. 더보기

죽음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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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I의 내부로 들어가던 때였다. 겐트리라 부르는 통 안으로 육신이 스르륵 밀려들어 가던 순간.

처음으로 죽는다는 실감이 들었다.

헤드셋에서는 환자들의 불안함을 없애 주기 위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라는 영화에 나와 유명해진 스트라우스의 곡. 장대한 선율이 공포감을 고조시켰다.

세계는 그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나큰 우주였다. MRI의 유백색 공동은 영안실 시체함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그래서 발작까지 했다고?”

“화장터 불구덩이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어.”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수환과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교 동창인 오진태였다. 도봉동에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젊은 세무사로 각진 턱에 약간 벗어진 머리,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성미지만 친구가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소식을 전하자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서른아홉 살.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젊은 나이 아닌가.

사실 수환 자신도 이 모든 것이 지독한 악몽 같다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접촉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는 아무래도 검사를 받아봐야 하겠다고 권유했고, 퇴원할 무렵에는 암이 이미 말기에 이르렀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불안발작 일으키는 사람들 이야기. 알고는 있었지만 겪어 본 건 처음이야. 누군가 가슴을 옥죄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마구 날뛰었어. 아니, 사실 기억도 잘 나지 않아. 나중에 마누라가 해준 이야기를 듣고 그랬구나 한 거지. 의사랑 간호사가 달려와서 진정제를 놔주는데도 다 뿌리치고 소리를 질러 댔대.”

진태는 고개를 흔들었다. 도무지 와닿지 않은 탓이었다.

“어느 날은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서 뒷산을 올라갔어. 미친 사람처럼 몇 시간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주민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왔지.”

“네가……?”

“죽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죽을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하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힘들지 않다. 내장을 뒤흔들고 뼛골을 깨부수는 통증이 엄습할 때도 차라리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어서 견딜 수 있었다. 문제는 가끔씩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현실을 직시하게 될 때였다. 죽음이 느껴질 때.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세포 하나하나에 알람이 켜진다. MRI에 홀로 들어갈 때처럼 정신을 다잡을 수가 없다. 식은땀을 나고 무릎이 벌벌 떨렸다. 옆에 누가 있든, 심지어 아홉 살짜리 딸 앞에서조차 헛소리를 하며 제발 살려 달라고 두 손을 열심히 비벼 대는 것이다.

“건강검진도 잘 받아 왔잖아.”

“작년에는 건너뛰었지. 사무소 개소하면서 정신이 없어서.”

“그렇다 해도 2년 만에?”

“얄궂은 인생이지.”

불판 위에는 자동으로 돌아가는 양꼬치 다섯 개가 연기를 피우며 익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아? 입원해야지. 수술은?”

“수술이나 할 수 있으면 오죽 좋았겠냐. 병원 가도 복수 빼고, 진통제 놔주는 것 외에는 못 해주더라.”

두 사람은 아직 다 갚지 못한 아파트 대출금과, 이번에 지원한 신약 임상시험에 대해서, 암을 이기는 민간요법에 대한 정보들을 이야기했다. 남겨질 가족들에 대해서도. 그 말들은 자욱한 연기처럼 부질없이 흩어졌다. 언제 죽을지 모를 상태인데도 술 한 잔 마시지 못한다. 혼자서 중얼중얼 떠들고 있자니 불현듯 허무해졌고, 자신이 죽고 나서도 즐거운 인생을 살게 될 친구가 또한 부러워졌다.

“진태야, 아무래도 내가 천벌을 받은 것 같아.”

“천벌이라니?”

“하정이…… 걔가 내 명줄을 잡고 있는거 같아.”

진태는 들고 있던 소주 잔을 거칠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잔에 담겨 있던 술이 출렁이며 검지손가락을 적셨다. 하지만 진태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히려 친구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며 물었다.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너 설마 그때 하정 씨한테 못 할 짓 한 거 아니지?”

저음으로 착 가라앉은 질문을 받고 수환은 자조했다.

“죽였지. 죽인 거나 다름없잖냐. 결혼하기로 약속해 놓고, 바람이 나버렸지. 사라진 뒤에도 찾지도 않고, 돌아올까 봐 무서워 서둘러 딴 여자랑 살림 차려 버렸잖아.”

