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이름은 유성이었다. 하늘을 가르며 중력에 이끌리는 별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스스로를 고유성이라 소개하곤 했다. 모든 이름에는 힘이 깃들기에 고유성, 그 사람은 항상 변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떨어지지만, 변하지 않는 별. 그것이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
내가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엔 별달리 생각해 보진 않았다. 한순간에 지나가고 마는 이름을, 그 의미를, 누가 깊이 음미하려 들까. 고유성 또한 그런 이름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깨닫고 만다. 이름이 가진 무게를 이해했다. 내가 가진, 내 가족이 가진, 주변의 지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수많은 이름들이 과연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Nomen est omen.
이름이 곧 징조다. 혹은 이름에 운명이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저마다의 의미가 떠오르겠지만, 이 고대 로마의 문장 속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담겨있다. 이름에 미지가 깃든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그때의 그 광경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건만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날이 갈수록 커진다. 내가 이름들의 향연을 버티지 못하고, 방문을 걸어 잠근 이유이기도 하다. 한 문장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온 세상이 난장판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혼란은 이 문장 하나로 정리가 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세상의 종말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준하는 사건들은 연달아 일어났다. 원인은 바로 모든 이름에 힘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름 중에 특이한 이름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이름들이 모여 가지각색의 힘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특별하게 타고난 운명이 힘을 부여 받는 것으로 표현된다. 내가 알고 있는 이름 중에서도 유독 특이한 이름은 고유성 하나 뿐이지만, 어쩌면 그가, 적어도 그와 비슷한 이름들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변하지 않게 유지하는 힘’ 같이 말이다. 물론 그게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 확실한 것은 그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지는 모르겠다. 사실, 근래에는 더더욱 모르게 되었다.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근 뒤부터 저 방문 밖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직접 본 적은 없으니까 말이다.
내 방 안은 방공호 내지 대피소 같은 느낌으로 나름대로 구색을 갖춰 두었다. 물론 거창하진 않다. 내 이름에 담긴 힘이 이곳을 음식과 식수가 풍부한 곳으로 바꿔버렸다.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느낌이 가는 대로 움직이니 그저 되었다. 벽은 두꺼워지고, 원하는 음식이 저절로 생겨나며, 손짓 한 번에 깨끗한 물 웅덩이가 생겨난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지금으로는 이보다 더 거창해질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이름이 섞여 든다면 또 모르지만 말이다.
이곳은 나의 안식처.
나만의 유토피아.
어쩌면 낙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었다. 조금 전부터 간헐적으로 진동이 느껴지는 것이다. 마치 문이라도 두드리는 것처럼. 손님이라도 온 건가 싶었지만, 밖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으로 볼 때, 보통은 괴물일 것이다. 사람의 탈을 쓴 괴물, 특이한 이름으로 괴이한 힘을 다루며 온갖 소동을 몰고 다니는 그런 놈들 말이다.
내 힘으로 바꾼 공간은 이 방 하나뿐이다. 저 방문 너머의 공간, 그러니까 거실 부터는 하나도 건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저 사람은 비어있는 집에 무단으로 침입하고, 기어코 내 방문을 두드리고 있는 게 된다. 그런 사람이 괴물이 아니고 또 뭐가 있을까.
나는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푹신한 침대를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게 크다. 불안정하지만 아주 잘 살아있는 인터넷도 한몫했다. 뜨듯한 이불 속에서 스마트폰 속 세상을 지켜보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이 또 있을까? 이런 세상에서도 인터넷이 돌아간다는 건 어쩌면 기적이다. 누군가 힘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고마워요! 이름 모를 사람!
이상한 소리에 집중하기보다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이 작은 세상에 집중해 보자. 어떤 미치광이들이 또 어떤 일들로 제각기 삶을 꾸미고 있는 지를 살펴보는 거다. 오늘도 상상 이상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어떤 남자가 쇠 파이프를 어깨에 걸쳐둔 사진, 오늘 마트에 쇼핑하러 왔다면서 물류센터를 돌아다니는 일기 성향의 글, 자경단의 세력이 늘어나 활동 범위를 축소하겠다는 어떤 조직의 공지 글을 캡처하여 첨부한 글. 세상의 모든 지식인들이 죽기라도 한 것인지 카페든, 블로그든, 커뮤니티든, 동호회 성향의 무언가이든, 저런 글투성였다.
