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물 주인공을 위한 지침서

호러물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위험하고, 공포스럽고, 무엇보다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 있는 경험이니까. 그러나 호러물 주인공들은 대개 기초적인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스스로를 더욱 큰 위험에 빠뜨리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것들을 감안하여, 호러물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 따라야 할 지침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친구들과 쓰러져 가는 폐가를 방문해서 그곳을 수색해야 할 때, “각자 흩어져서 뒤져보자” 따위의 소리는 하지 마라. 만약 그런 소리를 꺼내는 친구가 있다면, 정중한 태도로 그에게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을 상기시켜주도록 해라.

 

2. 모든 문제는 사전에 예방해라. 우연한 교통사고가 발생해서 다른 사람에게 다치게 했다면, 119에 전화하고. 응급처치를 한 후 구급대가 올 때까지 그를 친절하게 대해라. 추가적으로, 일행이 만약 그냥 가자고 말한다면, 정중한 태도로 당신이 여기 눕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해라. 그렇게 한다면 설령 피해자가 죽더라도 당신은 좀 덜 노릴 것이다.

 

3. 누군가가 실종되고 불안한 상황에는, 등장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안 씻어도 다들 신경 쓰지도 않을 거니 샤워 부스 근처에도 가지 마라. 생각보다 사람은 샤워를 오랫동안 안 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 인생의 마지막 샤워를 즐기며 나체로 죽고 싶지 않은 바에야 샤워 따위는 신경 꺼도 좋다.

 

4. 인적 드문 곳에서 연애질하지 마라. 피치 못할 상황인 경우 이상한 소리가 나면 입 다물고 당장 도망쳐라.

 

5. 아이에게 인형을 선물하고 싶다면, 대형마트에서 구매해라. 이미 웬 기분 나쁜 노파의 상점에 들러 인형을 하나 골랐다면. 노파가 뭐라 말하려고 할 때 인형을 노파에게 집어 던지고 집에 돌아가 아이를 데리고 대형마트로 가서 번개맨 인형을 선물해라. 이는 실제로, 웬 기분 나쁜 밀랍 인형보다 아이의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된다.

 

6. 당신이 의견을 말한 후, 옆 친구가 만약 ‘그건 아닌 것 같은데’라고 말하면, 비록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진지하게 들어라. 그가 친구가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들어라. 하지만 ‘저게 모든 원흉이야’라고 말하면 그건 진지하게 듣지 마라. 대개 그건 틀렸고, 맞았더라도 딱히 탈출에 도움은 되진 않는다.

 

7. 어둡고 외진 곳에는 웬만하면 가지 마라. 가더라도 무슨 목적이건 간에 빨리 나와라. 라이터나 손전등은 갖고 가지 마라. 그런 것들은 꼭 중요한 순간에 꺼져서 더욱 큰 공포감을 조성하게 된다.

 

8. 방을 구하러 갔을 때 집주인이 ‘전에 살던 사람이……’따위의 이야기를 꺼낸다면, 시세보다 지나치게 저렴하게 나온 방에 입맛을 다시는 대신 불길한 사연이 없는 쾌적한 거주지를 찾아보도록 해라.

 

9.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에 가자고 하는 친구가 있다면 반드시 말려라. 그런데도 친구가 그곳에 들어간다면 굳이 뒤따라 들어가지 말고 곧장 경찰에 신고하라. 우정은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친구와 모든 것을 함께할 필요는 없다.

 

10. 저 자동차는 초반부에는 뒷좌석에 의도하지 않은 동승자가 포함되어 있어 위급한 음악이 꺼질 때쯤 백미러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중반부에는 살인마에게 쫓기는 와중에 급하게 들어갔다가 시동이 안 켜질 것이며. 후반부에는 작가의 성향에 따라 작동 여부가 바뀐다. 작품의 진행 상황을 잘 보고 적절히 자동차를 활용해라.

 

11. 여름휴가를 보낼 때는 외진 숲속에 위치한, 불운한 사건사고가 얽힌 낭만적인 별장을 찾아보는 대신 플레이스테이션과 컴퓨터, 그리고 넷플릭스를 이용할 수 있는 쾌적한 친구 집에서 파티를 열어라.

 

12. 다급한 음악은 그 음악이 들리는 순간을 위한 게 아니라, 그 노래를 끝난 후 정적을 위한 것이라는 걸 명심해라.

 

13. 공포체험을 하자고 말하며 ‘쫄? 쫄?’ 거리는 친구가 있다면 목을 졸라 울음소리를 바꿔줘라.

 

14. 완벽한 계획은 없다.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계획은 대개 어처구니없는 문제로 실패한다. 대신 클라이맥스에서 임기응변을 활용해라. 창고에서 꺼낸 드론으로 살인마를 유인하여 반대편으로 가겠다는 놀라운 계획은 드론의 배터리가 없었거나 살인마가 싸드를 발사해서 안 되겠지만. 죽기 직전 그냥 잡히는 거 주워 던지는 건 놀라울 정도로 잘 될 것이다.

 

15. 사진을 찍기 전에는 항상 인원수를 확실히 체크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의 신원까지 확인해라. ‘어라? 우리 분명 여섯 명이서 놀러 왔는데, 사진 속에도 여섯 명이야. 대체 사진을 찍어준 건 누구였지?’ 같은 상황을 미연에 방지해줄 수 있을 것이다.

 

16. 낯선 곳에서 이상하리만큼 손전등에 들어가는 건전지나, 당신이 들고 있는 카메라의 배터리가 많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지금 위험에 처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17. ‘그럴 리가 없어!’라고 옆 사람이 말한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며, 무조건 그럴 것이며, 꼭 그럴 것이다. 그 말을 잘 들도록 해라. 이는 당신이 말할 때도 포함된다.