진태는 수환의 대답에 숨겨진 진실과 죄책을 골똘히 재어 보고는 조금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쓸데없는 자책하지 마. 결혼 전까지 변심은 죄가 아니야. 그리고 넌 하정 씨를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아무리 약혼자에게 배신당했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종적 없이 사라지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엄밀히 말해서 버림 받았던 건 너예요. 불쌍했던 건 너였다고.

결혼식 날에 너 혼자서 비참하게 서 있던 걸 생각하면 내가 아직도 분이 안 풀려. 혹시나 실종된 신부가 나타날지 모른다고 해서 신부 쪽 사람들도 다 모여서 결혼식을 구경했었잖아. 그 여자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저열한 복수였어.”

10년 전 결혼식에서 사회를 맡았던 진태는 일곱 번이나 신부 입장을 연호했었다. 진땀을 흘리며 이마를 닦아 내리던 버버리 체크무늬 손수건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니야. 하정이는 죽었어. 죽지 않고서야 왜 안 나타났겠어?”

“그 뒤로 그쪽 집에 연락해 봤어?”

친구는 냉정하게 물었다. 수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아왔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거네. 지금쯤 어떤 놈이랑 살림 차리고 애까지 낳아서 잘 살고 있을걸.”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나, 제대로 찾지 않았어. 경찰이 물었을 때도 그곳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하정이가 어디로 갔을지 짐작했지만.”

“알았어? 근데 왜?”

“왜 모른 척했냐고?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왠지 그곳에 가게 되면 붙들릴 것만 같았어.
알잖아. 윤하정. 헌신적인 여자. 집요하고 지고지순하고 지긋지긋한 순애보……. 직장 다니면서 내 학비도 내주고, 먹여 줘, 입혀 줘, 군대 가 있을 때는 우리 엄마 병수발까지 해줬잖아.”

수환은 우유부단한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관계에 약고 영리하고 용의주도한 타입이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분명하게 딱 잘라 말하고, 거절당하더라도 입장은 냉정하게 표명했다.

매사에 세련되고 쿨하다는 평을 들었던 그이지만, 하정을 함부로 내칠 수가 없었다. 마음이 싸늘하게 식고, 옆에만 가면 숨이 막히는데도 결코 이별을 고하지 못했다. 부친의 공장이 도산하고 빚더미에 앉았던,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에 곁을 지켜 주고 무조건적으로 감싸 준 여자였다. 하정은 혈육인 어머니 다음으로 ‘정수환’이라는 인물의 주식을 최대로 매입한 존재였다.

한 번도 그를 쥐고 흔들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막강한 영향력을 그에게 발휘하고 있었다.

만약 그곳에 갔더라면, 그녀의 눈을 마주 대했더라면 꼼짝없이 참회하는 탕자처럼 고개를 숙이고 지금의 마누라와는 헤어졌을 것이다. 신부가 나타나지 않은 그 끔찍한 결혼식을 사전에 취소하지 못하고 허수아비처럼 멍청하게 서 있었던 것도 그녀가 베푼 헌신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동치는 반항심으로 그녀가 도망쳤을 법한 장소에는 찾아가지 않았다. 누구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안 어울리는 커플이었어. 말도 없고 조용하고, 사람들하고도 어울리지 않는 그런 타입이 활달한 네 성격을 어떻게 감당해? 도대체 왜 그런 여자를 만났던 건지 이해가 안 돼. 고아였지? 키워 주신 분도 이모님인가 했고. 음습하고 어두운 구석이 있는 여자였어. 성격이 반대라서 매료되었다든가 그랬던 거야?”

험담을 듣고 있으려니 속에서부터 쓴물이 올라왔다.

본심을 고백할까.

대학이라고 하는 세계는 청춘들이 처음으로 자본의 힘을 체험하는 작은 새장과도 같았다. 비틀어진 욕망 속에서 남녀들은 매일 걸치는 옷으로 태어난 계급을 대변하고, 그에 맞는 일과를 보냈다. 살인적인 등록금에 압사당하지 않을 수 있는 인종은 몇 되지 않았다.

