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과 연(緣), 그 질기고 지겹고, 못내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 24화 리뷰 감상

대상작품: 당신의 귓가에 음산히 속삭이듯. (작가: 유상, 작품정보)
리뷰어: ZK2, 1시간 전, 조회 12

(※이 리뷰에는 영화 ‘기생충’, ‘큐어’의 결말에 대한 암시적인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랜 호러물의 팬으로서, 부끄럽게도 영화나 게임을 위주로 알고 있지, 웹소설이나 나폴리탄 파스타 같은 요즘의 대세에 대해 잘 모릅니다. Reddit 등지를 돌아다니며 좀 읽은 것이 전부며, 그나마도 2000~2010년대의 그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X(舊 Twitter)에서 작가님의 홍보글을 읽고 우연히 이 시리즈를 읽게 되었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일독하려던 것이 순식간에 전부 읽게 되었고, 어느새 새로운 글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리뷰를 받는다고 하셔서, 가장 인상 깊었던 24화 『부정은 물로 씻고, 업은 기도로 푼다.』에 대해 미흡하나마 감상을 쓰고자 합니다.

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결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부정을 씻어내기 위해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는 이들이 많으며, 영국의 아서왕 설화에서 요정은 호수에서 나오고, 한국에서도 ‘산 좋고 물 좋은’ 깊은 산골에서 신령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산신령이 있다고 믿습니다. 실제로도 더러움을 씻는 주 매개체며, 생명을 유지하기에 대부분의 동식물에게 필수적인 것이라 그럴 것 같습니다(물론 영화 ‘검은 물 밑에서’ 같이, 이 이미지를 절묘하게 일그러뜨려 공포를 자아내는 작품도 있지요).

이 이야기의 제목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다 보면 이 이야기에서 물은 그 이미지와 다르게 쓰인 것 같기도 합니다. 본문의 4번 대목에서, ‘언덕을 오르는 도중에 물이 흐르고, 그것 때문에 굴러 떨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와중에 튼튼하지만 낡은 밧줄을 잡고, 거의 암벽 등반하듯 올라가야 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물은 ‘나’에게 생명이라기보단 오히려 죽음을 연상시키는 고난입니다. 어설픈 저의 식견으로는, 이는 제목에 나온 업(業)을 씻어내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알을 낳기 위해 오히려 거친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떼와 같이, 삶과 죽음은 (특히 불교관에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나’의 부정을 씻어내기 위해 ‘할아버지’는 오히려 고통과 고난의 물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마치 불교와 한국 전통신앙에서 말하는 ‘저승’에서의 여러 지옥 – 생애의 죄를 떨어내고 윤회의 고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과정 – 이나 인도의 수행자들이 겪는 고행을 연상케 합니다. 정결한 음식만을 먹고, 끝없이 걸어가고, 비난과 공포를 뚫고 가고, 언덕을 오르고 물세례를 맞으며, 기묘한 연기에 올라오는 욕지기를 찾고, 무섭고 불가해한 굉음을 참으며, 가고, 가고, 가고, 또 갑니다.

‘대체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내가 그렇게까지 큰 잘못을 했는가?’, ‘남들처럼 살았을 뿐인데.’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납득이 되지 않는 일들이 펼쳐집니다. 기껏해야 어린 아이가 ‘돌멩이 하나’를 부쉈을 뿐인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습니다. 영겁의 고통에 시달립니다. 이게 이 모든 기괴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유인가요? 이 말도 안 되는 것이 세계고, 이 무자비한 것이 신의 섭리가 맞을까요? 우리는 한 개인이고, 한 인간이며, 아무리 명철한 이성과 깊은 심상을 가졌어도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인류 역사상 석학들이 번민하고 괴로워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럼 ‘나’, 아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모든 고통 속에서…

이야기에서 ‘할아버지’는 이야기합니다. “미안하다.”, “미안하구나.” 할아버지는 “이장 어르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평소 눈도 안 마주쳤던 박수(남자 무당)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합니다. 할아버지는 손주의 모든 불행에 납득하지 못했으나, 그는 할 수 있는 것을 합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품을 팔고, 노력하고, 알아내고… 현세와 내세의 연을 다 바쳤습니다. 불교 세계관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밑바닥까지 긁어 내고, 그럼에도 모자랐습니다. 어마어마하다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불합리하고 거대한 공포 속에서,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사랑한단다.”, “너를 믿는다.”

