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환상의 매력
다양한 색채를 가진 많은 환상 소설이 있지만, 그 중 많은 수가 J.R.R.톨킨의 세계관에 기댄 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환상 소설에서는 해묵은 엘프와 드워프의 알력이 당연하다는 듯이 소개되고, 유쾌하고 즐거운 하플링의 매력을 이 장면 저 장면에서 등장시키는 바 있습니다. 물론, 모든 환상이 그렇지많은 않습니다. [어스시의 마법사] 같은 환상도 있고, [미드나이터스] 같은 것도 있습니다. 혹은, [디스크 월드] 같은 것도 있네요. 혹은… [어셔 가의 몰락] 같은 몽환도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톨킨의 세계관이 많은 환상 소설의 전범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인간 본연의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적절한 도구가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떤 하나의 사람, 사건, 혹은 사유를 겪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틀에 의해서 드러나는 표상은, 결국 인간 본래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깨끗하게 주어졌던 마음판에, 이것저것 가필을 하다보면, 유달리 드러나 보이는 글씨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다보면, 그것으로 사유하게 되겠지요. 그 사유가 개인차를 드러내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타자와 교류하기에 상당한 물질적/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혹은, 글을 쓰는 이들도, 인간 본연의 것을 드러내고 싶어하지만, 그의 마음판에 진하게 표시된 글씨들이 자신의 작품에 의식적으로/무의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형광펜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한 때는 그것에 소명을 두고 글쓰기를 하기도 하였더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런 소명에서 약간은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간’이 진정 어느 정도의 분량인지 의심케되는 얼척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네요) 그래서, 물론 자신의 사회적 사유와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글을 쓰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현재의 사회와 상황으로부터 유리된 상태에서 글을 쓴다면 조금은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군의 사람들에 의해서 환상 소설은 쓰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가와 레콘, 도깨비를,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하플링으로 치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와 레콘, 도깨비를 실은 우리의 한 몸 안에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서, 나가와 나머지 세 선민종족이 대확장전쟁을 벌이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나와 또 다른 나의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환상 소설은, 인간 안에서 벌어지는 본연의 갈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기제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영도 씨의 소설이 있습니다.
다름을 긍정하기
[눈마새]의 가장 큰 주제는 바로 ‘다름에 대한 긍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긍정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나와 타자(他者)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작가는 다른 표현으로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다른 작품에서 이미 한 바 있습니다. 실은, 나는 나’들’인 것이죠. 나라는 존재가 나답게 되는 것은 바로, 나의 옆에 있는 타자를 긍정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애써 부인하려해도, 나는 누군가와 더불어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삶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것은, 바로 내 옆의 타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곁에 있는 타자를 부정하는 것은, 곧 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단수가 아닌 셈이죠.
작가는 [눈마새]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동생이 적을 말살하는 것을 보면서, 왜 나의 동생은 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까, 세상을 더불어 지내갈 수는 없을 것인가 고민하면서, 적들에게 다가섭니다. 그러한 노력이 두 번 배신당하고, 세 번째의 배신을 앞에 둔 지금, 그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작품내내 작가는 한결같이 넷을 모읍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하기에, 하나는 셋을 부릅니다. 그렇게 모여진 넷은 마치 윷놀이에서 윷가락을 놀듯이 놀아집니다. 선민종족 넷이 함께 나와 너가 다름을 받아들이고 용납할 때, 넷의 놀이는 비로소 오롯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실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나와 다른 것을 나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보다 못한 것이라고 여기라고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여지는 소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라는, 세상에서 완전히 긍정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상에게 제한과 족쇄를 두는 것이 죄 (양장본 4권, 316쪽)
라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갈 뿐,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또다른 것인
다름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 (양장본 4권, 316쪽)
은 애써 제한하며 살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할 때 완전함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하기에, 하나는 셋을 부르기에. 우리는 셋이 되어야하고 셋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넷이 되어 함께 ‘날고, 까불거리고, 부딪히고, 굴러야’ 합니다. 그 순간, 어떤 결과가 나오던 인간은 긍정될 수 있습니다. 함께 했기 때문에.
