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가 사유를 사유한 사유는 이러하다.
보편적으로 사유란 그 시발점을 찾는 것보다는 흐름을 따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지적 활동의 일종이었다. 그러니 사유를 사유한다는 과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반적 생각의 흐름을 따른다는 보편타당성을 배제할 필요가 있다. 오도 가도 못 한 채 차디찬 바닥에 결박되어 쓰러진 사람이 할 수 있을 법한 일이라곤 사실 그러한 사유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백지처럼 하얗게 변색된 머릿속에선 도무지 쓸만한 걸 건져낼 수 없었다. 일단 사유를 시작한 시점부터가 명확하지 않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전달되는 일차적인 감각. 꿈과 현실을 오가는 망상의 소용돌이도 사유의 일부라고 여긴다면 그렇다. 반면에 논리적인 맥락을 갖춘 생각의 고리가 시작된 지점은 분명했다.
‘지금 여기서 소리를 내는 게 안전할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이렇게 묶여 바닥에 던져져 있는 사유를 명확히 파악해야 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었다.
남아있는 기억은 깨진 유리처럼 파편으로 남아 드문드문 존재할 뿐이었다. 그중에서 떠오르는 몇몇 장면들. 분명 자신은 퇴근 후 동료들과 간단한 반주를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건 아니었지만, 택시 안에서 졸음이 쏟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더 이상의 특이점은 없었다.
그렇다면 택시에서 납치된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바싹 메마른 입을 열어 소리쳤다.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만일 자신이 납치된 게 맞다면,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돈? 계좌를 털어봐야 마이너스 작대기 하나가 그어진 숫자 목록의 나열뿐, 딱히 내어줄 돈은 없다.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를 이렇게 납치까지 했다면, 납치범은 신체 장기라도 팔아서 무언가라도 건지려 하지 않을까? 어디서 주워 보기론 동남아나 중국에 산사람의 장기를 비싼 가격에 팔곤 한다는데. 하지만 알코올과 흡연, 기나긴 스트레스에 절어버린 몸뚱이에서 꺼내 갈 장기라도 있긴 할까? 결국 납치범이 와도 아무것도 내어줄 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지만, 혼자만의 사유에 빠지다 보니 알코올 때문에 끊겼던 기억이 드문드문 되살아났다. 그랬다. 택시에서 납치된 게 아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구토로, 택시에서 도망치듯 내렸더랬다. 택시 기사는 비상등을 켠 채, 그가 토하는 걸 무서운 눈으로 지켜만 보았다. 그 험악한 분위기가 도저히 감당 안 되어, 황급히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하나를 건네고 다시 구토로 돌아갔다. 언뜻 택시 기사가 부족하다고 뭐라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 후로도 한참이나 전봇대를 부여잡고 토악질을 하던 그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곤 집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가 비틀거리는 걸음이 그를 어떤 골목으로 인도했고, 가지 않던 길로 집으로 가는 일이 색다른 경험일 것이라고 여긴 주취 상태에서 자신의 몸을 낯선 곳으로 움직이는 데 동의했다. 용케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담벼락이며 전신주에 쓸린 양복이 온통 엉망이었다. 그리고 어두운 길목에서 누군가를 보았던 것 같다. 아는 얼굴이었는데, 하고 기억의 창고에서 인명록을 꺼내려던 그를 현실로 끄집어낸 것은 갑작스레 들려온 문 열리는 소리였다.
“있어.”
납치범의 대답은 건조했다. 대답과 함께 깡, 깡 바닥을 두드리는 쇠파이프 소리가 들려왔다. 퍽 위협적이었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고개를 들어 올리려 했으나 목덜미가 뻑적지근하게 아려 왔다. 신음을 삼키자 상대방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애써 힘 빼지 마.”
곧 모든 게 끝날 거라는 투였다.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꿈틀꿈틀 몸을 뒤집자 지저분한 천장이 보였다. 낯선 곳이었다.
“힘 빼지 말랬더니 더 빼는군.”
감정이란 게 담기지 않은 말투였다. 그러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질없는 어느 몸부림을 제풀에 지쳐 멈출 때까지 방치할 뿐이었다.
“다, 당신 누구지?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잠깐의 고민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자신의 입을 저주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대방은 말없이 쇠파이프를 끌고 다가와선 다짜고짜 휘둘렀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듯 기괴한 소리가 나며 강렬한 통증이 그의 뇌를 뒤흔들었다.
“아악, 사, 살려…”
입에서 튀어나오던 말은 마치 입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다시 한번 쇠파이프가 그를 내리치는 바람에 호흡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목이 턱 막혀왔기 때문이다.