모두 아시는 바와 같이, 대한민국은 현재 선진국이나, 참으로 애통스럽고 고통스러운 근현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정세에 휩쓸려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빛을 되찾은 지 10여 년도 안 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습니다. 정치는 분열되고, 사람들은 영락없이 죽고, 이런 사건들을 한국 근현대사에서 찾자면 무릇 기하일까요.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멋지고 아무리 힘센 개인이라도, 개인은 개인일 뿐, 시대와 국가의 광기 속에서 우리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게 피해를 입어 왔습니다. 지금도 조금만 물어보면 – 혹은 높은 확률로 우리 자신이 – 근현대사의 수많은 사건에서 죽거나 피해를 겪은 이들은 흔하고, 이산가족이 있는 가족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포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그리고 지금을 가슴 아프게만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는 사랑합니다. 혈연의 사랑일 수도 있고, 연인의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가장 직관적인 가족의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질기고 질리고 고통스럽지만, 내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것. 소설 ‘가시고기’에서도 아버지가 기꺼이 아들을 위해 모든 것(돈, 평판, 건강, 그리고 육신까지)을 기쁘게 바치듯, ‘할아버지’ 또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기쁘게 바칩니다. ‘할아버지’에게 ‘내’가 “어린 아이이든, 나처럼 80 먹은 노인네가 되든” 같은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를 위해 내가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어린 ‘나’는 무서워합니다. 학생인 ‘나’는 “이게 뭐야.”라며 불합리함에 분노합니다. 직장인인 ‘나’는 현재에 찌들어 출근을 걱정하긴 하지만, 배려에 감사해합니다. 중년 초입의 ‘나’는 아내를 생각하며 나아갑니다. 중년 후반의 ‘나’는 ‘내’가 무너지면 피해를 볼 아이들을 위해 진력합니다. 나이 든 ‘나’는 힘들어하지만 아내를 생각하고 나아가며, 마지막에 ‘할아버지’를 이해합니다. 늙은 ‘나’는 휠체어를 탄 불편한 몸임에도,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그 사랑과 헌신에 서러워합니다. 생애 끝자락의 ‘나’는 – 이 기괴한 고난을 겪기엔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겨울 것임에도 – 불평과 불만 대신, ‘당신’, 즉 ‘할아버지’의 사랑과 헌신에 그저 감사만을 입에 담습니다. 그가 이제 할아버지이기에.

원(怨)이란 나에게 닥친 부조리에 대한 능동적인 분노며, 한(恨)이란 내가 겪은 불행에 대한 수동적인 증오라고 합니다. 평생에 걸쳐 기괴한 고난과 고통을 겪은 ‘나’에게서 그러나 분노와 증오는 이제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남긴 거대한 사랑과 베풂에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오직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 ‘손주’에 대한 사랑뿐입니다. ‘나’의 헤진 육신은 손주들이 불행을 헤쳐 나가기 위한 도구(삽)으로 쓰일 것이며, ‘나’의 빛바랜 영혼은 이 거대하고 부조리한 업을 조금이나마 풀기 위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나’ 또한 ‘할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바칩니다.

저에게 있어 호러, 즉 ‘공포’란 현실과 맞닿아 있는 예술 장르입니다. 아주 극단적이고 불편한 순간들을 현실에서 떼어 와 극화시키고, 이를 통해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화 ‘기생충’은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아주 훌륭한 호러 영화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는 점프스케어 하나 없을지언정 너무나도 섬뜩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위대한 호러 작품이란 ‘그 다음’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고통스럽고 부조리합니다. 성인인 우리는 이를 (최소한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습니다. 호러물은 그것을 다시금 생각나게 합니다 – 그리고? 저에게 있어 좋은 호러물이란 ‘그리고 그 다음’을 (단편적으로나마, 암시적으로나마)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호러물의 등장인물들은 끝끝내 실패할 수 있습니다. 육신은 불가역적으로 손상되고, 영혼조차 타락하고 비겁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그 거대한 공포들을 한순간이라도 직시하고 뚫고 나가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노력을 우리 관객은 볼 수 있고,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를 은연중에 생각합니다. ‘기생충’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백일몽을 꾸지만, 정말 가능성이 한없이 낮지만, 그럼에도 노력하고자 합니다. ‘큐어’의 주인공은 – 결국엔 ‘전도사’로서 타락할지언정 – 아내를 사랑하고자 노력했고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고자 전력을 다해 왔었습니다. 우리는 몰입했고, 우리는 (일정 수준 이상) 공감했으며, 우리는 그 감정을 같이 느꼈습니다. 이렇게 예술로서의 ‘카타르시스’가 가장 잘 느껴지는 장르가 호러라고 생각하여 늘 애정을 느낍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는 결국 구원받지 못합니다. 영겁의 고통을 겪고, 매번 잊고, 매번 고통을 받고, 다 헤쳐 나왔음에도 막다른 길, 영원한 어둠 속에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독자인 우리는 그저 슬프거나 무서움만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꼈고, 그들의 후손들도 – 비록 고통받을지언정 – 이어져 내려오는 사랑 안에서 함께 씩씩하게 삶을 살아갈 것임을 압니다. “부정은 혈맥을 타고 흐르는 것이겠지요.”라고 ‘나’는 걱정합니다만, 그러나… 부정뿐만이 아니라 사랑 또한 함께 후손들에게 계승되어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이 이상의 원한은 없는 것이겠지요.

부정은 물로 씻고, 업은 기도로 푼다. 24화의 제목입니다. 이 제목을 빌려 이 이야기에서 제가 느낀 바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자 합니다. “불로만 태우는 것이 정화가 아니며, 스스로 행하는 것만이 덕(德)은 아니다.” 아주 평범한 우리는 아주 평범하게 사랑을 베풀 수 있고, 그것이 우리 주변에 영향을 조금씩 미치며, 어쩌면 그것이 정말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합니다.

24화가 가장 인상적이라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만, 작가님의 모든 작품에서 문재(文才), 그리고 인간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과 애정을 느낀 바 있습니다. 간만에 글을 써서 졸문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뿐입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건필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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