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을에서 바쳐지기 위해 길러지는 아이가 있다. “여자는 교만과 겸양을 분별하면서부터 타락하”므로 “내내 순수해야 하는 처녀는 책을 펴거나 붓을 잡아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들으며 순백의 모습을 강요받는 아이가 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앉아서 수를 놓는 것과 하루 일과에 맞춰서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는 것뿐이다. 바다의 신에게 제물이 되는 그날까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쳐지기 위해서일까.
마을 전체가 처녀를 감시하고 있다
소설 <공희>는 처녀공양 설화와 그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동시에 품고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태초”부터 섬과 함께 있던 신당에 처녀를 공양하는 한 마을은 무척 폐쇄적이며 비밀스럽다. 태초는 ‘세상이 생기던 때’를 가리키며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간의 깊이와 두께를 가진 단어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신화’라고 분류한 이 소설을 시작하기에 가장 적당한 말이기도 하다.
바다에는 미신이 많다. 재해가 많기 때문이다. 자연이 주는 재해가 극심할수록 사람은 재앙의 시작을 숭배하고, 재해가 시작된 지점이 불분명하다면 ‘신’으로 그것을 대체한다. 인간은 ‘두려움’에게 무언가를 바치기 시작하며, 바쳐지는 것은 대체로 통제되기 쉬운 것들이다. 사회적으로, 상대적으로 약자인 어린아이와 여성을 바치는 세계의 무수한 인신공양 설화는 여기에서 기인했으리라. 소설 <공희> 속 ‘처녀공양’이라는 인재(人災)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다만, 이 소설은 가장 정결한 제물을 만들기 위해 일반의 인신공양 설화와는 다른 방법을 취한다. “남자들이 외지로 나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아이를 사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를 16세가 될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기른다.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집중하는 모습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이는 ‘인간’을 공양한다는 설화의 잔혹함을 극대화하는 대목이다. 공동체 내의 아이가 아닌 타지의 존재. 그리고 약자에게 끊임없이 의무감을 부여해 바다뱀에게 바친다는 초반의 설정은 이 마을에 대한 이미지를 선명하게 독자들의 머리에 남긴다.
타자이며 동시에 약자인 여자아이는 바쳐질 날을 향해 길러진다. ‘완벽한 순수함’을 가장한 강요와 억압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합의한 결박으로 여자아이를 옥죈다. 알지 못하는 마을에서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앉아서 천을 짜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수동적인 일이 아니다. 천에 수를 놓는 행위는 처녀가 될 아이에게 하나의 탈출구로서 작용한다.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하기에, 역설적으로 아이는 가장 자유로운 세계를 직물에 수놓는다. “그곳은 무한히 열려 있으나 동시에 완결된 세계”이다. 아무것도 경험한 적 없는 아이가 그려내는 공간은 한 호흡으로 읽자면 황홀하다. 자신의 색과 모양을 앗아간 마을, 가장 답답한 방에 앉아 아이는 다채롭고 새로운 것들을 그린다.
그렇기에 아이가 처녀라는 속박성을 획득하는 과정에 있음에도, 소설의 초반은 닫혀가는 답답함 가운데 독자들에게 숨쉴 구멍을 주며, 해방은 아이가 수놓는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구원, 하지만
처녀가 바쳐질 시기가 임박했을 때, 한 명의 무사가 등장한다. 여느 인신공양 설화와 마찬가지로 처녀를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귀한 가문의 자제, 올곧고 선한 성정. 많고도 다양한 설화에서 쓰인 ‘남성 구원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닌 이 무사는 바닷가 마을의 공양 제사에 대해 듣고 섬을 찾아간다. 그리고 궁대를 고치겠다는 핑계로 처녀가 된 아이를 찾아간다. 이래저래 암호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처녀와 무사는 아무날 아무곳에서 만나기로 한다. 그리고 무사는 바다뱀을 무찌르고 여인과 백년해로를 약조한다.
앞의 과정은 무척이나 매끄러워서 다른 생각을 할 새가 없이 주루룩 읽어내려갈 수 있다. 인신공양 설화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구출의 장면만으로 <공희>가 끝난다면 몹시도 아쉽고 평범한 이야기가 될 것이지만, 다행히도 그렇지 않다. 작품의 방점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역시 뱀을 죽인 무사의 공로가 아닌 여성에게 찍혀 있기에, 소설은 이어지며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이후에 여인과 무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주목하게 된다.
구출 이후, ‘해괴한 풍속’이 있는 섬에서 자랐다는 이유로 여인은 어려움을 겪지만, 이내 그녀는 야무지고 성실한 모습으로 무사의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이전에 살던 마을에서 했던 것이라고는 천에 수를 놓는 것밖에 없던 여인은 그 일을 지속해서 이어가지만, 이를 “사치”와 “뇌물”로 왜곡해 “나라의 기강을 흔든다”라는 소문이 돌아 무사는 여인에게 수놓는 것을 금하라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단순한 수놓기가 아닌 ‘세계의 창조’라는 큰 의미가 있던 행위를 그만두는 것은 여인에게 힘든 일이었다. 여인은 끊임없이 실과 바늘로 그림을 그리지만 그녀의 수놓기는 아무데에도 “소용되지 못”했다.
