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그리아 왕국>을 몇 편 읽으면서 먼저 든 생각은 “이 작가는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생각해놓았을까?”였습니다. 웹 연재를 통해 흔히 볼 수 있는 여느 스타일의 소설들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죠. 이건 <하그리아 왕국>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을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며, 단지 이런 스타일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하여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이 작품의 경우 제가 반하게 만드는 스타일을 특별히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독자들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과감하게 쏟아지는 온갖 캐릭터들, 그리고 그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해 하나하나 장면으로 묘사하기보다, 함축적 이야기적 서술을 통해 바로바로 서사를 전달하는 방식이 그랬습니다. 물론 장면적 서술이 예리하게 중간중간 파고들어 현장감을 더해주고,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뒤바뀌며 해당 챕터의 중심인물에게 감정적으로 밀착했다가, 다시 3인칭으로 돌아오면서 객관화된 서술로 진행하는 방식도 감탄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가장 눈여겨보게 되는 부분은, 권력암투극 특성상 이리저리 얽혀 있는 캐릭터들 간의 관계와 설정을 빼곡이 지정해놓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작가가 이 작품에서 장악하고 인물의 숫자는 어마어마합니다. 작품 내에서 ‘그나마 중심 스토리’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미르셀라와 이사야에서부터 중심의 세 왕자와 그 주변인물이 혼재하여 계속 소개되고(그 외에도 궁정 신하들 또한 등장합니다) 그들의 관계와 각자의 과거 이야기가 풀려 나갑니다. 제가 느꼈을 때 독자는 여기서 다음 플롯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즐기기보다(이렇게 읽어도 재밌지만), 각 인물의 내러티브가 어떠한지 천천히 곱씹으며, 각 캐릭터에 대한 매력을 충분히 인지하고 나아가는 방식으로 즐기면 좋겠습니다. 그러다보면… 저처럼 어느 순간 “이 사람은 어떻게 되지?”하고 정신없이 보고 있을 겁니다.
(제가 여기서 ‘그나마 중심 스토리’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가장 핵심 축으로 작동하는 세 왕자의 황자 탈환전을 제외하고서라도 즐길 수 있는 두꺼운 내러티브로 가득 찬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저는 이 소설을 표현할 때 궁중암투극이라는 말로 다 설명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궁중암투극 장르의 매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나, 이 소설이 가진 장르의 확장성을 축소하는 느낌이랄까요. 아무래도 외전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함께 읽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외전’에서 서술하는 선대 왕들의 건국 스토리와 연대기, 그리고 하그리아 왕국의 둘러싼 부족과 이웃 왕국과 제국에 대한 이야기나 예술과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본편과는 별도로 취급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흥미로웠으니까요.
작가님이 주변부적인 설정을 단순히 설정집을 보듯이 풀어놓은 건 아닙니다. 이를테면 철학에 관한 부분은 중세시대의 철학서를 보는 듯한 문체로, 선대 왕들에 대한 이야기는 궁중사학자가 기록하여 왕에게 바치는 형태로 서술되어, 고서로 기록된 텍스크를 후대의 독자들이 읽고 체험하는 느낌을 전달해주거든요. 하나하나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전 시대에 대한 설정도 어느 하나 허투루 넘어가는 것 없이 작가님이 빼곡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러한 빼곡함을 굳이 공백으로 남겨놓아도 되는데, 현재의 소설을 즐기는데 쓸모가 있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밀도가 높은 맥시멀한 서사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독자분들이 이번 기회에 정보가 터질 듯이 집약된 멕시멀한 소설을 즐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모든 부분을 고려한다면, 이 소설을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같은 군상극 대하 판타지 소설로 분류하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이렇게 분류해도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옛 봉건제 혹은 왕조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 군상극 대하소설에서는 두 가지 소설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통합했던 제국을 상대로, 각종 군벌들이 일어났다가 서로의 세력다툼으로 나아가는 서사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 왕권의 중심을 잃어버린 국가에서 서로 다른 세력들이 새로운 국가(왕조)를 세우기 위해 다투는 부류입니다. 두 부류 전부 국가를 사오분열시키고 세력다툼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그 시작은 좀 다릅니다. 둘 다 결국에는 최후의 영웅이 새로운 국가로 통일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요.(삼국지나 수호지 같은 고전적인 군상극을 생각해보면 되겠습니다.) 많은 군상극이 어느 시점부터는 궁중암투가 아닌 전쟁서사가 주가 되고, 궁중암투를 전개하던 시점(이런 소설들은 초반에 궁중암투를 포함시키는 법이니) 느껴졌던 인물과 인물 간의 세세한 긴장감은 덜해집니다.
