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결재는 분명 사규 위반일텐데

야~ 오래간만이야! 잘 지냈지? 그래 그래, 이 시국에도 회사 안 잘리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지. 자자, 일단 저녁 먹으면서 못했던 얘기나 하자. 마침 나도 할 이야기가 있어.

 

… 그래, 너네도 전 인원 재택근무 중이구나. 우리도야. 어? 내가 하려던 이야기? 아아, 그래. 너 시간 충분하지? 꽤 긴 이야기가 될거야. 요 근래, 아니 내 평생 잊지 못할 일들을 겪었거든. 분명 너도 흥미로울거야.

 

우리 회사도 너희처럼 재택근무 체제로 들어선지 이제 1년 좀 넘었어. 한달 전 즈음에, 우리 부서 권팀장님이 메일을 보냈더라고. 전달사항이 있으니 수신자들은 되도록 회사로 나오라고. 처음엔 장난치시나 했어. 전달사항이 있으면 이 메일에 썼음 됐잖아? 그래도 인원이 적은 회사니까, 찍혀서 좋을거 없으니 바로 준비해서 회사로 나갔지.

 

회사 정문엔 우리 부서 사람들만 모여있었어.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건 우릴 소집한 권팀장님이었지. 어젯 밤에 뭘 하신건지 몰골이 어우, 엄청 초췌하시더라. 다 모인걸 확인하고선 우리한테 회사 안에서 얘기하자며 회의실로 전부 데려가셨어. 거기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박이사님이… 돌아가셨어, 6개월 전에.”

그 한마디가 이제부터 일어날 사건의 발단이었어.

 

권 팀장님은 일단 누구한테 말하거나 보고하지 말라고 했고, 우리는 모두 동의했어. 뭐, 대리결제는 사규 위반인 것도 있지만… 이걸 뭐라고 설명하겠어? 6개월 동안 우리는 누구한테 보고하고 지시를 받은 거냐고. 팀장님은 혹시, 혹시 자기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 좀 더 알아보겠다고 했어. 다들 복잡한 표정으로 회의실에서 나갔고, 팀장님이 나를 불러세웠어.

 

“Y씨, XX동 살죠? 저하고 잠시 갈데가 있는데, 부탁해요.”

 

왜 하필 나일까? 그땐 차라리 확진자였다하고 나오지 말걸, 별 생각이 다 들더라. 권팀장님은 자주 부탁하는 분이 아니라 거절하기도 난감했지. 안그래도 요즘같은 시기에 귀찮다는 이유로 내 바로 위 직장상사의 부탁을 거절한다? 너라도 쉽지 않은 선택일거야.

그래서 어디 갔냐고? 박이사님네였어. 그때서야 알게됐지만, 얄궂게도 우리집 근처더라. 권팀장님은 박이사님네 집에 자주 술마시러 왔다며 능숙하게 도어락을 열고 들어갔어. 집 안은 조용했어.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스산함, 상상이 되니? 유령의 집에 들어간 것마냥 무서웠지만 권팀장님은 그런 나를 신경쓰지 않고 박이사님을 부르며 주변을 살폈어.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우리 둘은 곧장 서재로 갔지.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간 서재에는… 이름하곤 다르게 벽장에 책이 없었어. 빈 책장을 채우고 있는 것은 명품 립스틱들 뿐이었지.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는 것을 드러내듯 화려한 색들의 향연. 게다가 완전히 새거였어. 여자니까 화장품이 있는 게 당연하다고? 너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데, 박이사님은 남자분이야. 거기다 봐준다 쳐도 화이트닝도 아니고 립스틱을? 난 근무하는 동안 박이사님이 입술에 그렇게 요란한 색을 바른 건 본 적이 없어.

 

내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권 팀장님이 갑자기 묻더라.

 

“Y씨, 종교 믿어요?”

뭔 소리인지 몰라서 가만히 있으니까, 다시 묻더라고.

 

“귀신, 저주… 뭐 이런 게 있다고 생각해요?”

 

뭐라고 답했더라, 있을 수도 있겠죠? 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여하튼 대답했더니 권 팀장님이 쓰게 웃더니, 서재랑 연결된 화장실 문을 갑자기 열었어.

 

화장실은 바닥에 그려진 섬찟한 마법진같은걸 빼면 너무나 평범했어. 모델하우스의 화장실처럼 사용했단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 거기다 화장실 문이 열렸을 때 뿜어져 나오던 그 냉기… 어으,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네.