비록 내 손에 들린 이 작은 세상으로 볼 수 있는 건 거대한 세상의 일부 뿐이지만, 일부만으로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참으로 말세로구나.
조금은 상투적인 문장이지만, 이렇게 들어맞는 말도 얼마 없다. 오늘도 내 이름에 감사한다. 이 하루를 또 무사히 보낼 수 있게 해주어서 말이다.
그런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아? 잘 들어보라고. 지금 이렇게나 가까워졌는데, 들리지 않아?
쾅! 쿠그극…! 콰—광!
“음?”
벽 한 부분이 터져나간다. 말 그대로 펑 하고 터지듯이 날아간다.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먼지가 사방으로 퍼져 앞을 가린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찾았다.”
내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를 감싸는 바윗덩이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실존했던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어야지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그 범위가 내 방이라 인식한 공간에 한정되어 있다. 내 이름과는 조금 다른 힘이지만, 나는 이 힘을 좋아한다. 누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원하지 않나? 하지만 지금, 그렇게 안전하고 또 편안했던 내 유토피아에 몰상식한 불청객이 기어코 침입하고 만 것이다.
사실 내가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너무 오래 갇혀 있었다. 이대로라면 미쳐버리는 것도 당연할 지경이다. 하지만 나보다 더 미쳐있는 저 세상이 두려웠다. 연신 바위를 두드리는 저들이 무섭다. 평온했던 일상이 그리워진다.
아아, 신이시여! 나를 근심과 걱정,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낙원으로 인도하소서!
이런 말들이 머릿속을 가득히 메워갈 즈음 누군가 억지로 내 생각들과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나는 정신을 놓쳐버렸다. 마치 잠이라도 드는 것처럼……
내가 정신이 들어 눈을 뜨고서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기워냈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조악한 천장이었다. 나무판자와 천 쪼가리로 대충 덮은 수준을 보아라. 그리고 이 끔찍한 냄새는 또 뭐라고 해야 할까. 고약한 냄새 덩어리가 코를 파고들더니 그 안에 자리 잡고 끝없이 갉아대며 퍼져나가는 듯하다. 하수처리장도 이보단 향기로울 것이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산다고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여러 대화가 겹쳐서는 듬성듬성 들려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 정말?”
“아직도냐. 오래도 걸린다.”
“…… 그게 그렇게 되나?”
그리고 소음 사이로 가벼운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다가오고 있었다. 문이 있어야 하지만, 뻥 뚫려있는 벽의 직사각형 통로 너머로 사람 두 명이 다가왔다. 그들은 주변 난장판과는 어울리지 않게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있었다.
“깨어나셨네요. 먼저 이렇게밖에 데려올 수 없었던 점은 사과드립니다. 이곳은 세상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이들의 쉼터입니다.”
그렇게 말한 이는 이곳의 대표라도 되는 듯이 내게 말해왔다.
“궁금한 점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결코 나쁜 의도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이 비참한 장소에서 당신이 가진 이름의 힘을 사용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죠. 공간을 뒤바꾸는 힘은 흔치 않으니까요.”
다른 한 명이 내게 다가오더니 서류 뭉치를 건네준다. 그곳에 가장 앞면에는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쉼터 조성 계획 ]
표지에 이름이 있다.
고유성.
난장판이 생기기 전날밤 나는 옥상에 있었다. 처음에는 담배라도 피러 올라갔었나 생각했지만, 내 손에는 라이터도 담배도 들려있지 않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내가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밝은 도심의 밤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발이 공중에 살짝 떠 있었다. 그는 날 바라 보고 말했다.
“고유성입니다. 날 찾아와요.”
바로 그 이름이었다. 내 기억 속에 남겨진, 그러니까 세상이 난장판으로 변하기 직전의 이름.
다른 이름들도 나열되어 있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이름이 왜 여기에 적혀있는지, 그때의 상황을 지금 떠올린 이유가 무엇인지, 그 외의 갖은 의문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하나의 욕구, 다음 장으로 넘겨 내용을 살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나를 강제했다.
