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매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매우 스포일러 함유합니다.
매우매우 매우매우 매우합니다(?)
나는 1984와 동물농장을 좋아한다. 재미있게도 둘 다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 판본으로 읽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1984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안타까웠다. 어느 면에서 이 작품은 1984를 압도한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작품이 안타까웠을까. 어제 새벽 홀로 맥주를 들이켜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1. 분량
우선 분량 설정이 안타깝다. 나는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늘 하던대로 분량부터 확인했다. 대략 원고지 100매 쯤 했는데, 나는 “단편 치고는 적당한 볼륨이로군!” 하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건 사기다. 이 작품의 글감은 이정도 볼륨으로 쓰여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오웰의 1984가 원고지 100매 분량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지 못했을 테니까.
오웰의 1984는 400p 정도의 볼륨으로 쓰여졌다. 이 작품의 내재하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작품이 그만한 볼륨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인물
이것은 분량의 탓이 크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적지 않다. 그러나 절대적인 볼륨 자체가 적은 탓에 인물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방식이 거칠다. 얘는 뭐하던 애, 쟤는 저거하던 놈, 걔는 그거하던 녀석 등등. 단편적으로 비추어질 뿐만아니라 중반쯤 가면 누가 누군지 잠깐씩 햇갈리곤 한다.
만삭의 여성과 그의 남편은 아이덴티티가 확실하니 혼동의 여지가 없었지만, 주인공인 ‘나’를 제외한 주변 인물들은 가면 갈수록 구분되지 않는다. 필요한 대사를 치기 위해서 투입된 캐릭터같달까. 이것은 초반에 여러 캐릭터를 한 번에 투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더 깊게 들어가면 결국 여러 캐릭터를 한 번에 투입할 수밖에 없던 분량의 문제로 귀결된다.
인물과 분량이 얽히는 지점이 비단 이것 뿐만은 아니다. 나는 주인공 인물에 대해서도 안타깝게 생각한다. 결말에서 누군가 주인공에게 ‘당신이 여기서 젤 오래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조금 햇갈렸다.
1) 주인공이 젊은 축에 속하는 것처럼 그려지고
2) 주인공보다 늙은 사람도 있는 데다가
3) 마치 꼬리칸의 현자 같은 국회의원(?)도 나오며
4) 무엇보다 작품 내에서 주인공이 오래 살았다는 걸 눈치챌만한 어떠한 단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룸메가 빠르게 바뀌다가 마침내 룸메가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고 했지만, 그걸론 충분치 않다. 그게 주인공이 오래 살아남았다는 걸 증명하지는 못한다.
나는 리뷰할 때 ‘체호프의 총’을 자주 언급한다. 총을 쏘려면 미리 독자에게 그 사실을 고지해야 한다. ‘나 총 쏠거예요’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 총 가지고 있어요’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총을 쏴도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다. 엑스트라인 줄 알았던 반지닦이가 갑자기 품에서 총을 꺼내 쏘는 것을 보통은 ‘개연성이 없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나도 이 작품의 주인공에게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녀석은 왜 갑자기 탈출 반대파가 된거여?!?! 전혀 그런 눈치가 없었는데! 라고.
총을 보여주되 독자로 하여금 총에 관심을 갖지 않게 하라. 그래야 나중에 총을 쐈을 때 ‘아, 그때 그 총이!’ 하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독자가 관심을 아예 안 가져도 안 되지만, 너무 관심을 갖고 봐도 안 된다. 안개같은 애매함. 그것이야 말로 체호프의 총을 표현하는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생각한다.
3. 분위기
사살 이게 내 제일 큰 불만사항이었다. 이것만큼은 안타깝게 느낀 것이 아니라 불만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 작품은 인권의 아포칼립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데, 어째서인지 분위기가 밝다. 정확히는 어둡지 않다(밝은 것과 어둡지 않은 것은 다른 것이다). 인물이 많아지니까 대사가 많아지는데, 대사가 많아야 하는 까닭은 작품이 독자에게 설명해야 하는 배경 지식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패러독스로 인한 미래의 붕괴인데, 그걸 독자에게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묘사 대신 대사를 택했다. 설명해야 할 것을 대사로 처리하는 방법에는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독자가 그 설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는 것보다야 대사 속에서 핵심을 전달하는 편이 더 재미있다. 심지어 설명에 필요한 절대적인 글자수도 대사 쪽이 더 적다.