그녀는 초라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마네킹처럼 아름다운 육체를 가지고 있었고, 명문대에 입학한 여러 재원들 가운데에서도 전액 장학금을 놓치지 않을 만큼 명석한 두뇌와 성실함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으로 세련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즐기지 못했을 뿐이다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 원자재가 출중한 인간, 생물학적인 유전자 로또, 라고 해야 할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수환은 느닷없이 무너진 배경에 비척거리며 정체성 혼란까지 겪고 있었다. 고교 시절까지 그는 아버지 덕분에 돈 걱정을 하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살아왔었다.

왜 그녀와 사랑에 빠졌느냐고?

“모르겠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어. 나도 예쁜 여자들이야 많이 만나 봤지. 그런데 하정이는 말이야. 다른 여자들과는 눈빛부터가 달랐어.”

순정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구보다 지성적이고 아름다운 여자가 날 흠모해 줬어. 별 볼 일 없는 날 말이야.”

“자학이 너무 심한 거 아냐? 너처럼 허우대 멀쩡하고, 말 주변 좋은 놈 많지 않아. 먹히는 타입이야.”

“달랐어. 다른 여자들은 선별 과정을 거쳐서 날 봤어. 학벌은 어떤지, 능력과 출신, 집안 배경도 고려하고, 인물로만 평가하는 애들도 있었고. 머릿속으로 다른 수컷들과 비교를 하면서 보는 거야.”

“다들 그러잖아.”

진태는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진태와는 고교 동창이지만 대학 이후에 친해졌기에 연애의 상세한 과정까지는 말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또 그녀가 사라진 이후 둘 사이에서 윤하정은 금기어였다.

“걘 날 무슨 초월적인 존재로 여겼어. 숭배해 줬다고.”

“그렇게 멍청한 타입 같지는 않았는데.”

“알아. 그러니까, 내가 미친놈처럼 빠져들었던 거야. 똑똑하고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애가 나한테, 나를 대할 때만큼은 어떤 관점도 편견도 두지 않고 모든 걸 수용하고 포용해 주는 거야. 마치 산들거리는 봄바람처럼.”

“시 쓰고 있네. 그렇게 좋아했으면 잘 먹고 잘 살 노릇이지. 딴 짓은 왜 해? 내가 옆에서 보기에 넌 항상 하정 씨한테 야속했어. 친절하게 대한 적도 많지 않았잖아.”

비웃는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약간의 질투와 도덕적인 힐난도 감출 수 없이 섞여 나왔다. 수환은 알고 있었다. 하정과 함께 있을 때면 진태는 눈빛부터 달라졌었다. 그녀가 일어설 때면 눈으로 뒤를 쫓았고, 고개를 내리깔면 훔쳐보았다. 아니, 그건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랬다.

“걔는 그랬는데 나는 안 그랬어. 걔는 다 줬지만, 나는 받을 수밖에 없었잖아. 남자가 받기만 하면 옹졸해져. 옹졸해지니까, 신경질을 내고 못난 꼴을 보이지. 최고로 멋진 앨범 속에 엉망진창인 자기 사진만 담아 두는 격이랄까. 하정이는 언제나 착하게 날 믿어 주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언제나 피해자는 걔고 난 쓰레기 같은 놈이 되어 있는 거야.”

하정과 결혼했으면 굴곡진 관계가 계속해서 이어졌을 것이다.

“아마 폭력 남편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말을 뱉고 보니 허탈해졌다.

정말 그랬을 법도 하고, 방금 전 말에 담긴 무책임함에 치가 떨리기도 했다. 상대에게 매몰차게 굴었던 행동들이 사실은 상대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핑계를 대는 격이었으니. 폭력 남편들의 말버릇과 뭐가 다른가. 그들은 변명하곤 했다. 여자들이 매를 벌게끔 행동했다고.

“넌 내가 결혼식 날 비참했다고 생각하지? 아니야. 사실 난 안도했어. 그녀에게서 자유로워졌으니까. 그녀가 죽었든 살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

고해의 종지부였다.

