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초반에 샤흐라자드 여왕님이 이런 모습이려나 싶어 그렸는데, 다 읽고 나서 보니 묘사를 전부 틀려먹었더라고요…
*저는 판타지 쪽에는 조예가 없습니다. 고로 이번 리뷰는 정확성이 다소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읽으시는 분들께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체스 게임처럼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크게 보면 신령(악령)과 정령(사령)이라 불리는 초월적인 존재들이 방벽 이 편과 저 편의 사람들을 기물 삼아 벌이는 양 문화권 간 거대한 충돌이 예정되어 있고, 작게 보면 하그리아 왕국의 권좌를 목표로 정쟁을 벌이는 인물들과 그들의 야망마저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자 하는 여왕 샤흐라자드의 날 선 수 싸움이 이어집니다. 군상극의 특성 상 작품 초입서 한꺼번에 등장인물이 우루루 나와 소개하느라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문제가 있긴 합니다만, 인물들과 친해지고 그들 각자가 지닌 욕망과 목표에 익숙해지면 괜찮아집니다. 무엇보다 장편이니까요. 캐릭터를 이해할 시간은 충분히 주어지니 여유를 갖고 찬찬히 초반부를 읽어도 좋습니다.
소아시아와 주변국을 떠올리게끔 하는 세계관은 매력적입니다. 그것이 그저 인물들 주변의 배경으로 지나가지 않고 연대표 등의 부록과 각종 자료들을 담은 외전 등을 통해 촘촘히 조형됨으로써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이들에게도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한 작품에만 쓰기엔 아까울만치 탄탄하달까요. 이 때문에 [하그리아 왕국]이라는 작품 자체가 이 세계관을 무대로 하는 보다 긴 서사의 도입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작품을 읽는 데 장벽이 될 점이라면 아무래도 높은 폭력성과 선정성이라 여겨집니다. 전 이 작품을 다크판타지로 읽었습니다. 그만큼 잔인하고 적나라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고, 인물들이 처한 상황 자체도 잔혹하고 부조리합니다. 어느 정도 내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크판타지에 익숙하시다면야 알고 계신 그 느낌 그대로 즐기실 수 있습니다. 수사적인 만연체(보통 이사야가 원인이던데)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요소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호였습니다만, 그럼에도 두세 화 전에 일어난 사건을 장황하게 묘사하는 몇 장면들은 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연재 중인 작품이다보니 실시간으로 읽고 계실 독자분께 상기해드릴 필요성이 물론 있겠지만요.
리뷰어 이유이 님께서 이 소설의 문제점으로 ‘주인공이 없다’1는 점을 짚어주셨는데, 저의 경우는 그럼에도 작품의 중심이 되는 인물은 결국 샤흐라자드 여왕이라고 봤습니다. 자신의 세 아들과 궁정인 모두가 저마다 불행을 겪고 또 그들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에 휘말리게 만든 원인은 결국, 왕국이 앞으로 처할 운명을 극복하고자 하는 여왕의 강한 의지와 집착이니까요. 작품을 읽는 도중 끝에 가서 여왕이 아들 중 한 명의 손에 죽겠구나 싶은 감이 있었는데, 후반부에 정설로 못 박혀서 개인적으로 약간 씁쓸했습니다. 주변인과 관계 맺지 못하고 그들을 장기말로밖에 볼 수 없는 권력자의 말로란 그런 법이죠. 그러나 그 끝이 비참할 지, 아니면 숭고할 지는 앞으로의 전개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