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쨍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활공보트가 바다라 불리는 방대한 수용액의 표면을 가르며 나아간다. 머리 위 하늘과 바다는 똑같이 깊고 푸르러 보트의 날개가 일으키는 하얀 거품으로만 간신히 분간이 간다. 폐쇄식 우주복이나 방독면을 쓸 필요 없어 상쾌하게 뺨을 때리는 바람에서는 염분의 냄새가 난다. 이곳 엘라단의 환경은 놀라울 정도로 옛 고향 행성과 비슷하다. 물론 미심쩍은 역사 기록에 따르자면 아마 그럴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니까.
멀고 먼 옛날, 인류는 어떤 이유에서든 황급히 고향 행성을 떠나야 했다. 수많은 탈출선이 행성 하나의 인구를 나눠 태우고 출발했다. 기나긴 성간 여행을 살아남기 위해 탈출선에는 장기 동면 시스템, 세대교체 유지 시스템 등등 최신예의 기술이 가능한 대로 동원되었고, 그만큼이나 탑승자들과 그들의 생각도 서로 달랐다. 결국 광활한 우주로 나온 탈출선들은 각자 다른 길을 택했고 인류는 은하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우주적 디아스포라에서 운 좋게 끔찍한 운명을 피하고 살아남은 소수는 그 과정에서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선조의 기적을, 성간 여행 기술을, 심지어 일부는 말하고 자연을 지배하는 법조차 잊고 말았다. 연방 수립 전 주변 행성에 정착한 대부분은 성간 문명은커녕 겨우 씨족 수준의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마지막 탈출선의 생존자들이 막 성간 문명을 이룩한 제국과 만나 범은하 연방 인권 보장 협의체, 줄여서 연방을 세운 것이다.
연방의 임무는 단 한 가지다. 인격이 있는 모든 존재가 마땅한 존엄을 누리게 하는 것. 연방은 주변 행성들에게 잃어버린 인류의 기술들을 돌려주는 대신 협의체에 흡수하며 공공연한 은하의 지휘자로 우뚝 섰다. 이제는 은하 곳곳에서 먼저 행성들의 연방 가입 신청이 쇄도한다. 그들이 그러할 자격이 있는지 심사하는 것이 나 같은 연방 감사관의 일이다. 심사는 보통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해당 행성의 거주민 중 자의식을 가진 인격체를 모두 식별하는 것. 현재까지 연방의 기준을 통과한 인격체는 거의 모두 인류나 그 후예였지만, 두 종의 전-문명 수준의 독립적인 인격 생명체가 발견되었고, 한 행성에서 인공지능이 자의식을 획득한 사례가 보고되었다. 둘째는 심사받는 문명이 그 모든 인격체에게 존엄함을 최대한 보장하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이 부분 자체는 전 단계보다 훨씬 어렵지만, 통과하지 못한 문명도 연방에 가입할 수 있는 간단한 프로토콜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두 가지 임무를 띠고 엘라단이라는 도시로 향한다. 은하 외곽에 자리한 신생 문명이지만 최근 성간 여행 기술을 개발해 초성단 표준 여객 네트워크에 편입됐고, 이제는 정치적으로도 연방에 함께하기를 원하고 있다. 내 쾌속선이 착륙한 엘라단의 우주 플랫폼은 초보적인 엘라단의 성간 여행 기술에서 인구 밀집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분리된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엄청난 양의 액체 물에 둘러싸인 암석 지형…, 이런 것을 섬이라 하던가. 방금 막 우주선에서 내린 나는 이제 로씨라고 하는 여자가 모는 자그마한 보트를 타고 더 큰 이웃 섬에 있는 도시로 향한다. 갈색 머리와 밝은 피부를 가진 그녀는 일반적인 인간과 외형적 형질이 일치한다. 선글라스를 쓴 그녀는 짧게 인사를 나눈 뒤론 입을 별로 열지 않았다. 인격 심사는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것 같다.
로씨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엘라단의 본섬은 수십 장주기 만에 행성 전체를 굴복시킨 문명의 수도에 걸맞지 않게 자그마하다. 보트를 타고 떨어져 바라보는 지금 한눈에 거의 다 담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 위에는 금속광택으로 반짝이는 군집도시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다. 보트가 도시 변두리에 튀어나온 부두에 닿자 작은 악단이 연주를 시작한다. 환영단 맨 앞에 선 여자가 유창한 연방 공용어로 나를 반겼다. 그녀의 이름은 로씨, 내 안내를 맡은 엘라단의 외교관이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지 않았다는 점만 빼면 좀 전의 보트 운전수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안녕하세요, 로씨. 범은하 연방 인권 보장 협의체 파견감사관 김민지라고 합니다. 아까 보트에서도 로씨를 만났는데, 재밌는 우연이군요.”
그녀는 웃으며 엘라단에서는 모두가 로씨라고 답한다. 우리의 첫 번째 일정은 도시 시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