<하그리아 왕국>의 경우는 지금꺼지는 두 부류 중 어느 것도 아닙니더. 샤흐라자드는 ‘강건왕’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본편에서는 너무도 건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등장인물들을 컨트롤하는 데도 능수능란합니다(제가 느끼기에는 샤흐라자드가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위험해보였습니다). 하그리아 왕국은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 혹은 <울프홀>과 같은 클래식한 궁중암투극 장르의 장점을 지속해나가고 있는 것이죠. (물론 완결이 안 된 상태이기 때문에 후에 어떤 양상으로 변모할지는 열어둬야겠습니다만) 살레굽 제국과 시메야 왕국 등 이웃 국가의 스토리가 끼어드는 와중, 기존 스토리의 중심을 어그러트리지 않고 궁중암투극 장르의 매력을 살려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이 정도 방대한 스케일에서는 기성의 대하 군상극처럼 전개할 수도 있는 유혹(스토리 상에서 왕을 제거하고 서로 다른 국가를 만들려는 세력간의 다툼)으로 쉽게 빠질 법한데… 암투의 양상을 유지하면서 빌드업 해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3.
내친김에 “이 작가가 어디까지 설정해놓았을까”하는 이야기를 더 해봅시다. 이 소설은 하그리아 왕국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웃의 살레굽 제국과 시메야 왕국, 그리고 각종 자치령에 대해서도 서술합니다. 물론 궁중암투극에서는, 이를테면 힐러리 맨틀의 소설 <울프 홀>에서도 프랑스 왕국 동맹과 신성로마제국의 전쟁이 소설 전개의 중심축인 헨리8세의 결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듯, 다른 나라와의 외교적 관계가 필수적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울프 홀>부류의 웰메이드 작품이 아닌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작품, 특히 가상의 역사를 차용한 작품은 외교적인 관계를 도구적으로 쓰기에만 급급한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잘썼다고 평가받는 작품도 이 부분에서는 미흡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그리아 왕국>은 주변부 국가들의 정세와 문화, 역사 이야기까지 치밀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단순히 잘 짜여진게 아니라, “작가님이 이 소설을 완결하면 살레굽 제국을 무대로 소설을 쓰시려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세밀하게 설정되어 있죠. 아까도 말했듯이 이러한 부분이 저와 같은 맥시멀리스트, 특히 서사와 이야기가 소설의 근본이라고 여기는 부류는 ‘이런 곁가지 이야기도 너무 재밌다!’고 느끼겠으나, 어떤 독자들은 메인 스토리를 방해하는 잡다한 설명으로만 느낄 수도 있습니다(서사 공백이 많고 플롯의 뼈대만 따라가는 소설 위주로 본 사람은 더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셀림이 살레굽 제국의 부름을 받는 부분에서, 살레굽 제국에서 벌어지는 암투에 대한 서술은 저는 놀라게 했고, 이스카가 시메야 왕국과 하그리아 왕국 간의 문화 정치적 차이를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자세를 갖춰서 읽었습니다. 무슨 오버를 떠냐고 할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같은 창작자 입장에서는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가님께서 다른 부류의 스케일 큰 소설을 쓰면 어떨지, 특히 스페이스 오페라 같은 소설을 쓰면 또 하나의 대박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네코 작가님 버전의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가 나오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했습니다.
4,
저는 군상극에서 처음 호감을 가진 인물에게 계속 호감을 주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았어요. 이 인물에게 정감을 가졌다 하면 저 인물도 정감을 가지게 되고, 이 인물이 좀 싫어지려 하면, 저 인물의 비호감적인 부분을 발견합니다. 인물의 일체성이 부족해서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너무 잘해줍니다. 작가님께서 입체적인 인물을 많이 포진시켰다고 봐야겠지요.
아래부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스포일러 처리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루저형 인물, 버려지거나 쓸모없다고 판단되거나, 자신감 없는 인물에게 정감을 주는 편입니다. 자신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내쳐지는 인물에게도 정감이 가는 편이지요.