응? 마법진?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암튼, 화장실에서 특이한 점을 찾아볼 수 없어서 우린 박이사님 컴퓨터를 켜보기로 했어. 역시나…

 

“여기서부터 전부 박이사님이 승인한 게 맞아. 이게 대체…”

 

권팀장님과 나는 믿을 수 없었어. 관리자 계정으로 접속한 사내 결재시스템을 확인해보니 죽은 이후에도 박이사님은 계속 일을 하고 있었어. 등골이 서늘해졌지. 하지만 귀신이 결재한 것 같다고 보고할 수도 없잖아? 우리는 다시 이 집을 조사할 필요성이 생겼지. 권팀장님이 컴퓨터, 나는 방을 살폈어.

 

난 명품 립스틱이 진열된 곳을 다시 한번 봤어. 잘 보니 힘을 너무 주어서 뭉개진 립스틱이 있더라. 그 책장 틈에 번뜩이는 것을 보고, 나는 책장을 밀었어. 스르륵, 바퀴달린 책장은 옆으로 쉽게 밀렸지. 그 뒤에 있는 공간에는 그 립스틱으로 그린게 자명한 부적이 여러 개 붙어있었어.

 

그런데 묘하게 느낌이 싸한 거야. 아니 부적도 부적이지만 그림에서 냄새가 퀴퀴하게 올라왔다고. 비린내가. 그 뭉개진 립스틱 말이야, 외관은 분명 모두 다 이름은 들어봤을 명품 메이커였지만, 그거 그냥 껍데기였을 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선지 알지? 그거 돼지 피 굳힌 거잖아. 딱 그거야. 피비린내. 립스틱이 아니라 굳은 핏덩이였다고…

 

나는 코를 쥐고 방을 살폈어. 그림과 부적 말곤 눈에 띄는 게 없었지. 그림은 박이사님의 초상화였어. 기분 나쁜 기운이 흘러 나오는 그림이었지. 방을 나가고 싶단 생각이 절로 들더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돌렸어. 순간 그림 속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느꼈어. 지랄 맞은 육감이었어. 소름이 돋았지. 천천히 초상화로 눈을 돌렸어. 여자의 눈과 딱 마주쳤어. 그때였지.

 

“…야, 눈 감아!”

 

뒤에서 권팀장님이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퍼뜩 들더라. 분명 아까까진 나는 그림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는데, 이미 손으로 액자를 잡을만큼 가깝게 다가간 상태였어. 나는 곧장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어. 그러면 눈도 가려지니까. 권팀장님이 어깨를 두드리고서야 다시 주변을 살폈어. 액자는 팀장님이 문자가 마구그려진 천으로 가렸더라.

 

권 팀장님이 액자에서 손을 떼며 깊은 숨을 내뱉었어.

 

“그래.. 뭐 귀신 그런 게, 있을 수도 있겠더라고. 살다보니 이런 확신을 주는 날도 생기네…”

그리고는 조금 뜬금없이 물었지.

 

“Y씨는 회사에 직급이 왜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글쎄 당황스러웠지.

 

“직원도 별로 없는 우리 회사의 직급은 업무를 위한 게 아니에요. 이 회사의 직급은, 괴담의 피라미드입니다. 승진해서 얻는 건 괴담의 한 조각이고.”

 

… 미안, 미안. 표정 보니까 딱 알겠다. 바로 이해되는 내용은 아니지? 그때 나도 그랬어. 아마 권팀장님한테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걸?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팀장님?”

 

내가 이렇게 물으니 권팀장님은 나가서 얘기하자며 그 방을 철저하게 봉인했어. 어디선가 가져온 부적으로. 알고보니, 박이사님이 무속신앙이라도 믿었던건지, 책상 서랍에 부적이 다발로 있더라. 그 뒤에 권팀장님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

 

“지금부터 말할 이야기는, Y씨 직급엔 비밀이에요.”

 

권팀장님이 말씀해주신 괴담은, 아니 우리 회사 전설은 회사 창립일부터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해. 너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가 그러게 큰 규모는 아니더라도 역사 하나는 대기업 못지않게 오래됐거든. 지금 사장님은 돌아가신 창립자 분의 동생이셔. 사장님의 형님, 그러니까 창립자께서 사고를 당하시곤 유서에 이 회사를 어떻게 해도 좋으니 부디 없애지만 말아달라며 동생분에게 부탁을 하셨대. 사장님께선 형님의 유언을 저버릴 수도 없으니 일단 무작정 회사를 물려 받았다나 봐.

