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풀이법

  • 장르: 호러 | 태그: #학교 #고등학교 #입시
  • 평점×19 | 분량: 54매
  • 소개: 김지훈에 대한 괴기한 이야기들을 말하자면 며칠 밤을 꼬박 새더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와 알고 지낸 모두가 그러하듯이, 나 또한 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 더보기

삶을 풀어가는 방법의 미묘함 공모 브릿G추천

리뷰어: 노말시티, 18년 5월, 조회 85

이 이야기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천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천재와 그런 천재를 바라보며 좌절하는 이야기죠. 어찌 보면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제목이 조금 특이했어요. <또 다른 풀이법>이라는.

‘김지훈’이 천재성을 발휘하는 문제는 ‘수학 문제 하나에 대한 여러 가지 풀이를 제출하고, 가장 많은 풀이를 제출한 사람에게 가산점을 주는 숙제’입니다. 어렵고 기발한 풀이법을 찾아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많은’ 풀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게 흥미로왔어요.

주인공인 ‘나’의 태도 또한 다릅니다. 주인공은 살리에리처럼 모차르트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더 이상 헤엄치치 않기로 했다. 나는 강바닥에 다리를 박은 채 숨을 참았다. 떠내려가는 아이들, 어떻게든 거슬러 올라가려는 아이들, 물결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린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보통의 존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모차르트가 될 필요가 없다는 건 이제 누구나 알고 있어요. 삶에는 여러 가지 풀이법이 있으니까요. 김지훈 같은 천재가 아무리 어려운 문제를 풀고 아무리 뛰어나고 기발한 풀이법을 고안해 낸다고 해도 내가 괴로워 할 필요는 없죠. 나 또한 나 만의 풀이법이 있으니까요. 사소한 가산점을 받기 위해 시간을 쏟아 붓는 대신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거기에 만족하는 주인공의 태도는 어떻게 보면 현명해 보이기 까지 합니다.

그들은 나와는 다른 아이들이었다. … 올라갈 수 없는 나무를 바라보기 보다는 그 아래에 있는 그늘에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강물 안에서 더는 헤엄치지 않기를 선택한 나를 그들은 흥미롭게 바라보았으며, 나의 그런 느긋함이 좋다고 나에게 종종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주인공의 여유로움은 김지훈과 부딪히면서 무너집니다.

김지훈은 다른 아이들에게 그랬듯이 주인공의 풀이가 틀렸다며 몰아 붙인 게 아닙니다. 그랬다면 오히려 주인공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을 거예요. 주인공은 자신이 그 문제를 열심히 풀지 않았다는 여러 ‘알리바이’들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알고 있어. 형편없지. 조금 더 생각해보면 더 괜찮은 게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딱히 안 하려고 안 한 건 아니지만. 뭐. 앞으로 한 시간 정도 더 생각해보면 더 좋은 걸 생각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반대로 오히려 김지훈은 주인공의 풀이를 칭찬하고 그 덕분에 자신이 더 멋진 풀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며 칭찬합니다.

“별거 아냐. 네 풀이 안에 원래 있던 것들을 펼쳐서 정리한 것뿐이야. 너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노력하기만 하면 돼. 시간을 들여 차분히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거야.”

김지훈은 주인공에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자신을 따라올 수 있다며 격려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런 김지훈의 태도에 더욱 더 괴로워합니다.

“나는 할 수 없어.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것도 있는거야. 내가 만약 이런 걸 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건 뭔데? 왜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데. 이제와서 왜 나를 이렇게 몰아붙이는 건데?”

 

삶에는 여러 가지 풀이법이 있겠죠. 그 중 주인공이 택하고 있는 풀이법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정도가 아닐까요. 이런 풀이법은 주인공 자신을 포함한 꽤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킵니다. 나는 내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 물러나 주는 나로 인해 자신들의 자리를 지킬 수 있으니까요.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주인공이 김지훈이 만들어 낸 풀이의 아름다움을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다른 아이들과 다른 부분이죠. 나 스스로 그런 풀이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그 풀이가 맞고 또 아름답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풀이가 지저분하다는 것도 사실은 알고 있죠.

하지만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게 아름답다고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는 것 조차 사실은 힘들고 피곤한 일이죠. 게다가, 자기 스스로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하는 건 얼마나 무기력하고 막막한 일일까요.

아름다움을 올바름이라고 바꿔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지 아는 것과, 자기 스스로 그런 올바른 길을 가는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 올바름을 주장하는 건 다른 일이죠. 물론 가끔은 김지훈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지 알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올바름을 실천으로 보여주며 당신들은 틀렸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선구자이자 전사 같은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이 나에게 너도 뭐가 올바른 지 알고 있지 않나며, 자신과 함께 싸우자며 손을 내밀 때 나는 선뜻 그 손을 잡고 나설 수 있을까요. 김지훈 같은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그 전쟁터에서 결국엔 중간에 쓰러지고 말 정도의 능력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요.

강바닥에 박혀 있던 다리가 발버둥 치며 주변의 진흙을 밖으로 밀어냈다. 폐를 가득 채우며 입안으로 밀려들어오는 희망에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