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하지만, 나는 과학자도, 천재도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 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일 뿐.
작품은 이 소개 한 문장으로 주인공의 태도를 미리 밝혀 놓는다. 그리고 정말로, 소설은 끝까지 이 선언을 배신하지 않는다.
올라오자마자 읽었는데 너무 마음에 남았다.
[영웅도, 악당도 아닌 ‘사람’]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라고 하면 흔히 두 부류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된다. 폐허 속에서도 인류애를 잃지 않고 누군가를 구하러 뛰어드는 영웅, 혹은 생존을 위해 모든 도덕을 내던진 악당. 『Day After Day』의 주인공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는 그저 운 좋게 바이러스에 저항력을 가진 ‘보균자’였고, 운 좋게도 도움을 주고받을 이웃이 있고, 그 이웃 데이비드가 오직 자동차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이었을 뿐인, 평범하다 못해 초라한 소시민이다. 그렇다고 절망에 빠져 아무렇게나 살거나, 자살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골목에서 비명이 들려도 “또 약탈을 당한 건가….” 하고 짧게 읊조린 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반대로 자신의 집을 털러 온 이들에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총구를 겨눈다.
이 냉정함이 이상하리만치 비정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다. 오히려 지독하게 인간적이다. 나라도 저 상황이라면 저렇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작가는 주인공을 특별하게 그리는 대신,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는 인물로 세운다.
[하루하루의 무게]
이 소설의 사건들은 거창하지 않다. 통조림을 따 먹고, 식량을 구하러 나섰다가 자신이 약탈당할까 두려워하며 급하게 집으로 들어간다. 폐차들 사이에서 쓸 만한 부품을 뒤지고, 발전기를 찾아 창고를 뒤지고, 침입자를 처리하고 시체를 치운다. 이 모든 것이 ‘일상’이라는 단어로 반복해서 불린다는 사실.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의 반복뿐. 먹을 식량은 언제나 부족하고, 외로움은 떠날 생각을 안 하며, 약탈에는 언제나 대비한다.
세상이 무너진 이유 같은 건 이 이야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병의 기원도, 인류의 미래도, 구원의 가능성도 소설은 굳이 캐묻지 않는다. 대신 시선은 철저하게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틸 것인가’라는 질문에만 머문다. 이 선택이 소설을 관념적인 재난 서사가 아니라, 손에 잡히는 생존기로 만든다.
가족과 나눈 마지막 대화를 곱씹다가도 결국 “오늘은 어떻게 살아 나갈까…”라는 생각으로 돌아오는 장면, 오랫동안 뜯지도 않았던 편지를 읽다가 “빌어먹을”이라는 한마디와 함께 아무렇지 않게 던져버리는 장면은 이 소설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슬픔은 있지만 그것에 오래 머물 여유가 없다. 슬픔조차 하루의 루틴 안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일과일 뿐이다.
[폭력 이후에 남는 것]
침입자들을 처리한 뒤 주인공이 힘이 빠져 그대로 기절해버리는 장면, 그리고 깨어난 후에도 시체를 치우는 일을 그저 다음 할 일 목록에 담담히 얹어 놓는 장면은 이 소설이 폭력을 낭만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사람을 죽인 건가….”라는 짧은 자문 뒤에 밀려오는 구역질과 공황은 생존을 위한 살인조차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다음 문장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죽인 침입자들의 배낭을 뒤져 쓸만한 것들을 찾고, 시체를 치우는 일도, 부품을 구하는 일도, 낙원의 좌표가 적힌 편지를 발견하는 일도, 모두 같은 무게로 하루의 일과 속에 편입된다.
이 소설이 던지는 메시지는 거창하지 않다. 세상이 무너져도 하루는 온다. 그리고 그 하루를 버티는 일은, 영웅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살아야 하니까. 오늘도, 내일도. 그것은 굳이 아포칼립스 세계가 아니더라도,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Day After Day』는 재난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재난 속에서도 계속되어야 하는 ‘먹고사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지상낙원의 좌표가 적힌 편지가 등장하며 이야기는 어렴풋한 희망 혹은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지만, 그 순간에도 주인공은 여전히 발전기를 구하고, 밥을 먹고, 잠을 청하고, 내일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한다. 바로 그 담담함이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든 힘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