“규칙 하나, 버릇없이 나불대지 않는다.”
그는 고통에 뒤틀면서도 다시 맞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몸부림을 멈추었다. 자신의 몸이 피에 젖기라도 한 듯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있음을 느끼며, 아직 덜 가라앉은 호흡의 가파름을 자각하면서, 그는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은 다시 멀찍이 그로부터 떨어졌고, 그의 뒤편으로 눈부신 빛이 그늘을 만들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렇게 봐도 내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을까?”
그 목소리에 담긴 섬뜩한 악의에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로서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군가한테 이 정도로 심한 원한을 산 사유가 없다. 도대체 누가 이다지도 맹렬한 악의를 자신에게 갖을 수 있단 말인가?
“대체 누구시죠?”
한껏 겁먹은 쥐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공손한 태도 때문인지 상대는 쇠파이프를 휘두르지 않았다.
“맞춰봐. 그런 거 좋아하잖아?”
‘좋아하잖아?’ 분명 그리 말했다.
둔기를 손에 쥐고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어 보이는 상대는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단서가 부족하다. 단서가 적당히 주어지지 않으면 제대로 사유할 수가 없다. 그는 눈앞의 사람이 쇠파이프를 들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늘 속의 사람이 본인의 목소리로 말하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심지어 체형이 어떤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헛물만 켜다가는 불교에서 말하는 사유(死有)의 순간을 금방이라도 맞이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조금이라도 단서를 얻기 위해 되물었다.
“좋아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이냐니, ‘위대한 사유자’가 사유하길 좋아할 거라는 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볼 만큼 어색한 이야기는 아닐 텐데.”
젠장, 도대체 무슨 수작이야.
이렇게 말하고픈 마음이 ‘사유’에 앞서 가슴으로부터 꿈틀거렸으나, 그게 결코 현명한 행동이 못 된다는 것 정도는 아직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이성’은 남아있었다.
“나는 이런 식의 수수께끼 추리 같은 걸 사유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아아, 사유자여, 그대는 사유에 ‘등급’을 나누는 건가?”
상대는 그를 조롱하듯 말하곤 다시 입을 닫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흩어놓았던 그의 사유를 다시 시작도록 했다. 마지막 기억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다. 분명 면식은 있었는데 바로 떠오르지 않는 이, 내게 먼저 인사를 해오는 상대의 얼굴에 짧은 탄성과 함께 아는 척은 하지만 도무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인물, 그런 얼굴이었다. 기억 속의 그 인물과 앞에 있는 인물이 동일인인가? 떠올려야만 했다.
“혹시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가 다시 날아들지 모르는 파이프에 대한 두려움과 욱씬한 가슴 통증을 어렵사리 이겨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을 때, 상대는 재미있다는 듯 웃어 보였다.
“어떻게든 힌트를 얻으려는 모양이 유쾌하기 그지없어.”
남자는 쇠파이프를 들고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으나, 애써 봐야 밧줄에 살갗만 쓸릴 뿐이었다.
탕.
어느새 다가온 남자는 쇠파이프로 바닥을 가볍게 쳤다. 그러나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사내는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일은 전부 까먹었나 본데, 내가 좀 원한은 잘 안 잊어.”
그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유추해봤다. 그의 말을 이리저리 종합하여도 영 이상한 결론만 났다. 그는 일평생을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함으로, 우연이라도 이 사내와 엮이게 될 가능성이 없었다.
그를 더 골치 아프게 만드는 것은 사내의 말이 함정일 가능성이었다. 그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는 어쩐지 조금 흥미가 식은 듯 쇠파이프를 매만지고 있었다. 또다시 쇠파이프를 들어 그의 머리를 내리칠 것만 같았다. 그 때문에 끊임없이 사유를 이어가던 그의 머릿속에서 모든 끈들이 뒤엉켰다. 그날의 사고, 괴롭히던 편지, 하다못해 지금 상황과 비슷한 서사를 겪는 매체 속 인물들까지 전부 엉켜 그는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지나온 날들 중에 사내는 그와 연결된 어떤 순간을 찾는 건가. 그는 모른다, 아니 안다. 아니 단정할 수 없다. 단서를 모으려 해도 각기 다른 퍼즐에서 집어온 조각들처럼 아예 맞들지 않다가, 또 퍼즐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것처럼 맞들었다가. 지금 확실한 건, 저 쇠파이프에 후려 맞으면 멀쩡하지 못하리란 감뿐이었다.
“왜, 다시 맞기라도 할까 봐?”
“아뇨, 아니요. 혹 정말로 그런다고 해도, 그땐 제가 뭘 할 수 있는 게 있긴 합디까?”