끝없는 변화로 완성되기
이영도라는 작가가 가진 가장 놀라운 덕목은, 장쾌하게 펼쳐지는 이야기의 한 조각 한 조각에서 의미가 끄집어내어진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계속하여보자면, 그 남자는 결국 세 번째의 배신에 직면하게 되고, 기온이라는 자연 방벽 앞에서 서로 마주하지 않고 살아왔던 네 선민종족이 팔백년만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마주보게 됩니다. 실은 그 때 알아차렸어야 합니다. 팔백년동안 교류없이 지내왔던 네 선민종족이 어떻게 서로 대화할 수 있었는지…
우리만해도, 당장에 백 년 전에 사용되는 언어가 지금의 언어와 다릅니다. 의미가 다르고 용례가 달라지는 세계에 살고 있는데… [눈마새]의 세상에서는 팔백년동안 서로 전혀 접촉없이 살아온 두 사회가, 팔백년 전과 같이 변화없이 지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워했어야 합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 – 혹은 등장인물을 보살피는 – 이 일갈하는 것처럼, 소설 속 사회는 팔백년동안 변화없이 흘러온 사회일 것입니다. 이야기의 끝이 다가오는 순간에서야, 등장인물의 입으로 알아차리게 되는 소설 속 이야기에, 작가의 이야기 구성 역량에 정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아마도 제가 그러한 작가의 설정을 쉽게 인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도 변화라는 것에 민감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겠죠. 다른 말로는 현재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삶이 이미 익숙한 것일 수도…
이미 작가는 다른 글에서 ‘변화하는 것이 아름답다’라고 쓴 바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결국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기다리는 완전성은, 물론 저는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만, 최소한 불완전성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자기 완성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작자들이 말하는 완전성과는 전혀 다른 것일 겁니다. 그런 자들이 말하는 완전성은 고정이고 정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그 완전성은 어쩌면 무수한, 끝없는 변화일지도 모릅니다.” (양장본 4권, 398쪽)
우리들은 완성을 목적하면서 살아갑니다. 더 좋은 대학으로, 안정되고 더 좋은 직장으로 완성된 삶을 원합니다. 그래서 꿈을 물어보면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무원이 되겠다고 말하지만, 공무원으로서 무엇을 향하여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공무원이라는 완성된 삶을 의욕할 뿐, 그것을 발판 삼아 새로운 변화를 향한 꿈을 꿀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완성이 아닙니다. 고정이요, 정체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썩고 쇠락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어야 할 것은 새로운 완성이어야 할 것입니다. 타자와의 끊임없는 어울림을 통해서, 비록 그 다름 때문에 힘겹고 벅찬 나날이 계속되겠지만,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달려가는 인생. 그런 변화를 꿈꾸는 삶 자체가 바로 진화하는 완성의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주제와 이야기의 유리
그러나, [눈마새]의 가장 큰 흠결은, 작가가 가슴에 품고 이야기하는 주제가, 기나긴 이야깃속에 묻어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작가는 그 탁월한 역량대로, 인간과 도깨비, 나가와 레콘이라는 믿을 수 없는 세계관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 세계관이 맞물려 만들어 낸 세계는, 어느 유명한 작가의 세계와 비교해보아도 탁월한 이야기공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이 이야기공간에만 몰두할 뿐, 막상 이야기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은, 작가가 너무 똑똑한 등장인물들을 두어 – 칼 헬턴트나 라수 규리하 같은 – 그 인물들의 입을 빌어 모든 것을 설명할 때까지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를만큼 작가의 이야깃거리가 너무 다채로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바가, 계속 자가발전하고 있는 상태는 아닐까라는 아쉬움도 표시해봅니다. 