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 정욕 의뢰(감상)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리뷰어: 적사각, 5월 25일, 조회 104

 정령은 시끄럽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달콤한 말 밖에 입에 담을 줄 모르는 앵무새나 다름없다. 정령은 그것이 그들이 가진 힘에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예언은 시시각각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정령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주도권을 두고 싸웠다. 현세에는 욕망을 분출할 여섯 구멍이 있다. 이보다 더 출구가 더 많았던 적은 역사적으로도 드물었다. 이스카, 란 옹골치 못한 출구가 있지만 이마저도 녹록치 못하다. 불새 꿈을 꾸는 자가 겪어야 할 일이라며 정령은 그를 못 살게 굴었다. 나로서는 구슬리는 편이 강림하기에 편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정신이 무너지기를 기다렸다. 현세에서 인간을 살덩이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불새 꿈을 꾸는 자를 굴복시키는 일도 짜릿하기 때문이다. 불새 꿈을 꾸는 자는 약까지 먹으며 정령에게 저항했지만 인간이란 본디 무른 존재다. 결국 정령에게 굴종할 수밖에 없다는 걸 오랜시간 인간을 지켜본 정령은 잘 알고 있다.

 불새 꿈을 꾸는 자 중 기꺼이 정령에게 몸을 내어주고 살육을 즐기는 이도 있었다. 자신이 죽은 후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서도 모른 채 저지르는 어린아이의 끝모를 장난처럼 굴었다. 궁전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이름 모를 시종을 제물로 바치면 언제든 몸에 정령을 깃들게 할 수 있으니 자신을 불사불멸이라 착각하는 멍청이였다. 정령이 그의 발밑에 있다고 오판하다니. 그는 죽음으로서 자신의 오만함을 증명했다.

 살아있는 인간을 찢고 베고 비명을 듣는 것이 어떤 즐거움으로 다가오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러한 것에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때문에 샤흐자라드도 무스타파도 그들보다 먼저 세상을 호령한 불새 꿈을 꾸는 자들도 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나는 불새 꿈을 꾸는 자에게 작은 소리도 속삭인 적이 없다. 고라도 바바야가도 고르칸도 누타도 루살카도 아히야도 이스라필도 페니할도 아발도 불새 꿈을 꾸는 자에 강림해 현세를 어지럽히고 쾌락을 얻는 것에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에 미쳐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침묵을 반겼다.

 정령이 되었다는 건 나 역시 이루지 못한 욕망 때문일 터. 하지만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어떠한 욕망이 나를 정령으로 빚었는지 억겁을 지나는 동안 알지 못했다. 다만 나도 정령인지라 화산처럼 터지는 정욕을 멈추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새 꿈을 꾸는 자에게 강림하지 않았다. 현세에 고통을 안기고 죽음을 뿌리는 일로는 쾌락을 느낄 수 없었다.

 뭉근한 욕망을 안은 채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나는 다른 정령들과 멀찍이 떨어서서 그들의 난동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고라가 불쌍한 샤흐자라드에게 강림했고 샤흐자라드는 할리메에게 다마스 강철을 꽂으라 명령했다. 다마스 강철 검이 고라의 가슴팍에 꽂힌 순간, 뭉근한 욕망에 쾌락이란 금이 갔다. 다마스 강철 검이 고르칸의 비늘을 뚫고 바바야가의 꽃을 꺾고 페니할의 뿔을 베고 아발의 이빨을 부러뜨리고 고라의 혓바닥을 자르고 아히야의 갈기를 가르고 이스라필의 날개를 꺾었을 때 살아있음을 느꼈고 정령들이 그토록 불새 꿈을 꾸는 자에게 강림하고 싶어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을 적 이루지 못한 욕망을 알았다.

 정령은 태초부터 인간을 희롱하고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서슴없이 인간의 목숨을 빼앗았다. 내 부족을 내 부모를 내 아내를 내 아이를 죽였다. 맹렬한 불길로 형형색색의 꽃으로 단단한 뿔로 날카로운 이빨로 불결한 혓바닥으로 모두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에게서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나는 그들에게 내 목숨마저 앗아가길 바랐지만 그들은 나를 살려두었다. 변덕 때문이었을까. 나는 알지 못했다. 시메야 왕국으로 살레굽 제국으로 아카샤족의 초원으로 하그리아 왕국으로 그들을 찾아 떠났지만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들이 남긴 피비린내 나는 현장만이 무력한 나를 기다렸다. 

 불새 꿈을 꾸는 자를 통해서만 강림한다는 걸 알고 불새 꿈을 꾸는 자를 찾아다녔지만 그들의 행방은 묘연했다. 내가 아직 인간이었을 시절에는 불새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잠시 날갯짓을 쉬고 있었다. 나는 불새를 원망했고 정령을 원망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나는 단 하나의 욕망만을 가슴에 안은 채 아카샤족의 초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의식을 찾았을 때는 기억이 없었다. 아랫배 어딘가 두루뭉술한 욕망을 품은 채 다른 정령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그들이 흘리는 쾌락을 핥아 맛보고는 불쾌함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다 샤흐라자드가 자신의 몸에 다마스 강철 검을 꽂았을 때 흘러나온 고라의 고통에 나는 눈을 떴다. 나의 탄생을 인식했다. 두루뭉술했던 욕망이 형태를 갖추었다.

 나는 정령을 죽이기 위해 정령이 되었다.

 예언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옹골치 못한 출구가 영웅이 되어 정령을 모두 없앤다는 예언. 정령들은 모두 그 예언을 믿고 있다. 절대적이며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질 거라고 믿고 있다. 이스카를 망가뜨리면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는지 혹은 그 시간을 늦추기 위해 혹은 끝이 당도하기 전에 한모금이라도 쾌락을 입에 머금고 싶은지 모르겠다. 불새 꿈을 꾸는 자들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예언이 이루어지는 날. 나, 시카니즈는 영웅의 칼에 강림할 것이다. 그들의 목숨을 날카롭게 벼린 나의 손날로 그들의 목숨을 하나씩 베어 넘길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정령이 나 하나 남았을 때, 나 스스로 나의 목숨을 바쳐 불새 꿈을 꾸는 자에게도 영원한 평온을 안겨줄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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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팬픽은 처음이라 제 멋대로 써버렸습니다.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본작과 어긋나는 설정이 있어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그리아 왕국’ 진짜 재밌습니다.

군상극이라 인물이 많이 나오는데 개성이 짙다보니 헷갈리지도 않고 각 인물의 사연도 전부 이해가 되어 몰입이 아주 잘 됩니다.

세계관도 탄탄하고 공지에 작가님이 남기신 자료 설정도 있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완전 재밌어서 한 번 찍먹하려다가 끝까지 읽게 될 겁니다!

 리뷰 의뢰를 빌미로 전편을 읽을 수 있게 해주신 ‘난네코’ 작가님께 감사드리고 이후로는 빼먹지 않고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