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의 여러분들께,
다들 건강히 지내고 계신지요? 마스크 ‘덕분에’ 두 배로 끈적했던 여름이 이제 끝나가네요. 절기상으로는 입추가 한달도 더 전인데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절기 날짜를 좀 조정해야 되지 않나 생각해요. 하는 김에 경칩 같은 중요한 날은 공휴일로 지정해도 좋지요.
여전히 활동에 제약이 많은 시국인데, 브릿지의 여러 훌륭한 작품들이 바깥 세상에 대한 그리움을 어느 정도는 달래주지 않나 싶어요. 틈틈이 읽으면서 무서워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신기한 간접경험도 많이 하고 있어요.
굳이 고른다면 저는 1인칭 시점의 소설을 좋아해요. 등장인물들이 이름으로만 나오는 글에 비해 ‘나’의 이야기는 왠지 현실성이 배가되는 것 같아요. 작가가 창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는 느낌이잖아요. 덕분에 소설의 내용에 빠르게 몰입되는 면도 있고, 감정이입도 쉽게 되는 편이지요.
이런 1인칭 시점 소설의 장점을 최대로 끌어 올리는 것이 편지 형식의 글이 아닐까요. 편지를 쓰는 ‘나’가 있고, 편지를 받을 대상이 있고, 무엇보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처럼 ‘편지’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거짓말로 점철된 편지 형식의 소설도 재미가 있겠네요.)
브릿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배달중인 편지를 종종 발견하는데, 사는 동안 절대 받고 싶지 않은 편지도 있고, 한 번 쯤 누군가에게 이런 따뜻한 편지를 받아 봤으면 싶은 때도 있어요. 편지의 계절이니 서간체 형식의 글 몇 편을 소개해 볼게요.
우주로 보내는 향기 by 김청귤
리스트를 산뜻하게 시작하는 의미로 골랐어요. 향기 좋은 홍차를 준비하시면 좋아요. 티백이 담긴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차가 우러나는 동안 천천히 읽으세요. 김청귤 작가님의 문장들이 피어올라 당신 주변을 가득 채울 거예요.
연서 by 나강온
1년 동안 이어지는 편지들을 통해 고3 학생의 소소한 일상 속에 멀리 떠나간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슬픈 이야기예요. 그리움, 사랑, 슬픔의 감정들은 특별할 것 없이 사소한 물건, 음식, 행동에 아무렇지 않게 묻어나요. 감정이란 게 점차 빌드업되어 격해지는 것도 좋지만, 시간의 먼지처럼 일상에 빼곡히 올라 앉아 있으면 더 깊은 공감이 가기도 하죠.
답장 없는 편지 by 천가을
제목과는 반대로 부디 답장을 받게 되었으면 하고 기도하게 되는 이야기예요. 교통사고를 당한 나는 병원 옥상에서 한 여인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 글은 이 여인에게 보내는 연애편지가 되어야 해요. 유서가 되면 너무 슬프니까요.
어느 편집장의 편지 by 하나와 앨리스
두 장의 편지로 구성된 이야기예요. 첫번째 편지는 만화잡지의 편집장이 독자들에게 쓴 내용인데 십년 전에 갑자기 활동을 중단한 인기 만화 작가 피터 모리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두번째 편지는 당사자인 피터 모리스에게 쓴 것이에요. 두 사람의 유대감과 공통의 아픔 그리고 치유에 대한 이야기인데 익숙해서 더욱 그럴듯한 에피소드 선택이나 이야기의 흐름 등, 기술적으로 굉장히 잘 쓰여진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좀비 정국에 올리는 편지 by 문녹주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네요. 좀비와 정국이라니요. 좀비사태가 진행 중인 한반도에서 총선에 나선 여당 대표인 큰엄마에게 시조카가 보내는 편지예요. 좀비물에 대한 색다른 접근이 신선하고 이야기의 진행도 흥미진진하게 읽는 이를 몰입시켜요. 소외 계층에 대한 이야기가 씁쓸한 뒷맛을 남기네요.
뱀의 편지 by 가람
TV에 나와서 딸을 잃은 슬픔을 이야기하는 여배우의 모습을 독기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내가 있어요. 독자들은 당연스레 나의 입장에서 여배우를 의심하지요. 어린 여학생의 친구를 향한 선망과 질투, 애정에 대한 일그러진 갈망이 빚어낸 비극적 진실이 밝혀지면 비로소 제목의 의미가 이해되네요.
누군가의 유서 by 코코아드림
학교 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들에게 남기는 편지예요. 분노에 치를 떨거나 아픔에 울부짖는 모습이 아니라 담담하게 이야기를 전하는 말투가 읽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네요. 제목은 유서라고 밝히고 있긴 하지만, 가해자들이 기억하는 나의 모습을 버리고 조금 더 당당한 나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싶어요.
코코아드림 작가님이 최근에 공개하신 화제작 <무저>도 편지 형식을 띄고 있어요. 이미 많이들 읽으셨겠지만 참신한 내용도 리포그램1이라는 형식도 박수 받아 마땅한 작품이에요.
친애하는 선생님께 by 엄성용
교도소에 수감된 연쇄살인마와 그의 추종자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간의 폭력성과 살인의 쾌감에 대해 논하고 서로를 부추기는 역겨운 내용이에요. 물론 마지막에 반전이 있지요. 속 시원하거나 개운하지는 않더라도 이해는 간다 싶은 이야기예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글을 계속 읽는 과정에는 호러 장인의 솜씨가 발휘되었지요.
여러분은 어떤 편지를 쓰고, 어떤 편지를 받고 싶으신가요? 저도 겨울이 오기 전에 따뜻한 편지를 한 장 받고 싶네요. 아니, 호러 작가님들은 펜을 내려놔 주세요. 이만 줄입니다.
추신.
부족하나마 제가 썼던 편지도 하나 붙입니다.
손편지 by 오메르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