 

“Y씨가 느끼다시피, 우리 회사는 뭔가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회사는 아닙니다. 어디서든지 일거리를 물어와 처리하는, 속된 말로 심부름센터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도 용케 요즘도 저희는 일하고 있고, 월급도 밀리지 않고, 실적은 나름대로 쌓이고 있지요. 저도 언젠가 박이사님과 술마시며 들은 이야기지만… 이게 사람의 힘으로 이뤄낸 게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권팀장님이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는데 쉽게 납득은 가지 않더라고. 지금 돌이켜보면… 당연한 거였어. 나와 팀장님이 건드린 그 괴담에서, 이 이야기는 고작 5퍼센트? 아주 작은 부분밖에 되지 않거든. 수많은 이야기가 얽혀있었지. 그때 그 이야기를 듣던 나는 권팀장님이 뜬구름잡는 소리만 하니까 조금 짜증을 내버렸어.

 

“그럼 범인이 귀신인거에요?”

“모릅니다. 저도 팀장밖에 안되니까 들은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박이사님한테 그 이야기를 물려들어야 한다고 언질은 받긴 했지만…”

“그럼 어떡해야 하는거에요! 박이사님은 돌아가셨는데! 사장님한테 귀신이 보고올리고 박이사님을 때린 것 같다고 보고드려요?”

“… 아직은요. 다행히도 박이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누군가와 계속 메일을 주고받았어요. 봐봐요.”

 

유이사님이 띄운 페이지엔 박이사님이 사적으로 주고받은 대화들이 남아있었어. 뭐? 범죄 아니냐고? 그땐 그런걸 신경쓸 여유가 없었어. 선지로 만든 립스틱에, 사람 홀리는 초상화에 별 이상한 물건들이 내 직장상사 집안에서 나왔는데 궁금하지 않겠니? 게다가 집에 비밀공간을 만들었다고! 그 귀신들린 액자를 봉인하려고!

 

… 크흠! 쓸데없이 흥분해버렸네. 암튼, 박이사님이 죽기 전 수많은 메일을 주고받은 사람은 딱 한명이었어. 우리가 아직 회사다닐 때 퇴사하셨던 최이사님이었지. 당시엔 나도 입사한지 1년이 안됐을 때라 잘 모르는 분이었어. 퇴사할 때 자긴 시골에 집짓고 밭농사 짓고 산다며 농담한 건 생각나네.

 

“유이사님… 어디 사는지 아세요?”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으셨다면 아직 제 핸드폰에 번호가 남아있을 겁니다. 유이사님 후임으로 박이사님이 자리를 물려받았으니 저희가 알아야 할 것들을 알고계실 거에요.”

 

권팀장님은 전화좀 하고 오겠다며 잠시 서재를 나가셨어. 나는 메일 내용을 자세히 보려고 의자에 앉아 메일들을 훑어봤지. 박이사님… 귀신같은 건 시시하다면서 무서워하지 않던 분이신데, 시간이 흐를수록 메일 내용에 두려움이 묻어나더라. 뭔가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느니, 가위를 눌린다느니… 유이사님도 해법을 알려주고 계속 다독여줬지만 큰 효과는 없었던 것 같아. 메일들을 읽고 있는 사이에 권팀장님이 돌아왔어. 연락이 닿았으니 곧장 자기네 집으로 오라고.

 

…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해줄게. 그때까지 무사해야 한다!

호스트 코멘트

앞서 해당 소재를 제안해주신 모 커뮤니티의 ‘민트파인피자’님께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약 1개월 간 진행됐던 스레드소설이 끝났습니다. 참여자분들께 감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타 스레드소설과 달리 하나의 이야기를 전개하며 괴담을 덧붙이는 형식이라 참가자 분들도 많은 고민을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조금 더 참여가 쉬운 주제로 다듬었어야 했는데 제 부족함을 탓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추리괴담소설은 여러명이서 함께 써내려가기에 힘드네요.

되도록 호스트인 저는 이야기에서 빠져 여러분들이 써내려가는 흐름을 적절히 다듬는 정도에서 끝냈어야 하는데, 지금보니 제가 참여한 스레드가 절반에 가까워 보이네요. ‘우리의 이야기’보다 ‘제가 생각한 이야기’에 대한 강박관념이 강했습니다. 이 점을 유념하며 다음 스레드소설엔 참여를 독려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해당 주제는 제 개인 작품으로 다시 다듬어 써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대로 미완으로 남기기엔 정말 좋은 주제니까요. 다시 한 번 이러한 이벤트의 장을 열어준 브릿G와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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