나는 이 문서를 끝까지 읽어야만 한다.
문서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계획을 소개하는 말,
이름의 특성과 시너지를 부르는 다섯 개의 대분류,
수 개부터 수십 개에 이르는 이름들의 나열인 중분류,
각각의 세부 사항을 정리하는 소분류.
대분류의 내용은 이렇다.
1. 특정 영역의 보호를 일으키는 이름들의 목록
2. 주위의 생명을 강건하게 유지 시키는 이름들의 목록
3. 무한한 식사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름들의 목록
4. 안정적으로 의류를 보급하게 만드는 이름들의 목록
5. 안락한 주거 공간을 구성하는 이름들의 목록
내 이름은 다섯 번째 대분류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공간을 비틀어 재구성하는 존재로 정리되어 있었다. 나에게 그 정도의 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의문을 제대로 생각해 보기도 전에, 그러니까 문서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쯤 모든 욕구가 사라져 버렸다. 마치 모든 걸 텅 비워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너무 강압적이어서 미안합니다. 사실 이름의 힘을 쓰는 건 인도적인 방식이 아니다 보니 선호하진 않습니다만, 이 계획을 이해시키는 건 이게 가장 빠르거든요. 그럼, 이제… 건설적인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을 튕긴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기다려 보니 이 방 안으로 세 명이 더 들어왔다. 그들은 제각기 자리를 잡더니 무언가 시작했다. 아마 능력을 쓰려나 보다. 나는 일련의 상황을 겪으면서 당황보다는 호기심이란 감정이 먼저 들었다. 어쩌면 기대.
하지만 그런 와중에 의심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들어온 이들이 감정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닌 게 아닐까. 내가 방금 느낀 호기심, 기대가 사실은 저들이 만든 가짜가 아닐까. 그런 합리적인 의심 말이다.
그리고 난 어째서 이 상황 자체를 의심하고 있지 않을까. 왜 이런 이상한 순간을 이다지도 쉽게 받아들인 것일까. 어째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어디로든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매우 합리적인 의심들이 생겨났다. 왜 나는 저들의 말에 경청하고 있는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한편, 평소에는 조용하던 머릿속의 한 난쟁이가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나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할까? 저 앞의 사람들은 당최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내 머릿속의 생각이라. 가끔은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지만 결국 나를 가장 잘 알지 않는가? 그래, 그거야!
나는 자리를 박차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제치며 무작정 방을 빠져나온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뒤에서 무언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지는 복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나는 어째서 도망쳐야 하는가.
의심하지 말지어다.
그런 문구가 떠올랐다. 그래, 나는 그냥 도망치는 거다. 저런 사람들의 말을 하나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딘가에 다시 내 안락한 장소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사태가 무사히 끝날 때까지.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고유성, 그자가 했던 말은 이 계획에 동참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함께 낙원을 만들어 보자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어째서 나인가. 아니, 그냥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 그런 말을 남긴 건 아닐까. 그러니 문서 안에 그렇게도 많은 이름이 적혀있었겠지. 그럼 나를 부품으로 쓰겠다는 말인가.
무엇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가. 내가 도망치는 걸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저들의 말의 의도를 말하는가. 나는 의심하지 말라는 문장조차 의심하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 느껴지는 심장 박동, 길을 읽는 눈동자, 멈추지 않는 다리. 나는 어디로 향하는가.
얼마나 달렸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얼마나 급박했으면 상황이 기억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달려서 도망친 과정을 깡그리 잊어버린 이유는 이 상황에 엄청 급박하게 돌아가서는 아닐 것이다. 바깥 풍경이었다. 그 이유는.
남색 하늘을 뒤덮는 수많은 빛.
그게 난장판이 된 세상에서 처음 보게 된 별이었다.
나는 큰 착각을 하며 살아왔다. 나는 나의 안식처 안에서 본 세상이 바깥의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 이렇게나 아름다운 순간이 있구나. 저 현상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건 내 짧지만 긴 평생의 삶 속에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런 나에게 세상이 소리치는 것만 같다.
“네가 날 안다고? 어림 없는 소리!”
어쩌면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저 하늘의 별들과—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이름의 원형이었다.