독자들은 여기에서 ‘무사’로 인해 또다른 속박을 당한 여인의 모습을 본다. 무사도 결국 여인을 가두는 인물이 되었다. 캐릭터의 입체성으로 인해 무사는 독자들에게 ‘구원자’가 아닌 두 번째 감옥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여인은 그 안에서 갇히지 않고 끝까지 직물에 수를 놓는다. 마을에서 그랬듯,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수를 놓는 것은 지극히 창조적이며 해방적인 이미지를 획득한다. 그리고 작품의 초반, 여인이 아이였을 때, 섬에서 수를 놓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사방이 닫힌 곳에서 자유라고는 수를 놓는 일 외에는 없었던 여인에게 또 한 번 황홀한 세계가 나타난다. 그 장면은 환상적이고 신비롭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가 된다. 무사가 꾸는 꿈과 현실에서 여인의 수도(繡圖)를 암시하는 일이 벌어지고 그 일은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무사는 기기묘묘한 그림을 여인이 수놓은 것을 보며 자수가 집안을 망친다고 생각한다. 그는 분노하며 여인이 짜던 직물을 전부 태워버린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유를 빼앗긴 여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꿈을 꾼다.
“비천하고 또 비천하기에 자유로운 광대”가 손을 내밀며 “부채와 탈과 춤”으로 여행의 자유를 주겠다고 한다.
소설의 초반, 여인은 순백의 흠결없는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흰색은 ‘무결함’을 의미하지만, <공희>에서의 무결은 동시에 속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인이 삶의 끝에서 꾸는 꿈은, 그곳에 나오는 ‘얼굴이 검은 광대’는 무엇을 의미할까. 흰색과 검정의 적절한 대조는 ‘어두움’에 자유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순수’에 얽매여 있던 여인은 검은 광대를 만나고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검정은 흠결이 아닌 ‘풀려남’으로 기능한다.
무사의 높은 지위와 광대의 ‘비천함’ 역시 대조를 이룬다. 여인을 가두던 ‘지위 높은 가문’과 비천한 광대의 모습 역시 대척점의 속성을 지닌다. 낮은 지위는 자유가 된다. 여인이 마지막으로 꾸는 꿈은 속박과 자유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대비되며 중첩되고 고조되는 해방을 만들어낸다. 여인은 비로소, 스스로 무사에게서 벗어난다.
남편의 말에 규정되지 않으며, 남편의 말에 바쳐지지 않는다.1
다시 시작되는 신화
<공희>는 ‘무사’의 캐릭터를 결말부에서 다시 뒤집는다.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 이후 만신창이가 된 무사는 다시 그녀가 자란 마을을 찾는다. 마을에는 인신공양의 풍습이 사라진 지 오래다. ‘두려움’을 상징하던 뱀 역시 무사가 과거에 무찌른 이후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무사가 처음 마을을 찾았던 모든 이유가 없지만, 단 하나, 사랑은 남았다. 그것은 무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킨다.
무사는 바다로 들어간다. 무엇도 두렵지 않은 무사는 바다에서 ‘뱀’이 된다. 그리고, 다시 마을에는 바다뱀의 전설이 전해지며 살아있는 처녀를 바치는 풍습이 생긴다. <공희>는 두려움의 끝에서 다시 두려움이 탄생하는 귀로형 신화다. 뱀을 죽였던 무사로부터 다시 인신공양이 시작되는 소설의 결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고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왜 이 소설이 이렇게 끝나야만 하는지. 왜 여인들은 끊임없이 바쳐져야 하는지. 왜 두려움이란 이렇듯 끊어지지 않고 반복되는지.
소설의 초반 등장하는 바다뱀은 “인간에게 친절하지 않”은 존재이다. 하지만 무사가 죽어 뱀이 된 것은 “앞바다를 지키는 수호신”이라 불린다. 그럼에도 두 상황 모두 사람을 바쳐야 한다는 풍습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소문은 왜곡되고 증폭된다. 자연적인 현상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인간은 약자와 타자를 공동체에서 밀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반복되어온 일이다. 두려움 앞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어야 하는 타자의 이야기는 비단 신화나 설화 안에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도 그런 일을 겪는다. 인신공양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수많은 타자와 약자를 규정하고 밀어낸다.
모호한 마을과 분명한 현실. 아득한 신화와 가까운 현실은 <공희>라는 작품 안에서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진다. 마을 사람들처럼 이기적인 마음으로, 무사처럼 사랑한다는 이유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서는 여전히 인신공양을 부추기는 이들이 있다. 공격하는 바다뱀이 두렵기 때문에, 수호신에게 감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를 바친다. <공희>는 무한히 넓고 다양한 이유로 바쳐지는 이들을 위해 쓰여진 소설이며, 그렇기에 작품의 마지막은 다른 시작을 암시한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들이 아닌,
우리가 처녀 공양을 시작하게 된 기원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