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명 작가의 단편소설 「팽이버섯 덴뿌라」를 읽고 처음 든 생각이다. ‘무슨 결말이 이래?
소설을 읽으면서 당연히 이렇게 되겠지, 혹은 이렇게 돼야지 하고 마땅히 기대가 되는 전개가 있었는데, 작가는 그런 독자의 기대쯤은 가볍게 무시한 뒤에 독야청청 본연의 모습으로 본래의 의도대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애인의 식성은 고려치 않고 자기 입맛만 옳다고 믿는 무식한 남친에게 들려주는 주인공의 찰진 쌍욕과 이별 통보에 박수를 친 다음, 자기 딸을 성인병으로부터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찬 엄마의 억척스러운 고집에 못 이겨 튀김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던 주인공의 불우한 성장 스토리에 눈물을 머금고, 결국 튀김이라면 자다가도 헛구역질을 할 만큼 튀김 혐오자가 돼버린 주인공에게 마침내 치킨 먹는 법을 알려주는 재준의 구세주 같은 등장까지를 지켜보며 내게는 무의식중에 생긴 어떤 기대감이 있었고, 이 기대감은 이를 가벼이 무시하기로 작정한 작가의 독선적인 결말에 의해 다음과 같은 탄식을 자아냈다.
‘재준이 이 자식은 왜 고백을 안 하는 거야? 왜?’
이 소설을 읽고 얼마 뒤에 나는 우연히 ‘텐동’을 먹게 됐다. 달걀튀김에서 흘러나온 노른자가 간장 소스에 버무려진 흰쌀밥을 만나 고소하면서도 새콤달콤한 오묘한 맛으로 미각을 자극했다. 물론 뭐니 뭐니 해도 텐동의 하이라이트는 밥 위에 얹어져 나오는 덴뿌라였다. 큼지막한 새우튀김을 한 입 베어 물 때, 입 안에서 나는 것이 분명한데 누군가 귓가에 대고 들려주는 듯했던 그 ‘바삭’ 하는 소리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맛있게 한 끼를 때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둘러싼 이 세상은 과연 몇 퍼센트만큼이 진실일까?’ 입 안에 든 튀김을 우적거리다 말고 나는 대뜸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튀김이 안에 든 재료를 숨기고 본연의 맛을 왜곡하는 요리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새우야 워낙에 그 생김새가 뚜렷하니 튀겨도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 수 있지만, 일부 재료는 튀김옷을 입혀 튀겨놓으면 겉으로 봐서는 그 정체를 쉬이 분간하기가 어려워진다. 사실 그날 먹었던 덴뿌라 중 몇 가지는 지금까지도 속 재료가 뭐였는지 알지 못한다.
튀김이 속 재료 본연의 맛을 왜곡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거센 반발을 낳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나를 변호하자면, 나도 튀김 좋아한다. 튀김은 튀김옷의 바삭한 식감과 고소한 풍미로 안에 든 재료를 더욱 맛있게 먹기 위한 하나의 요리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치킨은 닭고기를 더 맛있게 먹기 위해 튀김옷을 입혀 끓는 기름에 넣어 만든 음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닭고기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튀김을 먹기 위해 치킨을 시켜 먹는다. 마치 누룽지가 먹고 싶어서 밥을 짓는 것처럼 말이다. 이 아이러니한 주객전도는 요리에서 주가 되는 재료를 밀어내고 벤치에 앉아 있던 후보선수를 단숨에 주전으로 내보낸다. 물론 그 후보선수 역시 한 팀인 것은 맞지만, 명실상부한 기대주가 주전으로 뛰지 않는 경기를 제대로 된 경기라고 인정할 관중이 과연 몇이나 될까(닭껍질튀김이 처음 나왔을 때 대중적으로 갈렸던 호불호에 대해 생각해 보라. 닭껍질튀김을 먹을 때 우리는 닭껍질을 먹는 것인가, 튀김옷을 먹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때로 이렇게 주객이 전도된 방식의 튀김 섭취를 하는 이유가 나는 튀김옷의 거부하기 힘든 전형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튀김옷의 맛은 전형적이다. 바삭바삭하고 기름진 맛. 그것은 내가 아는 맛이고, 갓 튀겼을 때 먹는다는 전제하에 나를 배신하지 않는 맛이다. 반면에 속 재료의 맛은 가변적이다. 튀김의 정체성은 속 재료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맛일 수도 있고,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맛일 수도 있다. 그런데 튀김옷의 워낙 강렬한 마성 탓에, 때로는 속 재료의 맛이 이에 가려진다. 오죽하면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튀김은 설령 속 재료가 나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더라도 어느 정도 그것을 커버해 주는 음식이다. 그리하여 속 재료가 주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튀김의 섭취가 이뤄지는 경우를 나는 튀김이 속 재료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라 말하려는 것이다.
