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침묵을 깬 건 보라였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불편한 시선으로 훑어보다가 툭 감상을 내뱉었다.
“…… 이거야말로 괴담이나 다름없네.”
순수하게 놀랐다는 어투였지만 눈빛은 확연히 싸늘해졌다.
“옛날 직장선배가 일방적으로 남자를 만나보라고 강요했을 때도 나는 수개월이나 늦은 만우절 농담에 억지로 웃어주는 기분을 삼키며 집을 나섰어. 정중하게 소개팅을 파토 낼 수 있는 수십 가지 언어를 궁리하며 이곳까지 왔다고. 그렇게 마지못해 자리에 나와 줬더니 이게 무슨 일이야? 여고생 시절에 내 방에서 몰래 도망쳤던 남자친구께서 기다리고 있잖아? 밤중에 다짜고짜 헤어지자고 통보했던 그 남학생이 동창회에 참석한 동기마냥 히죽히죽 웃으면서 다시 나타났다고. 이게 괴담이 아니고 뭔데?”
지훈은 말없이 듣다가 ‘면목이 없어’라며 힘없는 대답만 뱉어냈다. 보라는 황당하다며 눈을 가늘게 찢었다.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기사에 적힌 한 줄처럼 명확한 한마디를 바랐다. 그녀는 변명이라도 들어보자는 기세로 목을 꼿꼿하게 세우며 되물었다.
“…… 언제부터 나인 줄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즉, 사진을 봤을 때부터 나라는 걸 알아보고 소개팅을 부탁했다는 거네?”
지훈은 어깨만 으쓱이다가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치 지갑에서 돈을 훔치다가 걸린 어린아이처럼 솔직했지만, 그것대로 가증스러운 면이 있었다.
“너도 참 괘씸한 거 알지?” 보라가 툭 쏘아붙였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 나타난 거야? 네가 누구인지 알아봤다면 수 시간 전에 여기를 빠져나갔을 텐데.”
지훈은 전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알아.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그리고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선배가 보여준 사진 속에서 너를 알아봤을 때, 꼭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앞섰어. 그뿐이야.”
“그렇게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이름까지 바꾸면서 정체를 숨겼어?”
“딱히 숨긴 건 아니었어. 너도 내 얼굴을 알아볼 거라 생각했거든.”
“미안하게 됐네. 배가 고픈 사람과 화장실이 급한 사람은 구분하는 내 눈조차도 수년 전에 연락을 끊었던 남자친구 얼굴은 구분하지 못 했으니.”
보라가 비아냥거렸다.
“뭐, 네가 방에서 도망쳤다는 걸 알았을 때 머리가 펄펄 끓어올랐던 건 사실이야. 피가 뜨거운 여고생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 시시한 소란에 불과해. 너는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한다는 기분으로 나왔을지도 모르지만, 난 어제 새로 출시한 커피가 내 입맛을 얼마나 만족시킬지 궁금했던 게 전부거든.”
뒤이어 눈이 무언가를 꿰뚫어보려는 듯 가늘게 찢어졌다.
“…… 하지만 아직도 납득이 안 된단 말이야.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우리 사이야 제법 달달하지 않았어? 바로 며칠 전에도 함께 하천을 따라 걸으며 긴 하굣길을 즐겼잖아. 그런데 무슨 일이야? 집에 초대하자마자 몰래 도망친 것도 모자라 헤어지자며 연락을 끊어버리다니. 너무 느닷없잖아. 너도 주제에 수컷이라고 여자애가 방으로 초대한 일이 그렇게 부담이었어?”
지훈은 쉽사리 말을 못 하고 입을 연신 달싹였다.
“딱히 부담이었던 건 아니야. 나도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다만…….”
다만? 그는 눈썹을 찡그리다가 겨우 뒷말을 끄집어냈다.
“…… 무서웠던 거 같아.”
“무서워? 무슨 소리야?”
보라가 한 번 더 대답을 재촉하려는 찰나였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고, 전혀 예상치 못 한 단어가 탁자 위로 튀어나왔다.
“…… 네 언니.”
내 언니? 보라가 뜻밖이라고 되묻자,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 모두 네 언니 때문이었어. 너와 사귀면서부터 네 언니가 조금 이상한 걸 느꼈거든.”