하정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동안 자신이 보였던 못난 꼴을 모아 둔 쓰레기통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지극히 섬뜩한 생각이지만, 이제 더 이상 맑고 순수한 눈을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응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천벌 받을 만하지? 내가 윤하정 때문에 암에 걸려 죽는 거야. 처녀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잖아. 정말 그래. 그 이후 한 번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 죽었기 때문이겠지. 죽지 않은 이상 날 포기할 여자가 아니니까.”

그 조용하고, 여리고 어여쁜 여자는 내면에 활화산 같은 순수를 품고 있었다. 잠시 다른 여자를 만난 문제 정도로 그를 내칠 여자가 아니었다. 분명 죽었다.

넋두리를 듣다 지친 진태는 저녁이라 거뭇해진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네 착각이야. 네가 지금 힘들고 그러니까, 뭔가 그리워할 대상이 필요해서…….”

“그리워해?”

“그렇잖아. 죽지 않는 이상 날 포기할 여자가 아니라니. 얼마나 진부한 드라마 대사야? 세상에 그런 사랑이 존재할 거 같아?”

수환은 천천히 진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실주의자이기는 해도 독설가는 아닌 친구였다. 방금 전 진태가 지적하지 않았다면 수환은 하정에 대한 죄악감 속에서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숨어 있는지도 몰랐을 뻔했다. 진태는 곧 죽을 가장 친한 친구의 서정을 짓밟거나 무시할 인물도 아니었다.

근거가 없지 않다면.

“너, 뭔가 아는 거 있어?”

정곡을 찔린 진태는 술잔을 잡고 있던 손가락 중 하나를 들어 이마를 긁적거렸다.

“최경민이 알지? 휴게소에 편의점 차린 애.”

“옥산?”

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경민이라면 고교 시절부터 허풍이 심했던 놈이었다. 키가 작고 손발이 짧고 턱이 네모진 호인형 외모 덕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도시락’이라고 불렸다. 도시락은 결혼을 앞두고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는 자리에서 하정이와 만났었다. 생각해 보니 대학 시절에도 두 번 정도 술자리를 같이 했었다. 입대를 앞두고 한 번, 제대하고 나서 한 번.

“삼 년 전에 걔가 하정 씨를 봤다고 했어. 동창회에서 네가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말이야. 뭔가 재미있을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처럼 모두에게 털어놨었지.”

언제인지 기억이 났다. 주말과 겹친 추석 연휴 말미에 동창회 회식을 잡았던 날. 회식이 진행되는 내내 경민이 수환을 보며 기분 나쁘게 빙글댔었다. 은형에게 갑작스런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면, 딸아이가 뇌염에 걸려서 응급실에 있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 그도 자초지종을 듣는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네 앞에서 다들 쉬쉬했지만, 모두 궁금해하던 이야기였거든. 결혼식을 앞두고 증발해 버린 신부. 둘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건지. 신부는 어디로 가버린 건지. 하정 씨 특유의 애수 띤 분위기가 남자들 마음을 흔들기도 했고.”

“그래서?”

“경민이 말은 이래.”

태풍이 지나간 8월의 밤. 자정에 가까운 야심한 시각에 휴게소 주차장 안으로 검은 차 석 대가 줄을 지어 따라 들어섰다. 차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대번에 압도당할 만한 외관을 지닌 외제차들이었다.

처음과 마지막 차에서는 보디가드와 수행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제일 가운데에 있던 차 안에서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미녀와 선글라스를 쓴 노파가 나왔다. 오밤중에 선글라스라니 도대체 누구인가 싶어서 경민 부부는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게 하정이였다고? 원피스 입은 쪽이? 도시락답네. 한여름 밤의 판타지야. 다들 믿었어?”

진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언제나 수환의 편이었고 수환의 이야기가 친구들 사이에서 안줏거리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동안 경민이 허풍을 쳤던 사건들을 모두 앞에 나열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평소라면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을 도시락이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증거를 제시했다.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 하지만 그날 찍은 사진이라면서 보여 주는데 그걸 보고는 나도 할 말이 없더라. 한두 장도 아니고, 일곱 장을 근거리에서 찍은 거야. 요즘 핸드폰 해상도가 얼마나 좋냐. 하정 씨가 분명했어. 내가 봐도 정말로 하정 씨였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사진 나도 볼 수 있어?”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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