그는 상대방을 짐짓 도발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어조로 자신은 그런 두려움이 없다 거짓말로 일축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저는 초면이든 구면이든 우선 서로 이름하고 나이도 말해보면서 어떻게 해 나가보는 게 어떨지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런 건 대화에 필수적인 주재료가 아니지. 특히나 네 대갈통을 따서 뭘 갈취하려는 사람한텐. 수작 부리지 마.”
섬뜩한 말을 하는 것치고는 식후에 담배 피우러 가자는 어조로 답하는 것이, 그에겐 이판사판은 개뿔 판이 엎어졌다는 직감만 떠오를 뿐이었다. 저 쇠파이프는 뭘 의미하는 것인가. 이런 심각한 상황에도 그의 사소한 반항은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생각해보자. 사라진 기억. 쇠파이프를 들고 위협하는 남자. 원한 관계. 끈질기게 요구하는 사유에 대한 사유. 어찌 보면 흔한 클리셰 같은 상황이고 이런 흔한 상황에 처하게 된 이유 또한 흔할 수밖에 없다. 그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무작위로 정답을 골라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눈앞의 남자에게서는 단지 그가 절망에 빠져 허덕이는 광경을 지켜보려는 광기를 넘어 그가 답을 맞출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스릴이 느껴졌다. 힌트가 없을 리 없다.
우선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목소리가 낯익지 않으니 최근까지 가까이 있던 인물은 아닌데…… 그는 강렬한 빛에 눈을 찡그리면서도 상대를 파악하려는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상대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용써봐야 소용없어, 내가 누구인지 알 리가 없으니까. 당신은 아직까지 날 만난 적이 없어.”
‘아직까지?’
순간, 기름 먹은 불가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숨이 확 죽었다 폭발적으로 타올랐다. 사유가 가속하기 시작했다. 그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자신이 질색하던 학생들처럼.
“그러니까, 내가, 당신이랑 만난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모든 추론이 허사였다. 목소리는 낯설었지만 안면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애써 기억을 되짚어 본 것이다. 그런데 아예 만난 적이 없다면, 납치범이 누구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지 않은가?
사유는 원처럼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대체 이런 상태에서 사유만으로 어떻게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겠는가! 상대는 불확실한 단서들만을 던지며 그를 조롱하고 있는 사디스트였다.
“그래, 아직까지. 그렇게 용쓰며 기억을 떠올려봐야 이렇다 할 게 떠오르지도 않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아까 당신이 원한이라고 했잖습니까, 분명히?”
“왜 꼭 과거에서 원한을 샀다고 생각하나? 응?”
그러면 당신이 미래에서 오기라도 한 겁니까? 라는 말이 그의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참았다. 이런 상황에서 함부로 입을 놀려봐야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분명 원한이 있는데, 과거 원한은 아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원한이라는 건데, 자신과 연관된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예단해서 이런 납치를 벌인단 말인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지금 준비하는 거 있지?”
“네?”
갑자기 다시 쇠파이프가 날아들었다. 격렬한 통증에 다시 몸을 새우처럼 굽히고 토악질을 했다.
“규칙 둘, 한번 말해서 바로 못 알아들으면 언제든 이게 날아간다.”
무시무시한 폭거였다. 그는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그가 아직 자신의 목숨을 뺏을 정도의 위해를 가하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그의 목적이 돈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를 죽일 마음이 없다는 작은 희망이 그의 머릿속에 똬리 틀고 있었다. 상대가 원하는 건, 그가 살아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 즉 어떤 임무를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묻겠다, 지금 준비하는 거 있지?”
일단 무턱대고 대답했다.
“네, 네!”
무엇을 준비한단 말인가? 현재 연구라고 말할 만한 것도 없고, 그나마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내다 버리기 위해 쌓아둔 헌책들을 정리하는 일뿐인데. 아니, 잠깐. 그는 번뜩 스치는 생각에 눈을 굴렸다.
“책…… 말인가요?”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책. 그랬다. 책이었다. 새로 배정받은 연구실에 전임자가 남겨둔 책. 비어있던 책꽂이에 덩그러니 홀로 남아있던 책. 몇 년 동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버리지도 않고 다른 책들 사이에 묻히도록 내버려두었는데…… 며칠 전에 책장을 정리한답시고 책들을 분리하던 통에 그 책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전임자가 연구 과정에서 남긴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읽으며……
“생각났군, 그럼 됐어.”
그는 마치 잘됐다는 듯 쇠파이프를 몇 번 바닥에 구르더니 냅다 들어 그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그의 정신이 뚝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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