조금 귀여운 예를 들자면, 그것은 아이가 껍질을 깐 포도알의 달콤함과 부드러움에 매혹되어 넙죽넙죽 받아먹으면서 자꾸만 더 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아이는 물론 포도알 안에 엄마가 교묘하게 숨겨둔 타이레놀을 눈치채지 못한다. 이제 이 글의 주제에 가닿기 위해 조금 섬뜩하게 변용을 해 보자면, 아이는 엄마가 포도알 안에 타이레놀 아닌 다른 무엇을 넣는다 해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본질을 호도하는 튀김옷의 위험성이다. 알약을 넣은 포도알과 정확히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을 ‘당의정’이라 부르는데, 쓴맛과 역한 냄새를 감추기 위해 표면에 당분을 입힌 약제를 말한다. 일단 단맛이 나니까 우리는 그것을 삼킬 수 있다. 단맛이 나는데 심지어 그것을 건네는 것이 엄마라면 우리는 그것을 더욱 쉽게 받아먹는다. 그 안에 든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익숙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것일수록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익숙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꾸만 그런 것을 추종하고 또 그런 것을 재생산한다. 대표적인 예가 대중매체다. TV, 영화, 인터넷, SNS 등의 대중매체는 많은 사람에게 정보를 실어 나르면 나를수록 경제적 가치가 높아지는 구조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때 더욱 많은 수신자, 관객, 사용자, 팔로워 등을 확보하기 위해 대중매체는 자연스럽게 익숙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정보를 위주로 생산하고 유포하게 된다. 해외 빈곤국의 비참한 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보다 로맨틱 코미디 웹드라마 한 편이 훨씬 더 돈이 되리라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다. 보기에 달달하고 설레는 드라마로 현실에 지친 심신을 달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 달달함이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되짚어 보고 있을까.
일월명 작가의 「팽이버섯 덴뿌라」를 읽으며 나와 같이 로맨스를 기대한 어느 독자의 볼멘소리 섞인 댓글에 작가는 이렇게 답한다. “5년 지기 친구에게 밥 먹다 고백하거나 고백받는 일은 여차하면 깊은 배신감과 공포심으로 이어지니까요.” 그러니까 작가가 생각하기에 주인공이 결별의 슬픔과 어릴 적의 트라우마와 개인적인 취향이랄 수 있는 식성을 무시당하면서 경험한 소외와 배제로부터 어떻게든 이겨내 보려고 하는 중요한 순간에 5년 지기 친구의 난데없는 고백은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위험성이 높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주인공을 아끼고 사랑하는 한편 그런 어색한 상황을 잘 못 견뎌 할 것 같은 우리의 작가는 주인공이 무사히 ‘힐링’하는 데 성공하기를 바라마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스티븐 킹이 말했듯, 장르물을 대하는 데 친숙한 우리에게는 ‘불신의 자발적 중단’에 임할 용의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장르적 허용’이라고 하는 어떤 수용 방식이 장르 독자에게는 이미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르적 허용에 따라 우리는 장풍을 쏘고 물 위를 걷는 사람이 등장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무협소설이랍시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요새 웬만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죽자마자 “환생하시겠습니까?”라고 적힌 메시지를 목도하게 되는데, 전연 말 같지 않더라도 우리가 또 흥미롭게 그의 환생을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장르적 허용 덕분이다. 그러니까 어떤 장르적 색채를 띠고 있는 픽션을 대할 때,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 기준에 반하는 다소 과도해 보이고 억지스러워 보이는 장면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이건 원래 이런 장르니까 괜찮아’ 하는 자세로 임하게 된다. 따라서 5년 지기 친구의 고백이 뜬금없든 아니든 우리는 로맨스 소설의 독자로서 그것을 그것 나름대로 충분히 용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독자의 무조건적이고 전폭적인 지지는 작가에게 있어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다.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독자들이 봐주지 않을까? 독자들은 이런 거 좋아하잖아.’ 장르적 허용의 관대한 포용력에 취한 작가는 대중매체가 그러하듯 독자들이 익숙해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이야기만을 자꾸 재생산하게 된다. 그편이 쓰기에도 쉽고 반응도 좋으니까. 하지만 장르적 허용이란 장르물을 보다 재미있게 즐길 수 있도록 사용되는 감상의 한 방식이다. 튀김옷이란 말이다! 장르적 허용의 단맛에 빠진 작가는 결국 본질을 잃고 만다. 본래 쓰고자 했던 이야기, 하고자 했던 말을 잃고 길을 헤매게 된다.
다행히 일월명 작가는 독자의 구미를 당기는 데 치우쳐 장르적 허용에 기대면서까지 억지스러운 전개를 펼치기보다 굳건하게 마이웨이를 선보인다.
이제 이쯤에서 작품의 분류가 엄연히 로맨스물이 아니라 ‘일반’으로 되어 있는데도 로맨스를 기대하며 스크롤을 내려간 나 역시 튀김옷에 현혹됐었다는 사실을 실토해야겠다. 나는 그닥 로맨스물을 읽어 본 적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어릴 적에 잠깐 K-드라마(그 당시 대다수 K-드라마의 서사는 로맨스에 기반했다)에 빠졌던 게 전부이니 대중매체의 학습 효과란 얼마나 무섭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야기를 보다 재미있게 풀어나가기 위해 가미한 일종의 조미료 같은 달달함에 현혹되어 로맨스를 꿈꿨으니 말이다. 아, 우리는 자꾸만 환상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환상은 TV와 SNS 따위가 심어 놓은 정형화된 환상이다!
그래서 결국 이 글의 요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이번에 먹은 텐동 진짜 맛있었다고.
무슨 결말이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