나는 사전에 적힌 수많은 단어들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이름의 의미를 제멋대로 생각했던 것이다. 난장판이란 세상을 그렇게만 재단하고, 이해하고, 그렇게만 생각하고 지내왔다. 어쩌면 이 세상에도 내가 낙원이라 인정할 만한 세상이 존재하진 않을까?
도망치고 있는 것도 잊은 채로 멍하니 화려한 순간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수많은 별들 중 하나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다니, 하늘에 박힌 별이 저런 속도로 움직일 수 있던가? 별은 아름다운 궤적을 남색 도화지에 자국을 남기며 내려왔다.
저것이 유성인가. 그런데 어째서 유성이 내 쪽으로 오는 걸까?
저 멀리 초록빛을 내는 유성 하나가 나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처음과는 달리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으아아아악!”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유성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부딪히는 충격은 커녕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유성이 있던 방향을 올려다보니 신기하게도 유성은 딱 내 머리 위에서 멈추었다.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무슨… 뭐지?”
나는 멈춰있는 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성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유성이 파편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그 안에서 사람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아슬아슬했네. 조종을 조금이라도 실수했다면 큰일 날 뻔했어, 안 그래?”
이해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이해해야 한다. 난장판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사람은 나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음, 그래. 너는 유성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구나. 하지만 걸어다니는 걸 보니 수준이 낮아. 나 역시… 잠깐, 저기 사람들이 달려오는데, 혹시 아는 사람이야?”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쫒아오고 있다니.”
“그래,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낫겠지? 자, 준비해.”
옆에 서 있던 사람은 양팔을 뻗었다. 주위에 널려있는 암석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너의 이름으로 나처럼 할 수 있어. 늘 하던 대로 하는 거야. 안락한 너의 공간을 생각해. 단지 그게 저 우주 멀리 날아가는 유성일 뿐이야.”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더니 떠오르는 암석들에 둘러싸였다. 사람을 감싼 커다란 돌덩어리. 그 돌은 다시 유성이 되어서 하늘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저걸 따라하라고?
어떻게 하는 거지? 저걸 한 번 보고 따라하라는 말인가. 그러나 내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다. 저 사람들이 나를 잡으려고 쫓아오고 있는 중이니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생각했다.
아늑한 공간…유성…
정녕 두 단어가 함께할 수 있는 단어란 말이가, 라고 생각하던 것도 잠시. 놀랍게도 나는 기이한 바위에 둘러싸여 있었다.
“성공인가…?”
돌 안에 있으니, 놀랍게도 이 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지금 하늘을 나는 유성 안에 타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오늘 겪은 일 들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유성 안은 정말 아늑했다. 그런데 이 유성은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 정말 우주에까지 닿는 걸까?
나는 기대와 두려움을 느끼며, 날아갔다.
— 분기점.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울렸다.
— 고유성, 그 사람은 이런 재앙에 대비해 여러 가지 방향성을 제시했고, 그 계획 중 하나의 가능성을 지금 당신이 선택했습니다.
아까 내게 계획서를 내밀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 언제든지 저희와 함께하고자 한다면, 쉼터를 찾아주십시오.
미약한 통증이 머리를 꿰뚫는다. 충분히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불쾌한 감정이 솟구치더니 파괴 욕구가 기어 온다. 이건 나의 감정일까? 아니면, 그자의 감정일까?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통증과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이내 잠잠해지더니 긴장이 한꺼번에 풀려버렸다.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자, 돌로 된 의자가 저절로 생겨 나를 받친다.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숨을 고르니 나름대로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여유가 생기니 내게 벌어진 사건을 한 번 되짚어 볼 만했다.
자, 보자.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고, 무장 강도에게 납치당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낡고 헤진 건물이 보였다. 고약한 냄새와 함께.
그리고 찾아온 사람이 쉼터 조성 계획에 가담하라고 종용했다. 고유의 능력까지 사용해 가며.
나는 도망쳤고, 거리로 나왔으며, 빛나는 유성을 타고 다니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유성을 만들어 도망치라며, 알려주었다.
