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레드소설

사건수첩-어느 평범한 북부대공의 영지에서 (베타테스트)

사건수첩-어느 평범한 북부대공의 영지에서

흡혈귀라느니, 늑대인간이라느니, 수백년을 살고 온갖 악령을 수족처럼 부리는 흑마법사라느니, 진지하게 믿을 마음은 한순간도 들지 않는 온갖 무시무시한 별명이 붙은 대공의 영지에 제나가 발을 들여놓은 것은 순전히 황명 탓이었다.
공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조사해오라는 명이었다. 횡령 가능성이니, 고발장이 왔다느니 말은 그럴싸했지만 적어도 수도에서 조사해본 바로는 진상이 명백했다. 공납을 트집잡아 대공의 권세를 조금이라도 깎아보겠다는 수작이었다.
“까라면 까야지.”
평범한 쥬사이 인 상인처럼 위장한 채 눈앞의 관문으로 다가갔다.

 

천 년 전에 세워진 관문은 오랫동안 외침을 받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손상된 벽돌과 성벽 위쪽까지 자란 담쟁이 덩쿨이 곳곳에 눈에 띄였다. 일종의 나태함이 이곳을 사로잡고 있다고 확신한 건 파수병들을 만났을 때였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그런 행위가 무색하게 그들은 건네받은 신분증을 대충 검사하더니 통과시켰다. 물론 꼼꼼이 검사했더라도 별 이상은 없었겠지만, 이건 공들여 신분증을 만든 사람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이르하 하발씨,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어쩌면 정말로 횡령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동시에 얼마나 오랫동안 평화로웠으면 검문을 저렇게 허술하게 할까 하는 생각도.
적어도 보고할 게 하나는 생긴 건가. 저렇게 해서야 보안은 괜찮은가-하는 식으로 쓰면 되겠지.
억지로 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자위하면서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 또한 통치자의 대공의 엄청난 악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한가로운 공기가 감돌았다. 도시 광장에 판을 벌린 상인들도 행인들과 느긋하게 잡담을 주고받을 뿐 장사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조사에 협조하기로 약속한 내부 정보원을 찾으러 제나가 도시에서 가장 큰 여관인 링차여관에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관 주인은 스탠드에 걸터앉은 단골과 이야기하는 데 열을 올리느라 새로 들어선 손님에게는 관심을 기울일 여가가 없는 듯 했다.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음식이나 술을 즐기며 늘어놓는 이야기는 흔한 세상살이, 가정사의 범주를 넘지 않았다.
‘듣던 거랑은 좀 많이 다르네.’
대공에게 붙은 소문이 그 정도로 대책없이 무시무시하니 주민들 역시 그 비슷한 이미지가 자리잡혀 있었다. 끔찍한 대공에게 핍박받는 가련한 백성들, 혹은 그 대공에 어울리는 악마의 꼭두각시들.
실제로 본 이들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하기야 소문만 다 믿으려면 쥬사이 인들도 전부 장사만 하겠지.’
적어도 제나는 아니었다. 왕의 감찰관이 보기보다 험한 일이긴 해도 장사꾼보단 명예로웠다.

 

어릴 적부터 장부를 정리하며 살아온 부모님이 이런 생각을 알았더라면 이때까지 누가 어떻게 번 돈으로 살아왔는지 알고 하는 소리냐면서 불같이 화를 냈겠지. 하지만 똑같이 나라를 돌아다니는 처지라고 해도 상인과 감찰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설령 감찰관의 신분을 상인으로 위장해야한데도 말이다.

“어머, 어서오세요! 처음 뵙는 분이네요!”

제나가 잠시 상념에 잠긴 사이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갈색머리를 단발로 자른, 앞치마 달린 원피스 차림의 여성이 방긋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이 여관의 종업원같았다.

 

“우선 이틀 정도 묵고 싶은데요.”

종업원은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네. 숙박비는 하루 20브론즈 입니다. 식사도 같이 하시겠어요?”

“예. 식사도 같이 할게요.”

“그러면 짐 푸시고 이따 내려오셔서 주방에 말씀하세요. 스튜는 얼마든지 드셔도 되시고요, 사냥해오신 고기가 있으시다면 주방장한테 얘기해서 추가하셔도 된답니다?”

헌터스 스튜. 영원의 스튜라고도 불리는 대표적인 북부식 요리를 직접 만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손님 운이 좋으시네요. 내일은 대공님께서 사냥에서 돌아오시는 날이거든요.”

 

처음 만나는 헌터스 스튜에 호기심을 불태우려다 그만 귀가 번쩍 띄였다.
“그런가요?”
“예. 갓 사냥한 짐승 고기가 잔뜩 풀리니까, 축제날이나 다름없다고요.”
종업원이 신나게 설명했다.
“대공님처럼 인심 좋은 분이 왜 이상한 소문이 붙었는지 모르겠어요. 손님도 여기가 처음이라면 대공님이 흡혈귀라는 소문은 잔뜩 들으셨을 텐데, 곧 헛소문인 걸 깨닫게 될 거예요.”
겉으로는 적당히 맞장구쳐 주면서 제나는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종업원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역시 처음의 짐작대로 대공은 멀쩡한 사람이었다.

 

입맛이 썼다. 황명이라는 이유로 찝찝한 일을 수행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일을 맡은 적도 없었다.
‘그야 난 감찰관들 중에서도 아직 새파란 풋내기니까……앗!’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 일이 황제의 뜻대로 된다면 엿을 먹는 건 대공만이 아니었다.
유서 깊은 대공가를 공격하는 일이다. 황제 쪽에서도 만만치 않은 각오가 필요할 것이고, 잘 된다 해도 과정중에 발생할 문제와 이의를 적당한 화살받이에 떠넘겨 꼬리자르기할 준비는 언제든 필요했다.

 

그리고 가진 거라곤 임기응변과 돈 많은 양친뿐인 애송이 쥬사이 인 감찰관은 그 도마뱀 꼬리의 맨 끝에 위치해 있을 게 뻔했다.
‘대공에게 붙자.’
스스로 생각해도 엄청난 결심이지만 주저는 없었다.
상회를 물려받는 대신 감찰관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처럼 제나는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가만히 쥐었다가 폈다.
내일 어떻게든 대공을 먼발치에서라도 봐야 한다. 보고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붙어도 되는 사람 같아보이면 최대한 비밀리에 접근한다.
인생을 뒤바꿀 결심을 했지만 표정은 평온했다. 그런 결심을 들켜선 안 되니까.

 

“그럼, 어디 이 여관의 스튜는 어떤가 볼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스튜 솥으로 다가갔다.
중대한 일을 앞두고는 속도 든든해야 한다. 컨디션을 제대로 유지해야 머리도 돌아가니까.
그리고, 태연한 척을 못 하게 되더라도 스튜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솥에는 뭔지 모를 고기와 덩어리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거품에 떠밀려 다니고 있었다. 뭐가 들어와 끓고 있을지, 앞으로 뭐가 더 들어올지 모르는 솥.
자신의 인생도 이런 스튜 같지 않나, 제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호스트 코멘트

어차피 장편이 되지는 못할 기간이었지만 베타 테스트라는 점을 생각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스레드였는데, 써 주신 분들이 다 훌륭해서 시간만 충분했으면 이대로 독특한 장편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군요.
참여해 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참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