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과거 인간이 살아간 삶의 총체를 의미한다. 다만 용례를 살펴보면 학문으로서의 의미가 주로 통용되는 듯하다. 학문으로서 그것이 전문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한 의미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까닭에 근본적으로는 그 대상이 ‘인간의 삶’이라는 사실이 잊혀가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임에도 그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만일 이러한 경향이 계속된다면 역사는 인문학이 아닌, 단순히 호고적(好古的) 취미로 전락하고 말아버릴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이처럼 점차 인간이 부재한 역사의 풍조가 점차 만연해져가는 상황을 맞이하여 다시금 역사 소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역사학과 역사 소설은 역사를 대상으로 삼으며, 그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설정하였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하지만 역사학은 당시 인간의 삶을 ‘복원’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역사 소설은 복원된 삶을 ‘예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래도 역사학은 역사 소설로써 생명력을 얻고, 한편으로 역사 소설은 역사서에 기반하므로 양자는 사실상 상호보완적이라 표현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터이다.
이 글에서 언급할 『문무』는 주인공 문무왕을 중심으로 대야성 전투로 막을 올린 이른바 ‘삼국통일 전쟁기’를 다룬 소설이다. 필자는 작품의 인물 선정 및 서술 방식, 참조된 사료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역사 소설로서 해당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다루고자 한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7세기 중후반으로, 이 시기는 동아시아 전체가 전란(戰亂)에 휩쓸린 격동의 시대였다. 중원에서는 기나긴 분열기를 끝맺고 수당 제국이 등장하였으며, 한반도에서는 삼국 간의 상쟁(相爭)이 격화되었다. 이 무렵 고구려에선 연개소문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긴장 상태를 조성할수록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신라를 위협하고 대당 강경책을 추진한다. 백제의 의자왕도 마찬가지로, 불안한 즉위로 말미암아 신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였다. 이러한 정세에서 신라는 자국의 생존을 위해 당과 군사 동맹을 맺고, 마침내 백제와 고구려 양국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당이 신라마저 멸망시키려 하자 신라는 당과 결판을 치러 그들을 완전히 축출하여 결과적으로 일련의 전쟁은 끝을 맺었다.
주인공인 문무왕은 엄밀히 말해 7세기 중후반을 살아간 수많은 인간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삼국통일 전쟁기를 관통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하나의 시대라 표현하여도 무방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대단히 시의적(時宜的)이자 탁월한 선택이라 생각된다.
한편 서술 방식은 여타 소설에서 확인되지 않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원전(原典)에 수록된 내용을 서두에 배치하고,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소설을 전개하여,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소략하기 그지없는 사료가 섬세한 서술과 대비되어 눈길을 끌었다. 작품에서는 인물의 심리 묘사가 매우 두드러지는 편이다. 기록의 틈새에서 고민과 고뇌, 희로애락을 짚어내고자 힘쓴 흔적이 역력하였다. 요컨대 사서의 공백에서 그 시대를 살아간 인간들의 심리를 읽어내고자 하였다는 특징이야말로 『문무』의 강점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를 근간으로 삼았다. 두 사서는 모두 참조하여야만 하는 보충적 성격이 강하나, 전혀 알 수 없는 지점들이 존재함도 자명하다. 어쩌면 알 수 없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문무왕의 왕비 자의왕후는 오직 선품(善品)의 딸이라고 할 뿐 구체적인 가계(家系)가 전하지 않으므로, 역사학의 차원에서는 그 이상의 추측이 불가하다.
하지만 소설은 비교적 상상력이 폭넓게 허용되는 만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역사학과 차이가 난다. 작가는 현전하지 않는 부분을 필사본 『화랑세기』(이하 ‘필사본’이라 약칭)를 참조하여 보충하였으며, 따라서 작중에서는 자의왕후의 어머니가 보룡부인으로 등장한다.
기실 필사본은 박창화에 의해 쓰인 위서이므로 그에 기록된 내용은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이를 문제 삼을 수 있으며 일견 타당한 지적이라 생각하나, 소설의 전개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해당 시기를 다루려면 감수할 수밖에 없는 사료의 영성(零星)함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지점인 셈이다.
덧붙여, 장장 5년에 걸친 기나긴 서사도 어느덧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돌이켜 보면 작중의 어느 한 명의 인물도 허투루 쓰였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없다. 등장하는 이들 모두가 역동적으로 각자의 의지에 따라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악은 분명하였으며 영욕(榮辱)은 뚜렷이 교차하였다. 역사이자 동시에 소설인 이 작품이 독자인 우리에게 제공하는 통찰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음미해 봄직하다.
이상에서 소설 『문무』의 약간을 다루어 보았다. 해당 작품은 역사에서 인간이 지워져가는 풍조가 만연한 와중에 다시금 ‘삶 그 자체’로서 역사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만큼 역사 소설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사서에서는 쉽게 짚어내기 어려운 부분인 각 인물들의 고뇌와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그려냄으로써, 과거의 인간들도 오늘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임을 상기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더하여 문무왕을 주인공으로 선정하였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듯이 한 개인의 일생 속에서 그의 시대를 독해하면 역사와 인간을 이해하는 데서 적잖은 성과를 거둘 것이라 생각된다.
요컨대, 축적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7세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인간 군상을 예술적으로 묘사하여 여태껏 지나쳐 왔던 ‘삶 그 자체로서의 역사’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