그대로 시도했고, 지금에 이른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음… 더 모르겠다. 머리가 멍하다. 고유성, 쉼터, 계획, 방향성, 가능성, 유성. 그 사람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의심 하나가 멍한 머리에 꽂혀 든다.
쉼터의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내 위치를 알았고, 나를 알았고, 나를 이용하려 했다. 유성을 타고 다녔던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거지. 왜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멸망을 향해서 열심히 굴러가는 지구라는 초거대 바위와 그 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려는 사람들.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나의 낙원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는 직감이 든다. 돌아갈 수 없었다. 나 또한 그 위에 올라서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게 두 개의 길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쉼표 또는 온점.
구원 혹은 멸망.
그 기로에 내가 서있음을 깨달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한숨을 내쉬고, 다시금 머리를 정리한다. 이리저리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고 다시 묶는다. 어쩔 땐 과감히 잘라내어 다시 엮어 낸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에 도달한다.
내가 이렇게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나?
아니, 아니었다. 나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상할 정도로 의심이 짙었으니까 말이다. 이건 분명 뭔가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생각이 이어지고, 깊어진다. 하지만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쾅 소리와 함께 흐름이 깨졌다.
나는 부서진 유성의 잔해를 해집고 나왔다. 도착한 곳은 내가 있던 곳 과는 다른 행성이었다. 내 두 발이 짚은 대지는 삭막한 모래로 이루어져 있었고, 곳곳에 죽은 나무들이 널려 있었다.
“아, 도착했구나.”
나에게 유성 만들기를 알려준 사람이 말했다.
“처음 치고는 완벽하게 따라했는걸.”
그 사람 외에도 9명의 사람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당신들은…누구죠?”
당장 질문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그래, 소개가 아직이구나. 이건 예의가 아니지. 우리 단체의 이름은 ‘파원’이라고 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너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지. 그리고 나는 파원의 대표이고.”
“나를 왜 여기로 데려왔죠?”
“음… 우리의 이름을 봐. 그리고 너의 이름을 생각해. 우리가 왜 너를 이곳까지 이끌었을까? 하나 밖에 없지. 인재 모으기.”
“그러니까, 그 목적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아, 그래. 설명해줄게.”
그 사람은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도 알다시피, 이름에는 힘이 있지.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은 놀랍게도 이름이 먼저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세상이 창조된 후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야. 세상이 창조된거지. 이름으로부터.
우주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나서 우주라는 이름이 붙은 것일까? 그 반대야. 우주라는 이름이 스스로를 만들어 냈어. 그것은 모든 것에 적용돼. 작은 식물 하나부터 우리 같은 인간까지.”
그는 손짓, 몸짓을 중간 중간 겉들이며 설명에 열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어떤 사람들이 이름에 엄청난 힘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먼저 알아낸 사람들이 있지. 그 단체가 바로, 쉼터야.
그들이 말하길, 평온한 삶을 보장해준다고 해. 동시에 이 세상에 그들이 아닌, 다른 이가 만들어 내는 변화를 용납할 수 없어 하지. 그렇게 그들은 이름을 통제하기 시작했어. 하지만 역전의 찬스는 항상 오는 법이야. 나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이 행성에 공간을 다루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지. 우리는 쉼터를 무너뜨릴 생각이야.”
“쉼터를 무너뜨린다고요? 어떤 방식으로?”
“여기 모인 이들의 힘을 모두 합하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 이 행성이 그 힘의 구심점인 셈이지. 즉 우리의 이름인 파원波原이 되는 거야. 그 이후에는 우리의 힘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 거야.
변화를 싫어한다니, 더 큰 변화를 만들 수 밖에.
우리가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 내는 거야.”
그 사람이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나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나는 안내를 따라 어떤 건물을 도달했다. 붉은 사막에 오롯이 세워진 작은 건물이었다. 그 안에는 지하로 향하는 거대한 계단이 있었고, 그 시설의 아래로 향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미약한 조명, 조용한 가운데 울리는 발걸음 소리.
내가 이렇게 순순히 따라가더라도 저들이 주장하는 바를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한 대화 내용 중에서 내가 아는 지식과 맞물리지 않는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이 괴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마저도 고유성, 그자와 관련 있다는 것 말이다.
