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하그리아 왕국 131회차 52-1 스피타만까지 읽고 작성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야기 전편을 읽고 이 리뷰를 읽으시는 걸 추천합니다.
주석과 각주가 달린 긴 이야기를 좋아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주요 스토리 라인을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좋아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숨겨진 이야기나 주요 스토리 라인이 왜 그렇게 흘러갔는지 알려주는 주석과 각주가 잔뜩 달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요. 저는 후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수잔 클라크 지음)은 본문도 분량이 엄청나지만 본문에 숨겨진 배경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주석과 각주를 엄청나게 달아놓았습니다. 난네코 작가님은 주석과 각주를 달지는 않으셨지만 주요 스토리(샤흐라자드와 세 아들들의 하그리아 왕국 후계자 이야기) 못지 않은 주변 인물이나 (이야기 속) 역사적 배경이 되는 이야기에 많은 회차를 할애하셨습니다. 한 왕국의 가계도를 읽고 있는 것이 마치 구약 성서를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등장인물이 엄청나게 많은 글이지만 저는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이 이야기를 샤흐라자드 여왕과 그의 세 아들, 아르샨, 이스카, 스피타만의 가족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아르샨은 장자이지만 좋은 왕이 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있는 인물이지요. 때에 따라서는 냉혹해지기도 해야 하는 왕의 자리는 선량하기만 해서는 지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둘째 아들 이스카는 왕자로서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결혼’이라는 이벤트를 무희였던 누르자한과 결혼하는 것으로 써버렸기 때문에 처가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지요. 그리고 마지막 아들인 스피타만은, 나중에 가서야 샤흐라자드가 깨닫지만 가장 샤흐라자드를 많이 닮은 아들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다음이지요.
샤흐라자드가 죽은 뒤에 일이 전개되는 100회 외전 19-1 중음 하(1) 편을 읽기 전까지 저는 샤흐라자드라는 인물에 몰입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샤흐라자드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봤는데, 자식들에게 애정을 주지 않고 다음 왕위에 적합한 인물인지만 살펴보고 때로는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여버리는 장면에서 그런 면이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지요. 게다가 샤흐라자드는 불새의 꿈을 꾸는 것으로 나오는데, 현대의 정신과적 분석으로는 조현병을 앓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요. 이런 인물이 한 나라의 왕이라는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샤흐라자드가 5살 때 큰아버지 라지한 왕에게 형제들이 모두 죽는 것을 목도한 뒤로 살아남기에 급급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샤흐라자드의 입장에서 그의 모든 생애를 되돌아보는 100회부터 샤흐라자드의 입장에 이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고 왕국을 잘 지키는 것이었으며 왕국을 적당한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이었죠. 저는 만약 샤흐라자드가 딸을 낳았다면 딸을 어떻게 대했을지 궁금했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다른 아들들과 같이 딸을 조종하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끔 음모를 꾸몄겠지요. 그러면 그 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난네코 님이 이 소설에 태그를 하신 ‘강한 여주’라는 말 답게, 어머니에게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장점은 수많은 인물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길을 잃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샤흐라자드와 세 아들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도 몰입도가 있고 흥미가 있습니다. 마치 이야기가 끊임없이 확장되는, 아라비안나이트를 읽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셀림과 타흐마탄, 소흐랍의 이야기도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이렇게 많은 등장 인물과 설정에 휩쓸리지 않고 서사의 중심을 잃지 않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샤흐라자드가 죽기 전까지는 샤흐라자드의 입장에 이입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을 온전히 독자의 편으로 만들지 못하는 이야기도 분명 존재하지만 제 개인적인 취향으로 저는 주인공에게 이입하기 쉬운 글이 읽기가 편합니다.
하지만 샤흐라자드가 죽고 난 뒤로는 주인공에게 이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저처럼 샤흐라자드에게 이입이 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조금만 기다려 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침 샤흐라자드가 말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서 더 많은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 기대가 됩니다. 이 훌륭한 이야기의 제목이 ‘하그리아 왕국’인 만큼, 앞으로 하그리아 왕국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 궁금합니다. 난네코 님이 써내려 갈 하그리아 왕국의 다음 이야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