 

18. 평소에 안 하던 짓은 하지 마라.

 

19. 하이힐은 신지 마라.

 

20. 낯선 곳에선 최대한 이동을 멈춰라. 괜히 탐험이랍시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동안 건드려선 안 될 존재에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다.

 

21. 너를 향해 사납게 짖고 있는 개를 발견한다면, ‘착하지’라고 말하며 그를 진정시키려고 시도하는 대신 개를 묶어두고 있는 목줄의 길이에 유의하여 최대한 멀리 떨어지도록 해라.

 

22. 너를 향해 사납게 짖고 있는 개가 목줄에 묶여 있다고 해도 방심하지 마라. 대개 그런 목줄은 쉽사리 풀리거나, 잘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목줄이 고정된 부분이 부서진다.

 

23. 원숭이 손을 손에 얻었으면 동물 보호 단체에게 넘겨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범인을 색출하도록 부탁해라.

 

24. 경찰을 불러라. 당신의 세금은 그런 곳에 쓰라고 있는 것이다. 자력구제는 정말 긴박할 때나 하는 것이다.

 

25. 경찰을 부르지 마라. 그들은 대개 보신주의적 행태를 보이며 무의미한 순찰을 끝으로 돌아갈 것이다. 심한 경우, 너를 범인으로 몰거나 정신병자로 몰아 더욱 큰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26. 고서점 같은 곳에서 듣도 보도 못한 수상한 제목의 오래된 책을 보게 되고, 그걸 펼쳐서 서문을 읽었는데, 이상한 경고문을 읽었다면, 더 읽지 말고,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놓고 되돌아보지 마라. 아예 처음부터 손도 대지 말고 그냥 지나치면 더 좋다.

 

27.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28. 부정적으로 생각하라. 미신과 연관된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지는 태도를 견지하라.

 

29. 믿을 만한 통계에 의하면, 가장 끔찍한 재앙들이 불어 닥치게 된 이유는 누군가가 악령에 씌어서도 아니고, 신적인 괴물이 등장해서도 아니라. 사람들의 사소한 욕망과 이기심에 의해서다.

 

30. 캠코더를 들고 촬영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원해라.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한다면 어둠 속에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고, 무엇보다 적어도 마지막까지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분 건전지는 항상 지참해야 한다.

 

31. 설사 당신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 해도, 미지의 존재를 불러들이는 의식은 제대로 해야 한다. 대충하지 마라. 대충하면 재앙을 피해갈 수 없지만, 제대로 하면 살 수 있는 실마리라도 있다.

 

32. 이상한 내기하지 마라. 특히 혼자 어디 들어갔다 나오는 내기하지 마라. 친구들이 얄밉게 쫄? 쫄? 거리면 당당하게 인간은 주행성에 사회적 동물이라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을 뒤를 봐줄 일행 없이 나다니는 것은 상당히 힘듦을 주장하라.

 

33. 마음이 가는 상대와 함께 위험에 처했다면 상대를 향한 마음을 일찌감치 포기해라. 둘 다 살아나갈 확률은 매우 희박하며 둘 중 하나는 누군가에겐 훌륭한 놀이 상대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라.

 

34. 지금이라도 건물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생각으로만 끝내라. 안전한 위치까지 뛰어 누군가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너의 두 다리가 아직은 제 기능을 하고 있음에 감사하며 아침이 밝아오기까지 숨을 죽여라.

 

35. 저주는 실존한다. 만약 저주에 걸린 비디오나 영상, 사진 등을 입수했다면 즉시 불태워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에게 보내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36. 저주는 실존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 관심 끄고 하던 거나 해라. 실존하지 않는 것에 접촉하거나, 과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37. 만약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서, 본인 이외에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즉시 선생님께 출석부 열람을 요구하여 그 학생의 이름이 있는지 찾아보아라.

 

38. 하지 말라면 하지 마라. 만약 하지 말라는 소리를 한 사람이 사건에 깊이 개입하고 있는 무당이나 사제 등의 존재라면, 제발 하지 말라면 하지 마라.

 

39. 야생에서 구한 음식은 먹지 마라. 어떤 독이 있을지 모른다. 유통기한이 빠른 음식부터 먹어야 하며 통조림이나 병에 담긴 음식은 최대한 아껴라. 음식을 조리하는 행동은 냄새와 불빛으로 다른 위험한 존재들을 불러들일 수 있으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40. 이하의 인물, 혹은 물체들은 결코 따라가서는 안 된다.

① 이리 오라는 친구

② 그냥 금발 여성

③작품 진행 중반에 나오는 출구

 

41. 우울하고 힘들 때마다 밝고 활기찬 노래를 부르도록 해라. 영화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의 엔딩 곡 정도면 충분하다. 심령이 영어를 잘한다면, 당신을 용서해줄지도 모른다. 용서해주지 않더라도 당신 기분은 좀 나아질 거다.

 

42. 일찍 귀가해라. 밤중에 어두운 길을 혼자 걷는 것은 굳이 귀신을 만나지 않더라도 충분히 위험하다.

 

43. 여행지에서 괴담을 듣는다면 귀담아들어라. 만약 미신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계속 논다면 당신이 그 괴담 속편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호스트 코멘트

호러물 주인공을 위한 지침서입니다.
편집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잘려나간 대목이 꽤 있습니다… 그 부분은 죄송합니다.
~~해라, 혹은 ~~하지 마라 라는 형식과 맞지 않는 것들, 살아남기 위해 따라야 할 지침이 아닌 것들을 주로 잘라냈습니다.

참가해주신 모든 작가님들, 보잘 것 없는 프로젝트에 후원해주신 후원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참여자


후원자

태윤 이상문그리고 익명의 후원자 2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