비약일지라도 쉼터 조성 계획 문서의 저자이자, 난장판이 나기 전부터 내 이름을 알고 자신을 찾아오라 말했던, 어쩌면 방금 마주한 파원이라는 조직마저도, 내가 지금까지 겪은 모든 사건이 전부 다, 그 사람, 고유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부터 사방을 밝히는 빛이었다. 빛이 나는 방향에는 언젠가 보았던 블랙홀의 시뮬레이션 영상처럼 공간의 왜곡과 그를 따라 빛이 고리를 이루는 장면이었다. 블랙홀이라기엔 중심부가 검지 않은 오묘한 색이었으며, 그렇다고 아니라기엔 내가 봐왔던 블랙홀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생긴 기이한 구체였다.
“저 아래를 보십시오. 저것이 바로 우주의 씨앗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빚어낸 기적의 산물이죠.”
연구원처럼 차려 입은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저것이 개화할 즈음 우리는 다른 우주에서 만나게 될 겁니다. 새로운 시작인 셈이죠.”
“별개의 우주가 될 수도, 현재의 우주를 집어삼킬 수도 있어. 아직 완전히 알아낸 건 아니야. 새로운 가능성, 현재로서 나는 그 정도로 보고 있지.”
도저히 무슨 뜻인지 이해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가능성이었다. 과연 저 가능성이 옳은 미래에 닿을 수 있을까? 저들과 함께하면 과연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갑자기 방 안에서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칩입자? 여기에서 허가되지 않은 사람이라니?”
옆에 있던 연구원이 복도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사람은 나를 붙들고 말했다.
“여기서 절대 벗어나지 마! 절대로!”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고, 곧바로 연구원의 뒤를 따라 복도를 달려나갔다.
텅 빈 연구실, 두꺼운 유리 바닥, 그 안에 갇힌 거대한 구체. 나는 혼자 남아 우주의 씨앗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구체.
— 가능성이라.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뜻은 불확실성 또한 무한하다는 뜻이기도 하죠.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문득 소름이 끼친다.
— 질문은 나중에. 우선 복도 쪽으로 걸어 오실까요.
나는 어두운 복도 너머를 바라보았다.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이런, 고민을 너무 오래하시는군요.”
똑같은 목소리가, 이번에는 복도 너머로부터 다시 한번 들려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쉼터에서 보았던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어떻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다 생산적인 질문을 먼저 건네주시죠. 그리고 질문 전에 먼저 답해드린다면, 저는 흔히 말하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오른 손의 든 권총을 검지에 끼워 빙글빙글 돌려대고 있었다.
“저는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권능을 함부로 남용하는 사람들을 혐오합니다.”
공간을 다룬다던 대표는 총에 맞았는지 조금씩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남용하는 단체가 바로 이곳, 파원이지요.”
남용이라…
“이름의 힘을 남용한 것은, 쉼터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쪽도 텔레파시 같은 능력을 막 써대는 중이잖아요?”
“음, 정확하게는 ‘소통’이란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제 권능은 필요에 의해서 사용되는 중입니다.”
“소통? 제가 격은 일은 전혀 소통 같지 않았어요. 그리고 전 아직 쉼터에서 행동을 강제되었던 순간을 잊지 않았습니다.”
권총 돌리기를 멈추고 잠시 생각하는 쉼터의 사람이 권총으로 입술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야, 기존의 인간이 추구하던 소통이란 의미는 쌍방향의 대화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권능이 의미하는 소통은 다릅니다. 권능은 육체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능을 이용해 아무런 제약 없이 소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이러한 권능이 없으니 주고 받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저는 이러한 권능을 통하여 고유성 씨의 행보를 쫓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다 들을 수 있었던 겁니다. 아, 그리고 지금 여기에 서있는 것도 사실은 소통의 권능이지요.”
쉼터의 사람이 팔을 펼치자 그 모습이 일순간 사라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권능은 이름 안에 담긴 의미 그 자체를 모든 제약을 벗어나 행할 수 있게 해주니 말입니다.”
“그렇게 내 앞에…”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그리고 이제 남용을 바로 잡는 일의 마무리 단계이지요. 고유성 씨, 아무래도 당신이 일을 처리해 주셔야겠습니다. 저에겐 말씀드렸듯이 공간을 다룰 권능이 없거든요.”
