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창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피곤했던 모양인지 내 어깨에 기대어 금방 잠이 들어버린 그녀는 아마 짐작조차 못 하겠지만, 4시간 후 버스가 서울에 도착하면 나는 내리는 대로 그녀에게 이별을 고할 예정이다. 여러 번 망설여왔지만, 오늘은 말할 생각이다. 그리고는 쿨하게, 깔끔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대로 헤어지는 거다.
이유야 여럿 있지만, 내가 헤어지려는 건, 우선 그녀가 종종 내게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내 어깨에 뺨을 괸 그녀가 아이처럼 몸을 뒤챈다. 저릿한 통증이 상반신을 관통한다. 내 쇄골에는 두 개의 철심이 박혀있다. 이것은 그녀가 내게 남긴 무수한 흔적의 일부다. 내 얼굴은 항상 푸르게 멍들어있다. 몸뚱이에는 십여 곳에 달하는 징그러운 흉터가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물론 그녀의 의지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녀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심각한 조현병을 앓고 있음에도, 그녀와의 연애를 견뎌낼 수 있다고 헛된 다짐을 한 나의 잘못이 더 크다. 나는 그녀의 영혼을 어루만져 줄 수 있다고 자만했고 그나마 나에겐 가끔이나마 따스한 내면을 비쳐 보이는 그녀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다. 나는 그녀의 구원자이기를 자처했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와의 연애 이후로, 그녀의 병세는 더 악화되어 갔고, 폭력성은 심해졌다.
점점 심해지는 손찌검을 견디다 못해 이별을 통보하려고 몇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던 것은 그녀의 치명적인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대학오늘’의 표지모델을 한 적이 있을정도로 그녀의 미모는 빼어났다. 아무리 화가 나도 미소 한방에 모든 게 무장해제되어버리는 나를 한심하게 여길지 몰라도 그녀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본 남자라면 수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최고로 아름다울 때는… 나를 때릴 때다. 그럴 때면 그녀는 전형적인 거짓 미소를 짓는다. 입은 밝게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차디찬 살의를 뿜어내고 있는. 아아, 그 미소! 그 미소를 보고 있으면 맞다가 죽어버려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잘못돼 버린 걸까. 나는 그 미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다 며칠 전. 가죽부츠로 내 사타구니를 걷어차려던 그녀의 눈에서 찰나의 머뭇거림을 보았다. 그것은 완벽한 미소에 걸맞지 않는 자그마한 흠결이었다. 3년 만에 찾아낸 티끌만한 흠결. 물 그릇에 똥 한 방울이 튀면 그 즉시 똥물이 된다. 그릇이 제아무리 크다 한들 똥물은 똥물이다. 나는 그녀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에 몹시 화가 났다.
분노는 환멸로, 환멸은 곧 헤어질 결심으로 응축되었다. 내 끝없는 고통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이별 뿐이었다. 그래, 오늘은 헤어지는 거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틈을 보인 걸까? 설마 내가 그녀의 무차별적인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단련을 해왔음을 동물적 직감으로 알아챈 걸까?
지금껏 그녀에게 처맞고 살아온 것은, 단순히 그녀가 나를 때릴 때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거나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릇 사람이라면 어떤 신체적인 위협이 가해질 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움찔’하는 틈을 줄 새도 없이, 그녀는 워낙 빠르게 나를 가격한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수를 써야했다.
“자꾸 내가 잠 들려고 할 때 옆에서 노래 흥얼거리지 말라고 했지?”
그녀는 가끔 내게 이런 얘기를 한다. 물론 나는 부른 적이 없다. 일절.
하지만 나는 늘 비슷한 대답을 한다.
‘미안. 네가 자는 모습을 보면 노래가 나와버려서…’
그러면 그녀는 씩씩대며 나를 폭행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때리고 나면 그녀도 분이 풀린 듯 했고, 나도 좋았다.
한번은 그녀가 나를 때리고 있을 때 갑자기 약 기운이 돌았던 것인지, “어머! 자기야. 나 또 잘 못 들은 건데 오해하고 자기 때린 거 아니야?” 하며 구타를 멈추고 울먹인 적이 있었다. 그래. 그 철심 사건 때였다. 때리면서 뭔가 부러지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든 건지 뭔지는 몰라도 가끔 갑자기 정신이 돌아 올 때가 있었다.
호스트 코멘트
스레드 소설 운영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제선정부터 참여유도, 방향수립 등등… (아무래도 열거형의 주제가 무난한 듯 합니다.)
지금까지 쓰여진 글은, 그냥 어떤 소설의 도입부로 보아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주제로 다음 번에 새롭게 이어나갈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좋은 아이템으로 놀이터를 다시 열어보겠습니다. 재미있는 글 이어주신 모든 참여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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