반면 모든 능력을 갖춰서 처음부터 모든 걸 척척 해결해나가는 인물이나, 일반적으로 호감형인 캐릭터에게는 정감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중반 전개까지만 하더라도 미르셀라와 셀림, 스피타만에게 정감이 갔습니다. 써놓고 보니 이 셋은 스피타만 패거리(?)로 추정되는군요. 특히 날백수처럼 놀고 먹던 셀림이 살레굽 제국의 부름을 받으면서 이후 정세가 어떻게 돌아갈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물론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받은 셀림이지만, 환경이 어떻게 사람을 바꿔놓을지 모르니까요. 자신에게 있었던 능력을 발견할 계기가 될 수도 있고요. 살레굽 제국과 하그리아 왕국에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불지 정말 기대됐습니다. 스피타민을 돌보던 셀림의 모습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보기도 했고, 셀림과 소흐랍과의 관계도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전개상 셀림은 샤흐라자드의 손바닥 놀음에서 크게 벗어나는 거 같지는 않았습니다…. 흑흑
스피타만의 경우는 그 능력이 두각됨에도 처음부터 버러진 패였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습니다. 나약하던 미르셀라가 일종의 사건을 겪고 나서 인간이 흑회해가지고 궁중 암투극에 뛰어들지 않을까도 생각해봤습니다(제가 언더독 캐릭터들을 좋아하는 탓입니다.). 아직 이들의 활약이 많이 부각되지는 않지만, 이 북부 동맹(!)이 살레굽 제국의 힘을 이용해 이 나라를 사오분열시키고 사흐라자드의 (무너트리지는 못하더라도) 뒤통수를 한 방 먹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이스카의 경우는 소설 내적으로는 큰 매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저에게는 그다지 매력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역사서에 나오는, 욕심부리지 않는 흔한 현인처럼 비춰졌달까요? 하지만 비극의 힘은 정말 강하더군요. 오지를 떠돌다 지하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할 때, 이 사람은 이 소설의 주인공 감이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을 보는 느낌이라 더욱 그랬어요. 유능한 왕자였다가 광대처럼 변하는 지점에서 햄릿이, 시련을 겪고 황야를 떠돌며 고통을 감내하는 점에서는 리어왕이 떠올랐습니다. 비극의 주인공에게 그 누가 감정이 동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소설에서 빌런으로 존재하는 자는 없습미다. 굳이 따지자면 비극적인 판을 깔아놓은 샤흐라자드가 가장 비호감입니다. 하지만 이건 제 개인적인 불호일 수 있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모든 능력을 갖추고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을 싫어하는 편이라서요.) 또 역사서를 읽다보면 샤흐라자드는 선대 왕 중 암군이나 폭군으로 통했던 인물에 비하면 악당 축에도 못낄 겁니다. 심지어 민중들의 삶의 질로 따지자면 굉장히 높이 평가받는 리더입니다. 소설 속 시대상과 샤흐라자드의 과거사를 고려해보면 이런 캐릭터가 될 수 밖에 없기도 할 겁니다.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스피타만-소흐랍-미르셀라-셀림 패거리가 뭔가 어떻게든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독자분들은 이 소설을 읽으며 자신을 투사하고 싶은 인물, 응원하고 싶은 인물, 혹은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5.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리뷰를 끝마치겠습니다.
저는 소설에서 설정이 얼마든지 마구 쏟아지듯이 나와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혹자는 가상을 다루는 소설일수록, 그 리얼리티를 재현하려면 ‘설정’을 줄줄이 풀어내는 문단 없이 공기와 같이 장면화해서 서술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주장에 동의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상 세계 속에서의 인물들에게 그 설정들이 ‘리얼’이기 때문이죠. 리얼리즘 소설에서는 이미 우리 앞에 공기처럼 현실화된 설정을 줄줄이 풀어놓지 않지 않느냐고 합니다.
저는 위와 같은 견해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글쎄요? 사실주의 소설도 소설 내부 인물에게 ‘공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설정에 대해 설명을 많이 합니다. 특히 역사를 다루는 소설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김영하의 <검은 꽃>에서 당대 국제 정세를 서술하는 부분이 그렇고, 피에르 르 메르트의 <우리 슬픔의 거울>에서 마지노선이 어떠한 환경이고 어떤 형태로 설계되었는지 서술하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작가가 그러한 설정을 서술하는 방식을 어떻게 택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제게 있어서 설정은, “적어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서술”로 풀어져야 한다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야만 소설 내의 설정을 서술하는 문단이 그저 설명하기 위한 설명이 아니라, 소설 내부의 인물과 상호작용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독자가 인지하니까요.
<하그리아 왕국>음 ‘장면’으로 소설을 쓸데없이 길게 늘어트리지 않고, 함축적인 서술을 통해 쳐낼 건 쳐내고 핵심 장면만 강조하고 던져주는 솜씨가 좋았습니다.
이스카의 도망과 황야의 여정과 재판 부분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누군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수많은 캐릭터를 장악한 작가의 솜씨에서, 인물 각자가 처한 입장을 묘사하는 유려함에서, 신화가 어떻게 리얼리티와 얽히는 지 등에서 배울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주목하는 ‘설정을 이야기로 서술하는 기술’에서도 이 소설은 배울 점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