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저희 가게는 정상영업합니다.

해가 지고 달빛이 차오르기 시작할 무렵, 내 가게는 모두에게 문을 연다. 차갑게 식은 랜턴에 다시금 불을 붙이고… 이런, 밀랍이 거의 다 녹았군. 내일은 식재료 사면서 꼭 새 양초를 사야겠어. 어제는 어설픈 강도가 내 식당을 털러 왔다가 식사중이던 경비단장에게 잡히고 말았지. 그제는 자기를 마왕이라고 소개하는 마족 소녀가 술과 차를 내어 오라길래 대접했었지. 나에게 왜 이런 손님들만 오는지 이제는 고민하지 않아. 내 음식과 술을 먹어주고, 자기의 삶을 이야기 해준다면 난 언제나 만족하니까. 자… 오늘의 첫 손님은 누가 될까?

 

– 딸랑딸랑~

 

정문에 걸어둔 방울이 맑은 소리를 내며 내 이목을 끌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오늘의 첫 손님은 어리숙해 보이는 전사였다. 사냥감을 노리는 매의 눈보단 사람들의 발길질을 두려워하는 도심의 비둘기와 같은 눈, 마치 방금 대장간에서 사온 것같이 어떠한 경험도 녹아보이지 않는 갑옷, 이 근방에서 전쟁이라도 벌어졌던 것일까? 아니다, 패잔병이라기엔 너무나 건강한 몸이다. 그는 나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바테이블 의자에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입을 연 것은 잠시 뒤였다.

 

“제가 정말 유명한 용사인데요… 제 회고록에 넣어드릴테니 이번 술값만 무료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완전 인기 많을 거에요.”

 

술값을? 무료로? 이렇게 대뜸? 적어도 예의바른 패잔병일지 모르겠단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이라면 그가 아직 음식을 시키기 전에 말해줬다는 것이겠군. 정말 순수하신 분일까? 그런 분에게 뭘 드리는 편이 좋을까? 흥미로움이 내 상상속에서 피어올랐지만, 그와 동시에 별로 탐탁찮았던 기억들도 함께 올라왔다. 한 번 떠보는 게 좋겠군. 나는 냉동 창고에서 꺼내온 볼로보 산 맥주를 용사라는 자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3주 전에는 용사라고 자처한 술꾼이 왔다 갔었고, 4주 전에는 용사라고 하기엔 살기등등한 여성분이 왔다 가셨습니다. 두 달 전 식재료를 사러 갔을 때 게시판에서 본 사진과 꽤 비슷해 보였지요. 제가 바깥소식은 손님들을 통해 듣는지라 용사의 의미가 이렇게 넓어진 줄은 몰랐군요.”

 

그는 뭔가 정곡에라도 찔린건지 얼굴에 침을 맞은 것처럼 움찔거렸다. 어색한 미소를 곁들여서. 용사라기엔 풋내가 나는 남자다. 하지만 감이 말하고 있어. 흥미롭다고. 대체 내 직감은 무엇을 알아챈 것일까? 그는 맥주를 한 잔 들이키고 금세 얼굴이 달아올랐다. 볼로보 산 맥주는 다른 지방에선 ‘찻잎으로 우린 가짜술’이란 별칭이 있을 정도로 도수가 약한 축에 속한다. 이보다 약간만 더 도수가 높았다면 오늘 장사하는 내내 자리 하나가 여관이 될 뻔했어. 입술에 묻은 맥주를 닦아내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죠. 제 원수를, 부모님을… 갚기 위해서. 칼을 들었습니다. 정말 끔찍한 일이었죠.”

 

그는 침울하게 고개를 떨구곤 자신의 주머니에서 부모님 사진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비극적인 사연이다. 수 년 전 식인 멧돼지가 자기 일가족들을 밟아 죽였다며, 두 눈이 시뻘개져서 술을 내놓으라 했던 풍차집 주인이 떠올랐다. 그 또한 그 아들과 비슷한 분노를 품고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내 흥미가 이 남자를 주시하라 말하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다.

 

“저런. 혹시 어떻게…”

“그 고블린들에게…”

“아아…”

“도박으로 다 털리셔서…”

“아아… 음?”

“저희 집을 팔아넘기시고 야반도주를…”

 

의외다. 생각 외로 형편없는 이야기다. 용사라고 주장하는 건 둘째치고 한서린 푸념에 이렇다 할 흥미요소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회고록까지 쓴다고? 회고록이 아니라 자필 유서겠지. 자연스레 그와 거리를 둔 채 볼로보 산 맥주를 다시 내밀곤 문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흥미로울 거란 내 감이 틀렸나? 그때 사내가 발끈하며 뒤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꽤 낡은 단검이군요.”

“20년 전만해도 이 근방에 야생 아인족이 강도질을 일삼았던 걸 아십니까? 저희 아버지는… 제가 어릴때만 해도 자랑스러운 전사셨습니다.”

 

그의 말 대로다. 20년 전만 해도 이 구역은 모험자로 바글바글한 마을이었다. 어디선가 출몰한 아인 부족들이 무리를 지어 통행인들과 무역상을 덮쳐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었고, 돈냄새를 맡은 힘좋은 사람들이 자기가 해결해 주겠다며 떵떵거리고 이 마을에 발을 디뎠다. 나는 이걸 기회로 여겨 모험가들 상대로 돈을 벌기 위해 이 곳에 식당을 차렸다.

두 가지, 내 예상이 틀렸는데 하나는 단골로 만들어 오랫동안 장사하려 했던 모험가들은 내가 준 술이 마지막 인생주가 됐다는 것,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 의해 야생 아인족들이 흩어져 손님이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그 원흉이 이 사람의 아버지였을 줄이야. 역시 내 감은 미래를 엿보는 모양이군.

그의 말에 따르면 20년 전 그의 아버지와 그의 동료들이 이 근방의 아인족들을 모두 격퇴했다고 한다. 단검으로 그들과 맞서다니, 보통 실력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도박으로 몰락하다니.

 

“그런 분이 어쩌다가 도박으로 야반도주를…”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며 자세한 사정을 묻자 남자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하기를 망설인다. 좋은 징조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망설이는 이야기 치고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는 없었다. 맘같아선 무엇이건 내주고 이야기에 대한 값을 치루고 싶었지만 장사꾼이 돈이 없다는 손님에게 마음을 열 수는 없는 법. 나는 어제 장사하고 조금 남은 브랫 치즈 조각과 반 잔만큼 남아 처리하기 애매했던 플로라 위스키에 적당히 음료를 타 그에게 건네줬다. 호의로 받아들인건지 남자는 언제 망설였냐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스트 코멘트

되도록 길게 이어가 많은 분들의 상상력을 담아내고 싶었지만 부득이한 개인사정으로 인해 조기 마감한 점 죄송합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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