그 사람이 우주의 씨앗을 가리켰다.
“저 무질서한 공간을, 권능의 남용을, 이 세상에서 지워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전에 왜 날 고유성이라 부르는 겁니까?”
고유성.
난 이 이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 세 음절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그런 의문을 새삼 가져보았다. 내 앞에서 나를 위협하는 사람이 나를 보고 고유성이라 불렀다. 의미를,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지금 이 상황 속에서도, 내 감정은 가라앉았다. 잠깐의 당황은 희석되어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하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직도 그런 소리를… 당신만이 권능의 질서가 정립된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모르는 겁니까.”
고유성.
그 이름은 과연 무엇인가.
기억 상실, 이라기엔 부드럽게 나열된 기억들. 나의 이름은 달랐다. 아마도.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대명사. 하지만 그 직책을 떠맡은 기억이 내겐 없었다.
나는 고유성을 만났다. 그 기억 속 인물은 누구이고, 그 기억은 어째서 심어졌는가.
가장 큰 의문이다.
“난 고유성이 아니야.”
그리고 나름의 해답이다.
“맞아. 넌 고유성이 아니야.”
복도에서 들린 목소리에 시선이 향한다. 그곳에서 다시금 사람이 걸어온다. 어두운 장막을 넘어서자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파원의 대표라고 부르라던 사람이었다.
“파원…! 당신들이 먼저…!”
“아니, 우리가 아니다. 고유성의 의지였어.”
쉼터의 사람의 손이 파원의 대표에게 총을 겨눈다. 하지만 파원의 대표는 개의치 않고서 내게 다가왔다.
“당신은 늘 끝을 맞이하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규율을 만들고 현상황을 유지하고자 했어. 하지만 유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것을 권능의 남용이라 생각하다니. 시대에 뒤떨어지는 생각 아닐까?”
탕—! 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총알은 아무것도 관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쉼터의 사람이 쏘아진 총알까지는 소통할 수 없었나 보다.
“우리가 지금 몇 번째 우주인지 알아? 샐 수도 없다고! 그 동안 우리는 권능의 남용 탓에 지금까지도 고통 받고 있다고!”
“알지. 왜 모르겠어. 내가 지금 무수히 많은 씨앗을 준비해 왔다는 것도 알잖아. 나 역시 무수히 많은 쉼터가 조성되어 왔더는 것을 알고 있어. 하지만, 이건 내 일이야. 그리고 고유성의 저주지. 모두 알아, 안다고! 아니까, 할 수 밖에 없잖아. 미치지 않으려면.”
“고유성 씨. 언제까지 남용할 겁니까. 아니, 아니야. 그냥 새로 시작합시다. 아니야! 이젠 지쳤습니다. 이런 촌극도 질렸다고요. 제발 권능의 사용을 멈춰주십시요. 이 굴레를 끊어주십시요. 이 대치를 그만하게 해주세요. 당신을 설득하는 일도, 파원을 라이벌로 삼는 일도, 제발 그냥, 그냥 없었던, 일어나지 않은 그런 세상으로. 그냥.”
쉼터의 사람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다 핏, 하고 사라져버린다.
“고유성. 우리는 별이 되지 못한 유성이며, 끝없이 떨어지는 이름이야. 하지만 너 하나만으로도 지금의 세상이 변하지 않게 되었지. 내가 새로운 시작을 하여도, 저 자가 풍요로운 쉼터를 조성하여도, 네가 죽으면 다시 처음 시작 지점으로 돌아오더라고. 우리가 처음 약속을 맺은 그 날로 말이야.
그런데 웃긴 점은 우리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더라. 단지 기억을 잇고, 처음부터 시작할 뿐이야. 쉼터를 조성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너의 능력 때문에.”
파원의 대표는 나에게 다가와 양 어께에 손을 올렸다.
