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자마자 소설의 장르가 개그가 아닌가 착각했다. 귀신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마침 최근이었는데, 심지어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아 믿고 있었는데, 그 원리가 적용된 작품을 바로 보게 될 줄이야.
작품을 많이 보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호러와 개그는 같은 선상에 어우러지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공포와 웃음을 자아내는 재미는 서로를 등지고 있는 장르라는 인식이 강했어서, 작품을 보고나서야 편견이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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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박령 되기 프로젝트’라는 이름부터 무언가 꺼림칙하다. 원한이 왜 원한이겠는가. 바로 하늘로 올라가던 영혼들이 내 집 마련을 이유로 갑자기 커다란 원한을 만든다는 게 단기간 내에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때마침 날아온 전단지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귀신 앞에, 정말 수상하게도 타이밍 맞춰 등장한 삭이군(사기꾼) 보살, 부적으로 자신들을 아무때나 가둘 수 있는 그들의 존재를 ‘나’조차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인간이 아닌 귀신으로 존재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과 어디로 향할지 모를 승천에 대한 두려움이 갑작스레 다가온 도움의 손길을 의심하기 전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걸 염두에 두고 스님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경계심을 낮추며 다가갔을 테다.
우연으로 인한 죽음조차 살아있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 소비된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현실인가. 자본주의의 폐해가 따로 없다.
읽는 내내 피식피식 새어나오던 웃음은 작품의 막바지에 향하자 어느새 멈추고 말았다.
집주인과 스님이 웃었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비명은 상자 내벽을 맞고 튕겨 내게로 다시 되돌아 왔다. 상자 밖의 두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화를 내면 낼수록, 억울해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에어컨 성능이 좋다며 웃었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귀신의 존재를 믿는 나로서는 어쩌면, 정말 어쩌면 실제로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든, 귀신이든 길에서 사탕 준다는 사람은 절대 따라가면 안된다.
절대불변한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본편인 <{충격}귀/신/동/력/가/전/제/품/판/매/!>를 함께 읽는다면 공포심이 배가 된다. 본편과 외전을 꼭 모두 읽어보시길 추천드리며, 이런 이상한 작품(작가님의 코멘트에 따르면), 더 써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