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ritg.kr/threadnovel/120918/ <이전 화
이 무슨 어린애 말장난 같은 규칙인가. 나는 잘못 읽은 건가 싶어 눈을 끔뻑였다. 그러나 안내문 첫 줄을 다시 읽기도 전, 명부를 들고 돌아온 지배인이 헛기침을 하며 나를 불렀다.
“아시겠지만, 원래는 못 보여드리는 겁니다.”
지배인이 내게 명부를 내밀었다. 금일 4층 투숙객들의 싸인이 서명란 맨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쓰여 있었다.
401호 / 로베르투스 오귀스트
402호 / 안토니오 베라티
403호 /
405호 /
406호 / H. 카니예
407호 / 캐롯 H. 스미스
408호 / 엘런 T. 스미스
409호 / 호세 루이지
410호/
411호/ 마리.G.힐
412호/ 카스트로
총 12개 객실 명부의 맨 마지막에는 눈에 익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카스트로.
호텔 객실 전체를 예약한 사람이었다.
그때, 로비 1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초췌한 안색의 노인이 내렸다. 지배인이 재빠르게 명부를 거둬 데스크 뒤로 숨겼다.
“좋은 밤입니다.”
인사를 건네는 지배인을 무시하고, 노인은 초점 없는 눈으로 앞을 응시하며 후원 쪽으로 걸어갔다. 노인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지배인이 내게 말했다.
“더 보여드려야 할까요?”
“됐습니다.”
엘리베이터 보이가 열림 버튼을 꾹 누른 채 내가 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4층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목표의 위치를 알았으니, 준비물을 챙길 시간이었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갔다.
“4층입니다.”
내가 내리기 무섭게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갔다. 이 호텔 건물은 기역자 모양으로 한 번 꺾여 있어, 12호로 가려면 모퉁이를 돌아 복도 끝까지 걸어야 했다.
나는 먼저 내 방에 들러 권총과 소음기를 챙겼다. 그리고 고민하다, 후안의 편지와 이제는 누가 썼는지 헷갈리게 된 검은 봉투의 편지도 품 안에 챙겼다.
다시 나온 복도는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게 한적했다. 난 12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푹신한 카펫에 발소리가 먹혔다.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눈 앞에 호텔 안에 있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고양이…?”
샛노란 눈을 빛내는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인기척 때문인지 나를 한번 보았다.
하악―!
고양이는 몸을 크게 부풀리며 날 한 번 위협하곤 곧 계단 쪽으로 도망쳤다.
이런 곳에 고양이라니. 로비에서 본, 장난같은 규칙이 쓰여 있던 안내문의 내용이 떠올랐다.
‘고양이를 발견하는 즉시 내선 전화를 통해 프런트에 안내 해 주십시오. 즉시 고양이를 ■■■ ■■겠습니다.’
규칙이 신경쓰이지만 지금은 12호에 가는 게 중요하니, 난 사라진 고양이에 대한 관심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쓸데없는 데 정신 파는 건 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2호 객실 문 앞에 도착한 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 귀를 기울이다 멈칫했다.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12호의 문은 날더러 들어오라는 듯이 살짝 열려 있었다. 딱 작은 동물이 드나들 만 한 틈새로 안쪽이 보였다.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깨질 수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모조리 파편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잔해 사이로, 진녹색 카펫 위에 엎드린 누군가의 구두 밑창이 보였다.
난 복도로 나오는 사람이 없는지 주시하며, 그리고 문 뒤에 새로운 희생자를 노리는 누군가 없는지 확인하며 12호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방안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던 신선하고 비릿한 피 냄새가 코 끝을 자극했다. 이 안에 사람은 바닥에 쓰러진 저 자 뿐이었다. 헤진 카키색 정장을 입고 있는 연갈색 머리의 남자.
…카키색 정장?
난 도자기 조각 몇 개를 밟아 으스러뜨리며 시신 쪽으로 다가가 천장을 보게 뒤집었다. 그는 401호 방에 묵는다던, 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 만난 그 남자였다.