그렇지만 설명해야 할 것이 많을 때, 그걸 전부 대사로 처리해버리면 분위기가 밝아진다. 톡톡 튀어버린다. 작가가 의도했을 분위기와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 작품은 (내 느낌으로는) 묘사보다 대사가 더 많은 거 같다. 조지 오웰의 경우를 예로 들어본다면, 오웰은 이러한 설명을 문서의 형식으로 대체했다. 초반에는 일기장의 불법성에 대한 혼잣말+일기를 써내려가면서 세계관의 어두움을 묘사했고, 중반부에서는 골드스타인의 논문 <과두적 정치체제의 이론과 실제>를 통해 설명한다. 후반의 반전은 대화를 통해 밝혀지지만, 이 때의 대화는 고문을 수반하고 있다. 편하게 떠드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4. BIG BROTHER IS WATCHING YOU?
1984의 진짜 악당은 오브라이언이지만, 사람들은 빅 브라더를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빅 브라더야 말로 작품의 핵심 가치를 잘 보여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눈깔 돌아가는 포스터, 텔레스크린 등등. 이러한 감시 속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사각지대를 찾는다. 일기를 쓰는 테이블이나, 여자와 잘 때 쓰는 2층집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는 어떨까. 빅 브라더의 위치에 존재하는 녀석은 ‘스칼렛’이라는 인공지능이다. 그런데 이 녀석 상당히 허술하다. 국회의원 아저씨랑 한참을 떠들고 난 뒤에야 찾아오지를 않나, 침실 쪽은 아예 감시를 하지 않고 있지를 않나. 이래서야 감시자의 존재가 무의미하다.
덴마는 실버퀵 안에서 비밀결사 ‘애플’을 만들고, 게임 채팅을 통해 결사단원들끼리 대화한다. 채팅은 얼핏 단순한 게임 은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은어를 빙자한 암호문이다. 나는 이 작품의 친구들도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다. 우선 작품 중후반까지 ‘적’으로 상정되는 존재를 이토록 약하게 만들어버려서는 안 된다. 빅 브라더는 모든 것을 보고 있어야 한다. 빅 브라더는 모두를 보고 있어야 한다. 사생활 침해적인 시선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적의 우세’ 속에서 인물들은 비밀리에 행동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그 감옥 안에서 스칼렛이 감시하지 않는 유일한 장소를 찾아내야 한다. 마치 윈스턴 스미스가 멀리 기차타고 시골 깡촌으로 나가서 섹스를 즐겼던 것처럼 말이다.
어차피 여긴 안 보이는 데니까~, 하면서 망설임없이 떠들어대는 것은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5. 굴종
나는 요즘 해피앤딩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주인공이 고난을 이겨내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고 끝내는 방식은 쉽다. 그렇지만 그 외의 방식은 정말 어렵게 느껴진다.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오웰의 1984는 밷앤딩의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고문을 통해 윈스턴 스미스는 세뇌당해버린다. 체제를 찬양하고 빅 브라더를 두려워한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를 길에서 보아도 무시해버린다. 이러한 완벽한 굴종은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의 결말은 어떠한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너무 수월’하다. ‘너한테 배신당하지만 결국에는 탈출했다고 투모로폰으로 받았음.’ 이라는 말에 주인공은 ‘아, 다행이다.’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주인공이 스칼렛을 대체하는 새로운 흑막으로 떠오르자마자 김이 확 새는 결말이다. “구라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같은 반응은 아니더라도 “내가 니 말을 어케 믿냐” 정도는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여러모로 결말이 후루룩 지나가버린다. 그 과정에서 나는 작가의 의도성을 느꼈다. ‘이렇게 끝내기로 했으니까, 이렇게 끝내리라’ 같은 느낌이랄까. 덕분에 결말에 등장하는 두 캐릭터가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뭔가 구구절절 단점에 대해 늘어놓았지만, 이 작품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당초 이 작품에 단점만 있었으면 내가 끝까지 읽었을 리가 없다)
1. 포로
1984에서 국민을 포로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세 개의 열강이 백중세였기 때문이다. 공명의 천하삼분지계처럼, 세 개의 열강이 서로 균형을 지키고 있다. 그러면서 오세아니아 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명목으로 국민의 인권을 탄압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났을 때의 소설이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치이다.