“사실 나도 꽤 지쳤어. 너는 항상 기억을 잃어서 등장하거든. 너의 방 안에 꽁꽁 숨어서 말이야. 우연을 가장한채, 아니면 강제로, 그것도 아니면 친구가 되어 자연스럽게, 너를 방 밖으로 끌어냈어. 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되면 너는 선택하지. 어떤 선택이든 좋아. 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처음으로… 이제는 나도, 그만하고 싶어졌어. 이번 회차는 만족했을까? 그렇다면 굴레를 좀 멈춰주지 않을래? 약속을 잊은 건 미안.”
그 말을 끝으로 파원의 대표는 복도로 향해선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서서 그들의 말을 생각해보았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무수히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너의 이름… 그것은… 세계를 재구축하는 힘이야. 저 씨앗의 트리거라고!”
“나는 온우주를 비밀을 파헤치는 파원이라네!”
“지긋지긋해!”
“저기 우리는 친구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유성 만들기!”
“저자를 쏴라! 저자가 파원의 수장이야. 만악의 근원을 쏴죽여버려!”
“이번 회차는 망했어.”
“자… 어서! 너의 진짜 이름을 떠올려…!”
“이 앞은 쉼터입니다만, 어떤 용무로 오신 거죠?”
“신기하지 않아? 저렇게 생긴 게 씨앗이라니.”
“글쎄, 파원이라는 종교 단체가 극성이라네요?”
많다. 많았다. 그 속에서 내 등을 짓누르는 무게가 느껴졌다. 이건 짐이었다. 내가 지고 가야할 부채였다. 뭘 하려고 했던 걸까? 분명 시작은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이유가,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낙원에서 살고 말거야!”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한 가지 이유가, 나를 앞으로 이끈다. 내 이름에 담긴 의미는, 거대한 변화 그 자체이자 족쇄다. 나는 변화를 이끌기 위해 태어났다. 세상은 변화를 원하기에 나를 탄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가 고유하여 족쇄가 되었다. 나의 이름이 이윽고 굴레를 만들고 말았다. 내가 살아있는 세상이 고유하도록,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이 고유하도록, 나는 그런 소원을 내 이름에 대고 빌어버린 것이다. 나의 존재가 항상 굳게 있으라고.
하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라도 이름을 버렸다. 내 이름은 그 날부터 고유성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걸 잊어버렸다. 하지만 내 존재는 이미 빌어버린 소원에 의해 항상 굳게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고유성이다. 이름은 없어도.
그래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할까?
“어쩌면 오래전에 끝냈어야 하는 일.”
내가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지어야 했다. 나는 우주의 씨앗을 보았고, 내 이름이 가진 의미를 곱씹었다. 무엇이 의미 인지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리고 내뱉었다.
“고유성固有星.”
우리의 세계는 시간은 돌려 다시금 시작할 것이고, 이제는 내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별이 굳게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이름은 나름대로의 성질을 가진 채로 굳게 있게 되겠지. 하지만 세상이 굳게 있으니 이전처럼 난장판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몇 가지 규칙이 있는 단조로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중력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유명한 이름들만이 굳게 있을 것이다.
내 이름을 세계에 주었기에 새로운 세계에는 내가 없다. 이후의 이야기는 낙원의 사람과 파원의 대표가 이어가겠지. 나도 그들의 이야기를 곁에서 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래서 인가 보다. 그들이 만드는 세상에서 함께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붙잡았나 보다. 기억은 잘 나지 않았으나,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래서 나는 작별을 고한다.
고유성, 나의 이름으로부터.
호스트 코멘트
사실은 만 오천 자 정도 되니 퇴고에 손대기가 무섭더라고요…
엔딩 파트를 많이 수정했습니다.
카찌님이 작성해주신 부분에서 갑자기 ‘타임루프’ 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대략적인 구성을 하여 다듬었습니다.
사실 작중 세계가 처음이 아니라는 부분이 추가되었고, 주인공이 세계에게 이름을 주고 사라진다는 포멧은 그대로 가져왔죠.
그 사이에서 쉼터의 사람도 단순 악역에서 사연 많은 사람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조금도 퇴고를 더 좋은 흐름을 가져갈 수도 있겠지만, 더 손 보면 과해 질 것 같아서 퇴고를 마칩니다.
스레드에 참여해주신 분들,
후원해주신 분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스레드에 참여해주시고 후원까지 해주신 카찌 님도 특히 감사합니다.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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