얼굴을 확인한 내가 일어서려는데, 시신이 팔을 움직여 내 손목을 잡았다. 아직 숨이 붙어있었나보다.
끊어져가는 목소리로 그가 내게 무어라 말했다.
“도…ㅁ……ㅏ……ㅇ……ㅊ…ㅕ……ㅅ…ㅇ…….”
남자의 말이 끊겼다.
깔딱거리는 숨이 섞인 탓에 난 그가 뭐라고 말한 건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뉘앙스로 보아 내게 도망치라고 하거나, 누군가 도망갔다고 말하는 듯 했지만, 이마저도 뒤에 무슨 말을 잇고 싶었는데 숨이 끊어져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일 수 있어,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절대 ‘살려줘’라고 말하려고 하진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는 뜻이겠지.
남자의 몸이 차게 굳는 게 느껴졌다. 팔을 거둬 그의 손을 가볍게 털어냈다. 카펫에 진붉은 얼룩이 졌다. 날붙이에 당한 것 같았다.
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들고 이 방의 원래 주인일 사람의 흔적을 찾았다.
망가진 물건들로 가득한 방 안에서 지갑이며 여권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런 것들보다 더 흥미로운 물건을 찾았다.
검은 편지봉투.
내 품 안의 물건과 같은 재질의 봉투가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 난 그걸 찢어, 안에 든 편지를 펼쳤다. 내용은 놀라웠다. 검은 편지 속의 후안이 목표했던 그 사이비 교가 언급되어 있었고, 동시에 죽은 이가 그 사이비 교주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 있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교주님을 노리는 것 같으니 반드시 옆에 있어주십시오.
편지 말미에 적힌 말은 401호에 머문다던 이가 왜 412호에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정작 412호의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은 이 근처에 없었다.
어디에 있는 거지?
또 어째서 교주를 죽이자는 이야기와 교주를 지키라는 부탁, 상반된 내용이 같은 종이봉투에 들어 있는 걸까.
이 질문들 중 어느 것에 대한 해답도 412호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이곳에 남은 건 지저분한 사건의 잔해와 희생자 뿐.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움직여야 했다.
내가 다시 복도로 나와 문을 닫았을 때, 408호 문이 열리며 남녀가 싸우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쓰러져 있던 남자와는 다른 의미로 엉망진창이 된, 쥐어뜯긴 것 처럼 엉망이 된 머리모양에 헝클어진 넥타이, 손톱에 깊게 긁힌 뺨의 상처 탓에 못 봐줄 만한 행색인 젊은 남자가 방 밖으로 밀쳐졌다. 문 안쪽에서 꽃병 하나가 그의 머리 바로 옆으로 날아오더니 벽에 부딪혀 깨졌다.
“쓰레기 같은 자식!”
입에 담기엔 껄끄러운 욕설 몇 마디가 끝나고, 408호 문이 거세게 닫혔다. 남자는 문짝에 달라붙어 굳게 닫힌 문을 몇 번 두드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못 본 걸로 해주십시오.”
그가 말했다.
아무련, 그건 내 특기지.
아무래도 목표는 408호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주 우연히도 성이 같은 것이 아니라면, 부부거나 남매, 혹은 사촌일 사람이 머무는 407호도 용건이 없어졌다. 그렇다면 남은 건 죽은 사람의 방과 412호, 그리고 내 방을 제외한 9개의 방인가. 빈 방이라고 해도 다른 누가 미리 어떤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으니까. 다만 빈 방은 프론트에 문의하지 않는 이상 확인할 길이 없으니, 남은 건 402호, 406호, 409호와 411호였다.
나는 방금 지나친 411호를 뒤돌아보았다가, 여전히 408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똥줄타는 고양이처럼 문이 다시 열리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가 나와 있는 한, 나도 이곳 저곳 마음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저 남자를 먼저 복도에서 치워야 한다. 다행히 이 호텔 안엔 상처받은 사람을 떨궈놓기 딱 좋은 장소가 있다.