그렇지만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인권에 대한 담론도 그에 따라 폭넓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시대에서 인권을 탄압하기 위해서는 전쟁보다 더 빡센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작가는 훌륭한 포로를 찾았다. 작가는 미래를 포로로 현시대의 인물들에게서 인권을 박탈시키기로 하였다. 발상이 대단하다. 대단히 현대적이기도 하다(어쩌면 미래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의 주요한 키워드는 패러독스로 인한 미래의 붕괴이지만, 진짜 주제는 ‘인권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박탈될 수 없나?’ 라고 생각한다. 인권을 지켜서 우주를 붕괴시킬 것인가, 우주를 지키고 인권을 탄압할 것인가. 이러한 대립관계는 한 쪽이 압도적으로 ‘중요해 보일때’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소주 한 병과 인권을 결부시키는 것보다는 우주의 붕괴 쪽이 더 좋은 선택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관계 속에서 독자는 생각한다. 나는 인권을 지키기 위해 우주를 붕괴시킬 사람인가, 아니면 우주를 지키기 위해 인권을 탄압할 사람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독자로 하여금 이런 식으로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 좋다. 책 읽는 보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우주를 지키는 새럼이다. 아 물론 내가 탄압당하는 쪽이면 우주를 붕괴시킬 거다.
2. 내부자
어쩌면 이 내용은 앞서 이야기했던 ‘굴종’ 편과 모순되어 보일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모순되는 내용이 아녜요” 라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나는 스칼렛을 대신하여 주인공 ‘나’가 최종 흑막으로 떠오르는 것이 좋았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결말을 맞았는지”가 아니다. 그것은 흑막으로 대체되고 난 이후에 주인공이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대한 것이니까. 나는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서 이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작품 내내 나는 이 작품의 악당이 스칼렛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인공지능으로부터 인권을 되찾는 이야기. 그렇지만 사실은 주인공 ‘나’가 나쁜 놈이고, 타임 패러독스의 수호자로서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스토리다.
다만 이것은 그 자체가 좋았다는 것이지,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좋았다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주인공이 흑막이라는 티 한 번 내지 않고, 흑막이 되고서는 너무 쉽게 끝나버린다. 이러한 점을 수정해도 훨씬 좋은 작품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절대적인 볼륨을 키우는 것부터 추천하고 싶다. 100매 안에서 해결볼만한 내용이 결코 아니었다고 나는 열렬히 주장하는 것이다!!!)
뭔가 이렇게 길 게 쓸 만한 내용이 아닌데 쓰다보니 길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꼭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1984를 생각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지난 시대의 명작이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이 읽히는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 시대의 이야기가 지금 시대의 사람들을 대변해줄 수는 없을 터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시대를 제대로 그려내는 작품이 필요하다. 1984가 살아남은 것은 아직까지 그러한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내가 좋았던 부분과 안타까웠던 부분을 하나도 빼지 않고 적었다. 보는 이에 따라서 상당히 거칠게 느껴질 수도 있을 법한 어투로 리뷰를 적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이 글을 그만큼 애정하고 있다는 뜻이다(원래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다. 싫었으면 리뷰도 안 쓴다). 만약 이 작품이 상기한 부분을 수정하고 다듬어서 새롭게 적어낸다면 어떨까.
분명 새로운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나는 감히 주장해보고 싶은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작가님의 건필을 빈다.
+ 그리고 내 주장이 헛되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하는 바램도 어느정도 있따. 장편으로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