결국, 다름을 긍정하는 것이나, 끝없는 변화로 완성을 의욕하겠다는 것은, 작가의 유명한 작품인 [드래곤 라자]나 [퓨처 워커]의 해석판 정도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이야기가 길게 유장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독자는 작가와 끊임없이 공명할 수 있어야합니다. [눈마새]는 마치 재미난 옛날 이야기를 듣는 중에 끝나기 3분 남겨두고 중요한 공식을 알려주는 수학 수업과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의 주제를 알려면 끝의 마지막 백 쪽만 읽어도 됩니다. 그 중에서도 세리스마와 라수 규리하의 대화만 봐도 됩니다. [폴랩]처럼, 급전직하의 결말이라는 아쉬운 평을 받았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그렇게 결말지었다면 아마 더 다채로운 독자의 상상 – 과 아쉬움 – 의 여지를 주었을텐데… [눈마새]는 독자의 아쉬움이 없는 대신 – 이야기 자체는 너무 재미나기 때문에 – 여지를 느끼기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17년이 흘러버린 이야기
벌써 [눈마새]가 출간된지도 17년이나 지나버렸습니다. 늘 기념판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듯 합니다. 그만큼 이영도라는 작가가 가진 파급력이 상당하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터이고, 한편으로는 이제 새로운 작품을 출간해서, 기념판으로 독자를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간간히 짧은 단편으로 독자를 만났지만, 이제 이영도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환상 소설을 상징하는 키워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제와는 별개로, [눈마새] 같은 이야기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작가는 평가받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해묵은 이야기 1.
갈로텍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분들의 추측에는 관심없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논쟁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다시 [눈마새]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케이건 드라카의 몸에 갈로텍의 영이 깃들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일단, 케이건 드라카는 신체입니다. 신체에는 일반적인 사람의 영과 육 뿐만 아니라, 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케이건 드라카는 팔백년동안 신이 있다보니, 신과 영이 합쳐진 상태로 존재하게 됩니다. 화신이라면 신이 영을 품고 있는 상태이겠지만, 케이건 드라카는 신과 영이 합쳐진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나가 살육자’가 아니라, ‘나가 살육신’인 셈이죠. 그러나, 케이건 드라카는 나가에게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어디에도 없는 신은 나가에게 잃지 않은 ‘나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과 영이 합쳐진 케이건 드라카는 자신이 나가에게 실은 잃지 않은 하나가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케이건 드라카가 모든 종족의 선망이 되는 ‘나늬’인 데오늬 달비를 만난 순간.
그래서 케이건 드라카는 세상에 독수를 퍼뜨리기로 합니다. 단지 사랑하면서 사는 삶. 가장 무시무시한 독을 퍼뜨리기로 합니다. 아마도 어디에도 없는 신의 권능은 바람이기에, 케이건 드라카가 바라기를 통해 갈로텍에게 바람을 일으켰을 때, 몸 안에 있는 원래의 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야할 곳으로 갈 수 있었겠지요. 카린돌도, 화리트도, 주퀘도도… 이제, 갈로텍과 케이건 드라카는 오롯이 한 영 – 또는 한 신령 – 으로 서로를 맞대면하게 됩니다. 저는 케이건 드라카가 갈로텍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군령자의 개념은 바로 신체로부터 나온 것이니까요. 그리고, 케이건 드라카는 갈로텍의 영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는 아마 떠났겠지요. 자기 자신에게 바라기를 휘두른다면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영이 떠나는 순간, 케이건 드라카의 영은 가야할 곳으로 갔겠고, 아마 어디에도 없는 신은 또다른 영육을 찾아 그 속에 깃들었겠지요. 그래서 갈로텍은 케이건의 껍데기를 쓰고 – 팔백년 동안이나 소드락을 먹었으니 그 효과는 나타날 것이고, 바라기를 휘두를 일이 없으니 더이상 오른쪽 어깨가 무너지는 일은 없을테며, 신명을 가지고 있으니 웬만한 적들은 모두 가볍게 무찌르면서 – 북부를 유람하면서 다닐 수 있었겠지요.
해묵은 이야기 2.
케이건 드라카를 찾아왔던, 그리미 마케로우의 껍데기를 쓴 사람은 바로… 제이어 솔한이 아닐까요…?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