“술이 고픈 얼굴이군요.”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며, 함께 위로 올라가지 않겠냐고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내 제안에, 남자는 고민했다. 미련이 남은 얼굴로 몇 번이고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내 문 쪽으로 시선을 주는 것이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성실히 확인하는 게 야속하게, 문은 엘리베이터에 탈 때까지 흔들리는 일조차 없었다.
차라리 문이 열렸으면 나았을 텐데. 그랬다면 안을 보거나, 아니면 방해가 되는 저 남자를 안으로 들여 보낼 수 있을 테니까.
13층에 도착하자, 양쪽으로 갈라진 길이 보였다. 한 쪽은 아예 닫혀 있어서, 어디로 갈 지 고민할 일은 없었다.
바는 내 예상보다 더 북적였다. 좋은 일이었다. 보는 눈이 많다는 건, 아무도 서로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바텐더 한 명이 우리가 들어서는 걸 보고 창가의 작은 테이블로 안내했다.
“위스키 한 병. 가장 독한 걸로.”
남자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바텐더가 얼음버켓과 호박색 유리병 하나를 가져왔다. 온더락 잔 두개도 함께.
나는 잔 두 개에 술을 가득 따랐다.
남자는 보기보다 술이 강한 지, 취기가 돌기까지 무려 한 시간이나 필요했다.
“…처음 본 사람에게도 친절하시네요.”
취기가 올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 상황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간의 친절이 나오는 법입니다. 속이 풀릴 때 까지 쭉 들이키세요.”
남자를 완전히 취하게 만들어 떨궈 놓기 위해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꾸미며 또 다시 술을 권했다.
그가 세 번째 잔을 비우며 혀 꼬인 말투로 주절거리는 걸 흘려들으며, 난 잠시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테이블이 있는 쪽 창은 호텔 뒤편으로 나 있었다. 창밖으로 후원의 풍경이 보였다. 몸을 다 가리는 코트를 걸친 사람 한 명이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후원을 맴돌고 있었다. 로비에 내려갔을 때 잠시 봤던 노인으로 보였다.
“무얼 보십니까?”
남자도 내가 보고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저 사람…….”
“아는 사람입니까?”
“어…….”
늘어지는 대답에 남자를 돌아보니, 그는 술에 취해 반쯤 감긴 눈으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아까…….”
나는 답답함에 반사적으로 술을 입에 가져갔다가, 진한 술 냄새에 슬며시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일부러 남자를 취하게 하려고 따른 술이었기에, 당장은 마셔서는 안 되었다. 조금은 아쉬운 걸.
“그으……. 4…… 4…….”
더듬더듬 말하는 말 사이에 숫자가 나오는 것에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저 노인, 4층의 어느 방에 머물고 있는 사람인 건가?
노인이 걸음을 멈춰 섰다.
불이 나갈락 말락 하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만다라 모양을 그리며 깔린 벽돌 바닥이 보였다. 등을 구부린 채 문양 한 가운데 원에 선 노인의 모습은, 불쾌한 의식으로 세상에 불려나온 원귀처럼 보였다.
노인이 고개를 들어 위를 봤다. 난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 늙은이, 분명히…….”
테이블에 팔을 괴고 엎드린 젊은 남자가 중얼거렸다.
“40… 4호에서 나오는 걸….”
남자는 이내 골아떨어졌다. 난 그에게 위스키를 먹인 걸 후회했다.
노인이 후원을 떠나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호스트 코멘트
곧 4화 스레드를 세우겠습니다. 참여자 분들이 바로바로 후원금을 받아가실 수 있게 하는 취지로 장편 연재분 정도 분량으로 각 화를 마감하고 있긴 합니다만, 잘 받아가고 계시는지 확인을 못해 아쉽네요.
제 골드가 300골드 정도 남아 있기에, 그걸 다 쓸 때 까지 로-메인 호텔 404호를 완성하는 게 목표입니다. 지금까지 전개는 잘 되고 있는 것 같아 안심입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참여자
후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